서적소개
확실성에 관하여 (On Certainty)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서광사 / 1997.4.30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근본적 확실성이 우리의 언어 속에,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는가? 등 우리의 상호 대화와 상호 이해의 근본 조건에 관한 물음을 통해, 우리 경험의 한계와 인식 가능성에 관계된 문제를 해명하고 있다.

- 개관
『확실성에 관하여』 (독 : Über Gewissheit, 원래 철자는 Über Gewißheit)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1951년에 사망하기 전 18개월 동안 4개의 개별 기간에 걸쳐쓴 메모를 편집하여 1969년에 출간한 철학 저서이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대략 일 년 반 전부터 죽기 직전까지 몰두했던 특정한 주제, 즉 앎과 확실성의 문법과 관련된 고찰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어는 <외적 세계의 증명>이라는 논문에서 관념주의와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주장하기를, 자기는 외부 사물들의 존재를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두 손을 들어올려 오른손으로 어떤 제스처를 하면서 “여기에 한 손이 있다”고 말하고, 왼손으로 어떤 제스처를 하면서 “여기에 또 한 손이 있다”고 덧붙임으로써, 두 손이 존재하며, 따라서 외부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무어는 <상식의 옹호>라는 논문에서는 “나의 몸은 과거 어느 시간에 태어났고, 그 후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나는 지구 표면에서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나는 인간이다”와 같이 너무 명백하고 진부한 것들이어서 진술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이는 명제들에 대해 그것들이 참임을 확실하게 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식적인 명제들에 대해 나는 안다고 하는 무어의 주장을 가리켜 “무어의 명제들”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일단 두 가지 면에서 무어를 비판한다.
우선 ‘안다’는 말은 (정상적 상황에서는) 어떤 조건들하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실수나 무지, 의심, 확인 등의 가능성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를 (원리상)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듯한 근거들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어의 명제들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뜻이 없거나 극히 불명료한 말들이다.
또한 “나는 안다”는 무어의 단언들은 그가 이러저러한 것을 안다고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 그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완전한 확신과 모든 의심의 부재를 특징으로 하는 주관적 확실성은 물론, 오류가 더 이상 생각될 수 없거나 오류의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배제되었다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객관적 확실성조차도 앎을 보장하지 않는다. 확실성과 앎은 범주가 다르다.
다음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무어가 안다고 주장한 명제들에 주목하였다. 그것들은 경험 명제이거나, 적어도 경험 명제의 형식을 띤 명제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왜 사람이 그 반대를 믿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려운” 명제들이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모든 고찰들의 골격에 속해 온” 확고한 것들이며, “그것을 확고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의 의심과 탐구의 방법에 속한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우리의 “물음들과 의심들의 운동 축”, “모든 판단의 기초”, “언어놀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 “행위와 사고의 기초”, “그 위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전승된 배경”으로, “우리의 경험 명제들의 체계 내에서 독특한 논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축 명제’들이다.
그런데 이런 축 명제들의 확고한 규범적 지위는 그것들 자체가 선천적으로 지니는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나머지 경험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 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은 집 전체에 의해 떠받쳐지는 기초벽이나, 강물의 흐름을 떠받치면서 그 흐름의 영향을 받아 위치를 옮기는 강바닥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축 명제들은 그것들을 떠받치는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면 그 확고한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회의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축 명제들은 모든 판단의 확고한 기초이기 때문에, 그것들보다 더 확실한 어떤 것에 대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동시에 그것들은 또한 의심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의심하는 놀이의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앎과 마찬가지로 의심은 언어놀이를 떠나서, 혹은 언어놀이 이전에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심은 언어놀이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을 전제로 한다. (이 점을 회의주의자, 관념주의자, 그리고 무어는 똑같이 간과하였다.) 축 명제들은 언어놀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이루므로, 의심의 놀이는 축 명제들이 지니는 확실성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축 명제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의심은 아무런 의심도 아닐 것이다.”(450절) 정당화와 마찬가지로 의심에는 끝이 있으며, 그 한계를 넘어가려는 회의주의는 무의미해질 뿐이다.

○ 저자소개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 Ludwig Josef Johann)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1951년 4월 29일에 사망했다.
그의 생전에는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논리-철학 논고》(1921)만이 철학서로서는 유일하게 출판되었으며, 사후에야 그의 후기 대표작인《철학적 탐구》(1953)를 비롯하여《청색 책·갈색 책》(1958),《철학적 소견들》(1964),《쪽지》 (1967),《철학적 문법》(1969),《확실성에 관하여》(1969),《문화와 가치》(1980) 등이 출판되었으며,《유고집》(2000)이 시디롬으로 발행되었다.
이외에도《미학과 심리학 및 종교적 믿음에 관한 강의와 대화》(1966),《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1976) 등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강의록이 여러 권 출판되었다.
– 역자 : 이영철
이영철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와 독일 에를랑겐대에서 연구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진리와 해석』 등이 있고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저서들을 번역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과 데이비드슨 등 현대 언어철학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해왔으며, 언어철학과 인식론을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 출판사 서평
–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이틀 전까지도 몰두하였던 지식과 확실성의 문제에 대한 고찰들을 담은 책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근본적 확실성이 우리의 언어 속에,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는가? 등 우리의 상호 대화와 상호 이해의 근본 조건에 관한 물음을 통해 우리 경험의 한계와 인식 가능성에 관계된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 독자의 평 1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마지막 일년 반 동안의 글을 묶은 것이다. 선별 모음은 아니고, 독립된 주제로 다루어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평생 주제가 그러했듯이, 이 책에는 지식과 확실성, 그리고 상호이해와 객관성 정립의 문제가 다뤄져 있다. 특히 언어를 중심으로 한 인간의 인식의 가능성과 가능근거, 그리고 한계의 문제는 세계의 핵심을 묻고 있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근대철학부터 급격히 중요하게 부각된 인식의 문제는 현대에는 언어를 중심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바뀌었는데, 나는 여기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있다. 언어를 통해서 세계를 다시 복원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축소된 세계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인식론적 문제는 존재론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식의 체계는 존재의 역사, 구성, 관계 속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언어만으로는 객관성의 가능근거와 타자와의 소통가능 근거가 해명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또한 참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을 철저히 해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그런 과정 속에서 읽혔다.

