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
성서 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은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에 관한 삶과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거 성서를 근거로 해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윌리엄 올브라이트와 같은 학자들에게 성서 고고학은 말 그대로 성서의 텍스트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고고학 발전을 통해서 성서가 고고학적 증거와는 상반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는 성서학과 고고학계에서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고고학계에서는 근동 고고학 혹은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으로 용어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에릭 H. 클라인, 성서 고고학, 류광현 역, CLC, 2013].
그리고 최근 수십 년간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의 발전과 더불어 변화를 겪어왔다. 최근의 성서 고고학(근동 고고학)은 인지과정고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고학적 해석에 있어서 성서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논쟁이 학계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쇼셍크의 침입과 관련한 고고학적 자료의 연대결정, 블레셋의 단색토기와 2색토기에 관한 연대측정 등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상반된 의견을 보이는 쟁점이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조와 관련된 유물의 연대결정과 같은 문제는 텔아비브 학파(이스라엘 핑켈슈타인 등)와 미국의 고고학자들(윌리엄 데버와 로렌스 스태거 등)사이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논쟁이 지속되었다. 성서 고고학이 해결해야 할 앞으로의 과제는 비록 족장 시기 및 가나안 정복 이론이 성서학계와 고고학계에서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통일왕조와 분열왕국시대에 관한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가 어떤 식으로(통일왕조마저 회의적인 의견이 주류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모아지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에릭 H.클라인, 성서 고고학, 류광현 역, CLC, 2013].
○ 성서 고고학이란?
성경의 내용을 기초로 팔레스타인 및 서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종교 고고학의 한 분야. 팔레스타인이 중심이 되기에 팔레스타인 고고학이라고도 불린다. 기독교 유물의 진위여부와 유구와 유물에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밝혀내는것. 또한 이러한것을 토대로 성경에 나온 지리의 위치를 확정하는것이 주요 활동 내역이다.
과거 기독교에서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나, 현대에 와서는 과거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나 역사를 검증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분야의 최대 업적은 사해문서를 발견한 것이다. 사해문서로 인해 고대 팔레스타인에 대한 자료가 많이 발굴되었다.
– 성서고고학의 정의
성서고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현대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W.F.올브라이트는 이렇게 정의하였다. “성서고고학이란 고고학적 연구로 조명된 성서학이다.”
이 말은 성서고고학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탐구하는 성서 연구의 한 분야라는 말이다.
성서고고학의 이러한 학문적인 성격은 지금까지의 성서고고학자들이 거의가 다 성서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올브라이트의 제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성서고고학 교수였던 G.E.라이트도 같은 입장에서 성서고고학을 성의하였다. 즉, “성서고고학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고고학적 사실은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성서고고학은 성서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일반 고고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성서고고학이 성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지만, 목적은 성서의 기록들을 단순히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성서의 많은 기록들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증명’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고고학의 목적은 성서기록의 ‘증명’이라기보다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있다.
– 성서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기록된 역사는 진공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폭넓은 고대 근동세계의 역사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어 내려왔다. 즉, 고대 근동세계의 문화와 역사는 직접 간접으로 성서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고대 근동세계 전체는 성서고고학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성서고고학 연구의 초점이 되는 지역은 ‘성지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팔레스티나)은 성서에 기록된 역사가 전개되니 무대 및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고고학의 지리적 중심은 ‘성서고고학(Archaeology of the Holy Land 또는 Palestinian Archaeology)’이다.
○ 성서 고고학의 발생
성서 고고학의 발생은 기독교의 성경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바탕을 두고 실증사학의 길을 따르려고 하는 관점에서 유래하였다. 성서에 기록되어있는 모든 역사적 사실이 실제라는 생각에 탄생한 고고학의 한 분야이며, 이 분야를 전공하는 분들을 성서 고고학자라고 한다. 기독교 관련 신학자들의 필수 전공 학문이다.
