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과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inson, 1794.4.10~1863.1.27)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성경 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의 출발 또는 탄생에도 걸출한 인물들이 여럿 관계되어 있다. 그중에서 미국인 학자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inson, 1794년 4월 10일 – 1863년 1월 27일)은 성경 고고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그의 삶과 그의 학자적 여로는 19세기 초반기에 미국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사이에서 성경의 권위를 지키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로빈슨의 학문적 성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기독교계의 업적이었다.

에드워드 로빈슨은 1793년에 커네티컷 주의 싸우씽돈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총명한 재질을 보여 커서 농사 일로 인생을 마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목사이었으나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농사꾼으로 변신한 사람이었으므로 아들의 그런 재질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초등 학교 교사를 하며 약국에서 일하던 로빈슨은 마침내 해밀톤 대학(Hamilton college)에 입학하여 스스로의 재질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더와 수학에 비상한 재주를 보여 대학을 졸업하면서 모교에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행운은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염려할 필요 없는 상황에서 마음껏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되는 교수 봉급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나이 30도 되기 전에 아예 은퇴하여 집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에 시간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7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내가 죽고 그는 많은 재산과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한없이 열려 있는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희랍 고전 일리아드(Iliad)를 새롭게 영어로 번역하고 싶었다. 그는 죽은 아내의 농장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메사추세츠에 있는 엔도버 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로 가서 그리스어를 더 연구하기로 하였다. 엔도버 신학교는 자유주의로 변신하고 있던 하버드 대학(Harvard College)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실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이 세운 신학교이었다.
엔도버 신학교의 교수이었던 모세 스튜어트 목사는 로빈슨이 자습으로 그리스어를 깨우친 것에 경탄하며 그렇게 좋은 재능을 성경연구에 바치면 어떻겠느냐고 그에게 제안하였다. 그래서 로빈슨은 스스로 헬라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다음, 2년동안 시간을 바친 결과 성경 히브리어를 완전히 습득하였다. 이에 놀란 스튜어트 목사는 이제 보수진영을 학문적으로 튼튼하게 할 사람이 나타났다고 기뻐하면서 로빈슨에게 유럽에 가서 그쪽 학문적 기술과 방법론을 배워 오라고 제안하였다. 당시에 유럽에서는 빠리, 괴팅겐, 할레, 베를린에 학문을 추구하는 좋은 대학들이 많이 있었고 빌헬름 게세니우쓰(Wilhelm Gesenius)같은 학자들이 비교언어학과 문법학을 도입하여 고대 문헌들을 연구하는데에 시대를 앞서가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때의 유럽학계는 자유로워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자유주의 사조를 오히려 보수적이라고 보던 시절이었다. 유럽의 풍조가 그렇더라도 거기에서 배울 학문적 방법이 로빈슨은 학자로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스튜어트 목사는 로빈슨을 그리로 가게 한 것이었다. 로빈슨은 유럽에서 1830년까지 44년동안 공부한데다가 어느 독일 교수의 딸을 만나 재혼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당시 미국 보수학계의 학술지었던 The American Biblical Repository에 보수적인 성향이 글을 내기 시작하였다.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이 학술지는 한편으로는 중동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성지에서 겪은 지리적 요건들을 사용하여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역설하며 또 한편으로는 로빈슨의 본문연구로 여러 가지 난해한 부분들을 밝히고 있었다. 중동에 나가 있던 미국 선교사들중에서 특히 일라이 스미쓰(Eli Smith)가 지리적인 사실들을 많이 제공하고 있었다. 1837년에이르러서 로빈슨은 학문적으로 보수주의 진영이나 자유주의 진영을 넘나드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는데 그때 뉴욕시에 새로 생긴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그를 성경 문학의 수석 교수로 초빙을 하였다.