○ 독자의 평 2
일전에 실제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좋지 않은 인상을 가졌던 현대 한국사회의 ‘철학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내가 보았던 당시는 지금만큼 인기가 있진 않았고,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사랑에 대한 강연을 하며 팬층을 만들어나가던 시기였다. 그의 발화법이나 태도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인데, 그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 자세히 얘기하진 않겠지만, 그를 보았던 에피소드는 그때 하려던 일과 아주 밀접해 있어서 특별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 즈음 사랑하는 학문이 대중화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과 그와 동시에 나를 매료시켰던 고상함을 잃어가는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그러한 상황과 인기 ‘철학자’를 마주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한 달도 되지 않아 마음을 접고 그 일에서 발을 뺐다. 인문학의 대중화라는 그 사업에서 말이다. 하고 싶다고 부르짖다가 냉큼 관두어 버린 것은, 분명 채용해준 이들에게 미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후회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내 당돌한 단호함은 그 문제의 ‘철학자’를 볼 때마다 되새기게 된다. 예술의 대중화, 인문학의 대중화, 과학의 대중화. 예술과 순수학문에 애정을 품으며 대학을 다니는 동안,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학문을 하며 돈을 벌 수 없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이제와서는 내가 기피해 마지 않는 그 ‘철학자’와 같은 삶을, 그 때에는 꿈꾸었던 것 같다. 막상 그러한 삶과, 그가 미친 영향을 보고 있자니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고 느낀다. 대중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은 학문 발전의 씨앗이 될 수 있지만, 겉만 핥는 사회적 풍조에서 이는 오히려 어설픈 선무당들을 낳으며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오해된 지식과 잘못된 논리가 궤변에 포장되어 마치 그것이 진리인듯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면, 오히려 해당 학문 뿐 아니라 인류를 무너뜨리는 결과까지도 불러오지 않을까.
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가 사랑하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는, 옹졸한 과거의 인문학도일지 모른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같이, 동경했던 철학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역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지 않나 하고 뒤덮여 있던 철학의 매력이 다시금 와닿는다. 물론, 그의 글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그 ‘철학자’의 글보다 훨씬 어렵다. 익숙해지면 이보다 논리정연하고 보기 편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쨌든 낯설어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구조적으로도 복잡하고 난해하다. 하지만 그의 논리적 사고는 어떤 감정적 호소보다 짙고 명료해 보인다. 최근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의 겸손하고 울림 있는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그도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진리는 없다는 것. 정말로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자신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그것만은 분명하게 믿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안다는 것에 대해 회의한다. 그는 회의하는 것 또한 무언가를 믿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든, 의심하든, 모두 믿음이 우선한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의심의 끝에 자신이 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대며,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확고히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와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아는 것이 불확실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자신이 안다고 믿는 것은 여지껏 배움을 통해 믿어온 것들에 기반하며, 자신이 안다고 믿는 근거를 댈 수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을 타인이 그르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반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그 사람들의 배움이 나와 다르고, 따라서 그들의 믿음이 다를 테니 말이다.
그의 논리를 접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허황된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가 보여주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을 막아줄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앎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포용력을 키워준다. 이러한 것이 있을 때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 씩 원하는 ‘진실’이라는 것에 그나마 가깝게 다가갈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가 아닐까. 대중을 현혹하는 몇 마디 말로 철학 운운하는 것이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가치 있는 철학적 논의를 쉽게 풀어 새로운 가치정립을 해나가는 것이, 철학으로의 대중의 진입장벽을 낮추어 철학적 물음을 대중 안에서 공론화 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대중화가 아닐까.
160. 어린아이는 어른들을 믿음으로써 배운다. 의심은 믿음 이후에 온다.
286.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는 우리가 무엇을 배우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달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고 또 그런 일이 때때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한다: 이들은 우리가 아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일을 제아무리 확신하더라도―그들은 오류에 빠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우리가 우리의 앎의 체계를 그들의 것과 비교한다면, 그들의 체계는 훨씬 더 빈약한 것으로 드러난다.
404.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사람이 어떤 지점들에서 완전히 확실하게 진리를 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확실함은 단지 그의 입장과 관계되어 있을 뿐이다.
611.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가 바보니 이단자니 하고 선언한다.
668. 내가 어떤 보고를 하고,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면, 그것은 어떤 실천적 결과들을 가지는가?
(나는 그것 대신 또한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내 이름이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나의 진술에 대해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신뢰한다면, 그는 기꺼이 나의 말을 들어 볼 뿐만 아니라, 나의 확신으로부터 나의 행동에 관해 특정한 결론들을 이끌어 내기도 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