초창기에는 홍해의 기적을 입증하려고 한다거나, 예수가 못박힌 골고다 언덕등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진짜로 밝혀진 사실도있고(베데스다 연못) 거짓으로 판명난것도 있다. 사실상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걸었던 고통의 길은 로마시대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종교를 통합하면서 지정했던 길 중 하나였고 예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과 같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현재 성서 고고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고고학적 유물들을 발견하면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진위여부를 밝히거나 새롭게 발견된 성서의 판본들을 해석하여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등의 일을 하며, 그에 따른 고대 팔레스타인의 문화나 역사등을 검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성서고고학의 발전 단계
성서고고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를 거쳐서 과학적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성서고고학 준비단계(1798 1890)
성서고고학의 출발은 고대 근동세계의 재발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체로 19세기 이전까지는 찬란했던 고대 근동세계의 문명은 땅속에 파묻혀 완전히 잊혀진 문명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서서히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대 근동세계의 문명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은 나폴레옹의 에집트 원정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에집트 원정의 장도에 오를 때 약 175명에 달하는 학자 예술가 과학자를 대동하였는데, 그들로 하여금 고대 에집트 문명의 유물과 유적을 면밀하게 조사 기록하게 하였다. 그 결과, 총24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에집트의 모습(Description de l’Egypte, 1809 – 28)’이 출판되어 유럽 지식인 사이에 선풍적인 화제가 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유럽 사람들은 처음으로 찬란한 고대 에집트 문명에 접하게 되었고, 고고학적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 책의 출간 후, 특히 다음의 4가지 발견과 연구는 고대 근동세계의 고고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1) 로제타 석비(Rosetta Stone)의 발견과 상형문자의 해독
나폴레옹의 에집트 원정 때, 한 프랑스 병사가 나일강이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델타 지역인 로제타(현재 라시드)에서 현무암 석비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로제타 석비이다. 위부분이 잘려진 이 석비는 3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는데, 맨 윗부분의 14줄은 고대 에집트의 필기체 문자의 일정인 데모틱(Demotic)체로 기록되었다. 밑부분의 54줄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 내용은 에집트왕 프톨레마이오스(B.C.203 181)의 업적을 기린 것으로, B.C.195년에 세운 것이다.
1822년 프랑스의 천재적인 학자J.F.샹폴리옹(1790 1832)이 14년 동안의 연구 끝에 마침내 이 석비에 기록된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형문자의 해독은 고대 에집트 문명의 신비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2) 베히스툰(Behistum) 암벽의 기록과 쐐기문자의 해독
1835년 영국군 장교 H.롤린슨이 이란 베히스툰 지역에서 깎아지른 듯한 100m 높이의 암벽에 새겨진 고대 기록을 발견하였다. 그는 목숨을 내걸고, 암벽에 매달려 일부를 탁본하고 필사하는 데 성고하였다. 이 기록은 3가지 종류의 고대어, 즉 고대 페르샤어,아람어,바빌론어로 쓴 것으로서, 사용한 문자는 모두 쐐기문자(설형문자)였다. 롤린슨은 이 쐐기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했고, 또 독일인 G.그로테펜트및 아일랜드의 신부 E.힝크스 등의 연구 결과, 1850년대에 마침내 이 쐐기문자를 해독하는 개가를 올렸다. 쐐기문자의 해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인 아시리아와 바빌론 제국의 문명 연구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3)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발굴과 토판문서의 발견
1850년대초, 영국인 A.H.레이야드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발굴 하였다. 니느웨성은 고대 근동세계를 제패했던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답게 성의 둘레가 13K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여기에서 레이야드는 산헤립왕(B.C.704 681) 의 궁전과 업적을 기록한 산헤립왕 업적비를 발견하였다. 또 1852 54년에는 H.라삼도 아슈르바니팔 대왕(B.C.668 627)의 거대한 왕궁과 방대한 규모의 왕실도서관을 발굴하였다. 아슈르바니팔 대왕이 세운 왕실도서관에서 발굴된 수많은 토판 문서들은,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그 후 1872~73년 G.스미스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니느웨 발굴의 토판문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바빌론의 홍수설화(길가메시 서사시) 기록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이 발견은 당시 영구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몇 년 후인 1875년 스미스는 또 바빌론 지역의 창조신화 실화 기록을 발견하였다. 영국 사람들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고, 런던의 일간지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바빌론의 홍수설화 기록의 나머지 부분이 토판문서를 발굴하기 위해서 스미스를 니느웨로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미스는 니느웨에 가서 그것을 기적적으로 찾아냈다.