모든 학자들이 부러워하던 이 자리를 그는 받기로 수락을 하였으나 3-4년 부임을 연기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변화하고 연구하는 성경의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연구하고 싶었다. 자기의 모든 학문적 방법론이나 성과 중에서 성경의 지리에 대한 무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이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는 일라이 스미쓰의 도움을 받아서 이 일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스미쓰는 아랍어에 능통하였으므로 그때부터
로빈슨이 새로운 학문의 발판을 구축하는데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당시에 성지를 팔레스타인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이집트가 점령하고 있는 상태이었다. 1837년경에는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터키를 물리치고 이집트가 6년간 총독 정치를 하고 있었다. 이 때에는 현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이집트의 통치 아래 팔레스타인의 도로들이 정비되고 무역이 일어나며 행정과 치안이 안정을 찾던 때였다. 그래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같은 서양 여러 나라에서 많은 여행객들이나 순례객들이 팔레스타인을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로빈슨처럼 학문적으로 훌륭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로빈슨과 스미쓰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처럼 이집트에서 시나이를 거쳐서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성경의 지리적 요점들을 연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험하고 열악한 여행 환경을 생각하여 아주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나침반 3개,체온계,망원경, 줄자,영어 성경, 원어 성경, 순례객들이 쓴 여행기 몇권, 그리고 여행 안내서 한 권에다가 텐트 한개,권총 두자루,구식 장총을 준비하였다. 음식은 낙타 등에 싣고 가는 쌀과 비스킷이 전부이었다. 그들에게 더욱 소중하였던 것은 여행 증명서와 현지 베두인 안내자들이었다.
그들은 수에즈 쪽에 가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는지 연구하고 시나이 반도 깊숙이 있는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향하였다. 로빈슨은 거기에 있는 시내산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시내산이라는 것을 알리는 증거를 찾고 싶었으나 실망 만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거기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많은 헌금만 여구할 뿐 정작 성경을 연구하는데는 별 도움이 주지 못하였으며,시내산을 올라가긴 하였으나 수도승 안내자는 어디가 어딘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시나이 반도 북쪽으로 올라온 로빈슨 일행은 아카바에서 요르단 동편으로 돌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로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이집트 관리들의 방해 때문에 포기하고 네게브 광야를 거쳐서 브을세바 쪽으로 올라갔다. 로빈슨은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이삭,야곱,사무엘의 아들들,엘리아 같은 성경 인물들이 이곳을 오고가며 활약했다는 것을 연구하며 벅찬 감격에 빠져들어 갔다. 실로 그것은 편안한 서양 의자에 앉아서 책만 보던 학자에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새로운 충격이었으며 성경은 땅이라는 확실한 무대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며 결코 이솝 우화같은 이야기들의 모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유다 산악 지방으로 올라와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진행중에 말썽 많은 베두인 안내원들을 해고하고 로빈슨과 스미스씨 둘이서 나아갔다.예루살렘의 옛 도성을 보는 순간 로빈슨은 전기에 감전된 듯 하였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많이 듣고 말했던 도시 처음 보아서 낯설어야만 할 성벽이 결코 낯설지 않은 그 이상한 충격! 그는 예루살렘이나 성경의 지명들을 방문할 때에 마치 어린 시절에 알았다가 오랫동안 방문하지 않았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고 나중에 술회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조사를 하였다. 예수를 묶었던 무덤을 덮어 싸게 건설되었다는 교회, 성벽들, 성문들, 물대는 조직, 예루살렘의 지형, 이런 여러가지 것들을 살펴 보고 연구하였다. 로빈슨은 모슬렘 사원인 알 악싸 모스크(은색 원형지붕)와 큰 돌을 덮고 있는 ‘바위성소'(금색 원형지붕)을 포함하는 하람 에쉬 사리프(Haram ash-Sharif: 아랍어로 “고상한 성소”라는 뜻)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지방이 바로 옛날 산악 지대에 있던 헤롯이 만든 성전의 기초라는 것을 밝혀 내었다. 그는 또 하람 에쉬 사리프의 서쪽 벽(지금 그 일부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름)의 남쪽 부분에 삐죽하게 나와있는 부분이 바로 신약시대에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일부이었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그것이 무너지고 나서 남은 부분이 삐죽하게 성전 산의 벽에 붙어 있는 것이다. 로빈슨 이전에 이것을 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못하고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다. 그는 신약성경과 요세푸스의 글에 정통하였기에 헤롯대왕이 만든 신전 산에 대한 이 문제를 푼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것을 로빈슨의 아치(arch)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빈슨은 스미쓰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성경 지명들을 찾아내고 그 위치를 지도에 넣는데 공헌하였다. 즉 당시의 아랍어 마을 이름들이 고대 히브리어 성경의 마을 이름들과 언어학적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수없이 많은 예중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산악 지방에서 발견한 중요한 것들 몇 가지만 들어보자(먼저 쓴 이름이 아랍어이로 나중에 나오는 것이 히브리어 이름이다).아나타 – 아나톳(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향) 제바 – 게바(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운 곳),무크마쓰 -믹마스(앞의 것과 같음), 베이틴 – 벧엘(아브라함이 지나간 곳이며 야곱이 꿈을 꾼 곳).엘집 -기브온(여호수아와 솔로몬의 행적에 나오는 곳)등이다.