이러한 일련의 발견과 연구 결과는 고대 근동문화에 대한 관심과 고고학적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1865년 영국에서는 팔레스티나 발굴기금(Palestine Exploration Fund)이라는 연구단체가 발족되어, 최초로 팔레스티나 지역이 지도를 만드는 등 성지 고고학 발전에 대단히 크게 공헌하였다.
2) 제1단계(1890~1914)
성지 이스라엘에서 과학적 방법으로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1890년의 일이다. 이 해에 영국의 고고학자 F.페트리(1853~1942)가 에글론(현재의 텔엘 헤시)을 발굴하였다. 페트리는 이 역사적 발굴에서 다음 2가지 공헌을 하였는데, 이는 과학적 학문으로서 성서고고학의 기초가 되었다.
첫째는 텔의 발견이었다. 페트리 이전에는 텔 (히브리어로는 Tel, 아랍어로는 Tell이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텔이란 고대 사람들이 한 지역에 오래 살게 됨으로써 지반이 점차 높아져서 형성된 ‘언덕’을 말한다. 즉, 고대에 한 주거지역이 전쟁이 나 화재로 파괴되고, 다시 재건되는 과정에서 주거층 (stratum)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는 사이에 지반이 높아져서 자연히 텔이 형성된 것이다.
페트리는 에글론 발굴에서 가가 주거층을 한꺼풀씩 벗겨 나가는 식으로 발굴하는 주거층별 발굴방법(stratification)을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고고학 발굴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
페트리의 추거층별 발굴방법은 미국 학자 G.라이스너와 C.피셔에 의해서 더욱 정밀하게 발전되었다.
둘째로, 페트리는 각 주거지층에서 출토된 토기 (pottery)로써 그 주거지층의 연대를 측정하는 토기 연대측정법(potter chronology)을 발전시켰다. 토기는 잘 깨지는 값싼 것이었으므로, 고대 사람들은 줄곧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토기는 어떤 주거지층에서나 풍부하게 발굴된다. 그런데, 페트리는 각 시대마다 독특한 모양 빛깔 무늬의 토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토기를 시대별로 체계화함으로써 토기가 발굴된 주거지층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페트리가 개척한 토기 연대측정법은 올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서 고도로 정밀화되었다. 또한 이 기간에 일어난 중요한 일은 1900년 예루살렘에 미국 학자들이 성지고고학 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를 설립한 것이다. 이 연구기관은 오늘날까지 성시고고학 연구와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3) 제2단계(1918 – 48)
이 기간은 제1차세계대전 종결로부터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로, 성서고고학의 ‘황금새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기간은 대표적 고고학자는 올브라이트이다. 그는 드빌(Debir, 현재의 텔베이트 미르심) 발굴에서 토기 연대측정법을 정밀하게 체계화하였다. 그는 위대한 고고학자일 뿐아니라 많은 고고학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영국 고고학자 휠러와 휠러-케년 발굴법을 고안하였다.
이 기간에 일어난 획기적인 사건은 사해 두루마리의 발굴이었다.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는 구약성서 원문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4) 제3단계(1948 70)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후, 성지고고학의 주도권은 이스라엘 학자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자기 나라를 발굴한다는 유리한 입장에서 활발하게 고고학 연구를 추진해서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Y.야딘의 마사다와 하솔의 발굴은 이스라엘 고고학계의 대가로서의 위치를 확인 시켰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성지고고학 연구는 이스라엘 학자들만이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케년은 예리고가 B.C.7000년부터 이미 성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였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따라서 예리고는 역사상 최고의 성곽도시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 라이트의 세겜 발굴과, 드 보의 쿰란 발굴은 모두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업적들이다.