로빈슨은 사해 부근을 답사하고 엔게디와 마싸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음직한 곳들도 조사하였다. 그들은 사마리아 지방과 갈릴리 지방에서도 지명연구를 계속하였고 고대의 교회터, 회당터, 마을터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였다.
1841년에 그들은 성지 연구를 마치고 각자 일터로 돌아갔다. 스미쓰는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선교 본부로 돌아갔고 로빈슨은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 있는 자기 교수실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1841년)팔레스타인의 주인은 또 한번 바뀌었다. 유럽 강대국들의 힘을 등에 업은 터어키가 이집트를 몰아내고 팔레스타인을 다시 차지한 것이었다.
로빈슨과 스미쓰는 여행 중이나 연구중, 매일 자세한 일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풍부한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연구 여행이 끝난 후에 자기들의 연구 성과를 [팔레스타인, 시내산, 아라비아의 페트라에서 한 성경 연구(Biblical Research in Palestine, Mount Sinai and Arabia Petraca)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1841년).이 책은 삽시간에 미국과 유럽의 학계를 뒤흔들었고 어떤 학자는 로빈슨의 연구 여행은 오랫동안 묻혀 있던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라는 하나님의 섭리이었다고 하였다. 이 책의 업적이 인정되어 1842년에 로빈슨은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런던 왕립 지리 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 in London)은 금메달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성지 연구 여행중, 황량한 땅을 지나면서 로빈슨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용광로 같이 달아오른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야들, 나무도 풀도 빈약한 산악 지방, 산업 시설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을과 도시들,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하기 짝이 없는 원주민들, 전쟁의 반복으로 주인 없는 땅이 되어 버린 팔레스타인, 이 모든 것이 로빈슨의 뇌리에 지울 수 없게 투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빈슨이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이 어처구니 없는 땅 팔레스타인의 부(富)는 현재에 있지 않고 아득한 과거인 성경 시대에 있다는 것이었다.
로빈슨은 선교 목표나 당시에 보수주의가 열망하던 성경의 진실성 수호를 훨씬 뛰어 넘는 성과를 이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학문적 종교적, 정치적 지평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로 말미암아 성경 고고학(Biblical Archaeology)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선교사를 보내었으나 보수주의 성경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팔레스타인이라는 땅의 영혼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일라이 스미쓰는 두 사업 모두를 위하여 준비된 선교사이었던 것이다.
– 에드워드 로빈슨의 저작들 : Published works
.Dictionary of the Holy Bible for the Use of Schools and Young Persons (Boston, 1833)
.Greek and 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1836; last revision, New York, 1850), based on the Clavis Philologica Novi Testamenti of Christian A. Wahl. This work superseded his translation of Wahl’s work, becoming a standard authority in the United States. It was several times reprinted in Great Britain.
.Biblical Researches in Palestine and Adjacent Countries (three volumes, Boston and London, 1841; German edition, Halle, 1841; second edition, enlarged, 1856, published in both English and German)
.Greek Harmony of the Gospels (1845; second edition, 1851)
.English Harmony of the Gospels (1846)
.Memoir of Rev. William Robinson, with some Account of his Ancestors in this Country (printed privately, New York, 1859) This is a sketch of his father, who for 41 years was pastor of the Congregational church in Southington, Connecticut.
.Physical Geography of the Holy Land (New York and London, 1865). This is a supplement to his Biblical Researches, and was edited by Mrs. Robinson after his death.
.Revised editions of the Greek and English Harmonies, edited by Matthew B. Riddle, were published in 1885 and 1886 after Robinson’s death.
Robinson edited and translated:
.Philipp Karl Buttmann, Greek Grammar (1823; third edition, 1851)
.Georg Benedikt Winer,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1825), with Moses Stuart
.Christian Abraham Wahl, Clavis Philologica Novi Testamenti (1825)
.Wilhelm Gesenius, Hebrew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ncluding the Biblical Chaldee (1836; fifth edition, with corrections and additions, 1854)
He revised:
.Augustine Calmet, Dictionary of the Bible (Boston,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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