5) 제4단계(1970년 이후)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성서고고학계에는 신고고학(New Archaeology)이 일어났다. 이 신고고학은 방법론적으로 여러 학문이 연계되어 공동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즉, 신고고학은 지질학자,토양학자,뼈 전문가,인류학자,생태학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팀을 이루어서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신고고학에서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경험세계 전체, 즉 환경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문화현상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성서고고학의 시작
– 성서를 따라 탐사하다
1838년,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 당시 하버드대학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엔도버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에드워드 로빈슨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역사적 장소의 위치를 찾아내어 성경을 비판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185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탐사했다.
성서에 들어 있는 지리학 정보를 활용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현재 아랍 지명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로빈슨은 과거에 잊힌 성서의 지명들을 고대의 언덕 수십 개소에서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로빈슨과 그의 후계자들은 성서 속의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비교 분석하면서 예루살렘, 헤브론, 얍바, 벧스안, 므깃도, 하솔, 라기스 등 수십 개의 성경의 지명들을 확인해 나갔다. 19세기 말 영국의 ‘왕립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은 고도로 체계적인 방법에 따라서 지명 확인 작업을 추진하여 북쪽 요르단 강의 여러 발원지에서부터 남쪽의 네게브에 있는 브엘세바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전역의 세밀한 지형 지도를 작성했다. 이러한 지도를 바탕으로 자연환경과 지형 조건이 성경 기록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 고고학의 발굴과 발견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의 표준적인 연대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노력은 성서 본문에 바탕을 두었으며 성경 속에 기록된 인물의 연대를 확인하는 데에는 성서 이외의 자료도 필요했다.
18세기 말 유럽 학자들은 놀라운 기념 건축물과 귀중한 상형문자 명문이 방대하게 보존되어 있던 이집트를 집중적으로 탐사해서 기원전 1207년에 파라오 메르넵타가 세운 승전 기념비를 발굴했다. 이 비문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민족에게 거둔 대규모 승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성서가 아닌 외부 자료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한 최초의 자료다. 그보다 조금 후대의 파라오인 시삭(왕상 14:25)은 22왕조의 셰숑크 1세로 확인되었으며 그는 예루살렘에 처들어와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원전 945년부터 924년까지 왕위에 머물렀으며 카르낙에 있는 아문 신전 벽에 이 원정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184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를 시작으로 나중에 미국과 독일이 가세한 학술발굴단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와 궁전, 설형문자 등을 발굴해 냈다. 이 제국들의 미술가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 시대의 전쟁과 정치적 사건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리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왕들인 오므리, 아합, 예후와 남유다의 히스기야, 므낫세 왕이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서판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서 이외의 자료를 통해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를 더욱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과 주위 여러 나라의 통치 시대를 비교 분석한 결과 대단히 정확한 통치 연대가 작성되었다.
고대 요르단 왕국의 땅에서 19세기에 발견된 모압 왕 ‘메사의 승전비문’은 메사가 이스라엘 군대에 거둔 승리를 언급하고 있으며 열왕기하 3장 4~27절까지 기록된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전쟁에 관한 성서 외적인 중요한 증언이 되었다.
– 올브라이트와 성서고고학
20세기 초반 20여 년 동안은 고고학의 황금 시기라 할 수 있다. 미국, 영국, 독일인들이 각각 팀을 만들어 사마리아, 게젤, 므깃도 등을 조사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
미국인 학자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가 20세기 초에 개척한 성서고고학은 대형 언덕(텔, tell)의 발굴에 주력했다. ‘성서고고학’이라는 낱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32년에 버지니아 대학에서였다.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올브라이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분석가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자입니다. 유럽 학자들의 비판적인 시각과는 달리 그는 성서와 고고학 자료들을 연결함으로써 성서를 더욱 역사적인 문서로 확증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조지 어니스트 라이트가 뒤이어 고고학을 발전시켜 1955~70년대에 성서고고학의 전성기를 만든다. 올브라이트-라이트-브라이트로 이어지는 올브라이트 학파는 고고학을 성서학의 일부로 인식하여 성서 본문과 고대 근동학의 모든 측면을 연결했으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그 둘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자 많은 고고학자의 시각에 변화가 생깁니다. 심지어 올브라이트의 제자들까지도 스승의 학설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올브라이트와 같은 일군의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열심에 치중한 나머지 고고학 결과물을 편협하고 배타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교한 고고학 접근 방법을 갖추지 못하였고 성경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발굴 조사의 결과 보고서가 빈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발굴과 조사가 더 진행되면서 고고학은 이스라엘 및 근동 전체에서 밝혀진 사실과 성서에 기록된 세계 사이에 물질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는 성경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고고학 조사 방법의 발달과 함께 발굴과 조사가 진행되면서 고고학적인 발견과 성경의 기록 사이에 어긋나는 점이 더더욱 많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성서 본문을 중심으로 성서 속의 역사, 사건, 인물 등을 고고학의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문으로서의 ‘성서고고학’이라는 말 자체가 논란이 있게 된다. 과거에는 성서를 ‘기준’으로 여러 고고학 유물과 자료를 ‘해석’해 왔지만, 이제는 더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서 자체가 고고학 증거와 여러 면에서 상충할 뿐만 아니라 성서 속의 사건들이 주변 나라들의 정치·경제 역학 관계와 맞물려서 벌어진 일이기에 단독으로 ‘오직 성서’만 고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Archaeology of Syro-Palestine)이라고 지칭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 또한 지리적 범위가 성서의 지역들을 모두 포괄할 수 없으므로 미국의 고고학계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근동고고학(Near Eastern Archaeo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성서 고고학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고고학으로 지칭하려고 한다.
또 한 가지 물음은 고고학이 과연 어느 학문 영역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고고학은 사회과학의 틀 안에 있는 인류학과 연결이 된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 및 고대 근동에 관심이 있는 고고학은 문학적·언어학적 연구와 밀접해지면서 인문학의 한 분야에 놓이게 되며 고고학의 발굴과 해석은 자연과학의 응용법이 필요하다. 현대에는 생태학적인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대인은(현대인과 마찬가지로) 군사·정치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생태계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고고학은 여러 학문을 종합하여 고대의 지표, 지리, 인구와 경제, 사회, 정치 구조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 성서와 고고학
성서 비평가들은 성서를 계속 해부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초기에 고고학자들은 성서의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했다. 그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팔레스타인 지역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독립적인 자료로 사용하지 않고 성서 기록에 계속 의존해서, 성서를 기준으로 고고학 자료를 해석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새로운 사조가 성서고고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결국 유물과 성서 원본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게 된다. 성서의 땅에서 탐사 활동을 벌인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유물을 성서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포기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인 방법을 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서 원본의 배경이 된 고대의 생활을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고대 유적지를 발굴할 때 대상 유적지의 성경 관련 부분에만 역점을 두었던 관행은 사라졌다. 각종 동물의 뼈와 곡물의 씨앗, 토양 견본의 화학적인 분석, 세계의 수많은 문화에서 도출된 각종 장기적인 인류학적인 모델은 물론 발굴된 유물과 건축 및 정착 유형 등이 더욱 폭넓은 경제 변화, 정치 역사, 종교와 풍속, 인구 밀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다. 이제 성서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고고학자, 인류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협력 속에서 성서 속의 삶과 신앙과 이야기들이 더욱 밝히 드러나게 된다.
고고학의 잇점은 다음과 같다.
.고고학은 성서 사건들의 일반적인 배경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의 민족들과 장소들을 광범위하게 복원해 준다.
.고고학은 성서의 이야기들이 제공해 주지 않는 사건들의 구체적인 시공간적, 문화적 배경을 제공해 준다.
.유물들을 보완해 줄 물질문화의 풍부한 유물들을 제공해 준다. 성서 본문들로는 복원할 수 없는 성서 시대의 일상생활을 조명해 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경제적 조건들, 종교와 철학, 예술과 문화, 기술, 통상, 국제 관계의 폭넓은 문화적 배경을 알려 준다.
.고고학은 성서 본문이 기술하는 공인된 종교와 대조를 이루는 민간 종교의 풍습들을 밝히는 데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는 문서를 기록한 상류 엘리트의 관점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의 종교 생활을 보여 준다.
.고고학 기록은 최소한 현대의 해석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편집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서 성서 본문보다 더 객관적이다.
.고고학 자료들은 이미 모든 성서 본문들을 합쳐 놓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이다.
.올브라이트가 오래전에 관측했듯이, 성서를 그 원래의 배경 속에 놓아두게 되면 성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더 믿을 만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서는 더 인간적이고 덜 신(神)적인 듯이 보이겠지만, 그것이 신앙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서 본문과 고고학 유물에 대한 해석은 신앙의 문제(곧, 지식의 문제임과 아울러 직감과 공감의 문제)이다.
.성서학의 앞날은 본문 비평 연구와 더불어 고고학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단점도 있다.
.비교적 ‘객관적’인 학문이기는 하지만 해석에는 고고학자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다.
.고고학 기록에서 민족성을 구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예를 들면, 도기나 건축물을 통해 블레셋과 이스라엘을 어떻게 비교 분석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고고학의 계속된 발굴과 조사를 통한 새로운 발견에 따른 새로운 결론의 재형성.
.고고학은 사회사, 경제사의 분석은 비교적 수월하지만, 정치사를 다루기는 어렵다.
.50년 정도의 짧은 시기를 구분하거나 사건을 파헤치기는 어렵다.
고고학은 성서의 배경이 된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출애굽, 가나안 정복, 다윗과 솔로몬, 요시야, 포로기 이야기 등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데 탁월한 공헌을 한다. 성서와 고고학의 협력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훼를 향한 그들의 신앙을 더 실제로 이해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일차적인 자료는 ‘성서’입니다. 고고학의 사용에서 신앙과 비평학을 탁월하게 조화시킨 프랑스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롤랑 드보(Pere Roland de Vaux)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본문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역사를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본문들은 문학비평, 전승비평, 역사비평의 방법론들에 의해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고학은 있는 무엇이 본래의 모습인지와 관련하여 본문을 확정해 주지는 못한다. 단지 우리가 본문에 부여하는 해석을 확증해 줄 수 있을 뿐이다.”
○ 성서고고학 학자들
– 최대주의자와 최소주의자
고고학과 관련하여 성서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겠다. 성서를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다양하겠으나 간략하게 다섯 개 정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서의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성서 외적인 증거들은 무시한다.
둘째, 성서의 본문을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이고 성서 외적인 증거들도 약간 고려한다.
셋째, 성서의 본문만큼 외적인 자료들도 선입견 없이 접근한다.
넷째, 외적인 자료들에 의해 증명되지 않으면 성서의 본문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섯째, 성서 본문과 거기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 고대 근동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성서의 역사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을 최대주의자(Maximalist)라고 부른다. 성서를 신뢰할 만한 1차 자료로 보고 그 밖의 자료는 성서에 대조하여 참조할 뿐이다. 이들에게는 구약성서의 역사성이 필수 사항이 되기에 출애굽, 가나안 땅 정복, 다윗 왕조 등의 사건이 성서의 서술과 ‘같은 방법으로 실제로’ 일어났는지가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는 달리 성서를 후대의 작품으로 보고 성서의 역사성을 조금만 인정하는 계열의 학자들을 최소주의자(Minimalist)라고 하는데 이들은 고고학 등과 같은 성서 바깥 자료를 1차 자료로 본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올브라이트 학파 계열을 최대주의자, 알트와 노트 계열의 학자들을 최소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어느 견해나 의견을 ‘~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몇 가지 의견이 같다고 한 무더기로 묶어버리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 독일 학자
알브레히트 알트(Alt)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정착)에 관해 쓴 1925년 논문에서 평화적 정착 모델 혹은 내부적 유입 모델을 제안했다. 여호수아서에서 묘사한 것처럼 짧은 기간의 정복 전쟁에 의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롭게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는 주장이다.
알트의 수제자인 마틴 노트(Noth)는 1930년대에 사사 시대(기드온, 삼손 이야기가 나오는 사사기의 배경) 동안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델을 발전시켰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12부족 연맹에 대한 성서 기사를 ‘암픽티오니’라고 부르는 후대의 그리스 부족 연맹과 관련하여 해석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가나안의 세겜에서 모인 계약회의(여호수아 24장)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스라엘은 공동선을 위해서 느슨하게 묶인 ‘성스러운 연합체’로, 중앙 성소에서 정기적인 언약-갱신 의식을 집행하면서 유지해 갔다는 주장이다.
맨프레드 바이페르트(Weippert)는 꼼꼼하게 고고학적인 근거를 조사해서 알트와 노트의 이론을 옹호하였으며,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민이었다고 결론내린다(오늘날, 초기 이스라엘의 기원이 농경민인지 유목민인지 하는 문제는 첨예한 논쟁거리다).
– 미국 학자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Albright)는 ‘올브라이트 학파’를 이루었으며, 그는 19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성서고고학’을 주도했다. 올브라이트는 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야기,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등의 기사들을 ‘전반적으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제자 G. 라이트(Wright)는 1950~70년대에 한창이었던 ‘성서 신학’ 운동과 짝을 이루어서 성서 고고학을 발전시켰다. 라이트의 뒤를 이어 존 브라이트(Bright)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존 브라이트의 ‘이스라엘의 역사’ 제4판을 편집한 브라이트의 제자 윌리엄 브라운은 스승인 브라이트의 보수적인 주장을 대부분 뒤집어 버린다. 그만큼 시대가 바뀌었다는 거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전혀 다른 방향의 학자들이 등장한다. 인류학과 사회과학적인 방법으로 무장한 노만 갓월드(Gottwald)는 초기 이스라엘의 기원을 가나안 정복 전쟁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에서 일어난 일종의 ‘농민 혁명’을 원인으로 보았다. 도시국가의 착취, 불평등, 노예제도 등의 불합리성이 농민들로 하여금 기존 체제를 거부하게 했다는 다분히 유물론적인 주장이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정했다.
체이니(Chaney), 할펀(Halpern), 쿠트(Coote) 등의 학자들은 성서가 묘사하는 단기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부정하며, 대체로 초기 이스라엘 민족이 원래 가나안 민족 또는 이주민들과의 혼합민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서의 역사성을 대부분 부정하는 학자들에 맞서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저명한 고고학자로 윌리엄 데버(Dever)를 들 수 있다. 성서의 각종 사건들에 관한 고고학 증거는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의 저자인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같은 학자들과 날카롭게 대립하는 데버는 성서의 역사성을 찾는 데 노력한다.
– 이스라엘 학자
고인이 된 벤자민 마자르(Benjamin Mazar)는 현대 이스라엘 성서 역사 연구에 있어서 1인자로, 한마디로 그는 이스라엘의 올브라이트였다. 마자르는 초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정을 거쳤으며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걸려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또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헷, 히위, 여부스 족속과 같은 서로 다른 인종의 혼합체라고 본다.
이가엘 야딘(Yadin)은 마자르의 제자로서, 사해문서를 발굴하고 편집하는 데 참여했고 하솔을 발굴했다. 또한 마사다 요새와 바르 코흐바 반란 때의 편지, 그리고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 문을 발굴하는 등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에서 고고학 발굴에 참여했다. 그는 초기 이스라엘이 반(半) 유목민으로서 성서가 묘사하는 것처럼 수많은 가나안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정복했다고 결론 내린다.
요하난 아하로니(Aharoni)는 마자르의 또 다른 제자로, 기본적으로 아하로니는 전반적인 침투 과정을 옹호한다는 측면에서는 알트의 노선을 따른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 곳에 머물러 살던 이스라엘인들이 요단강의 양편에 있던 산간 지대의 여러 장소들을 파괴하였다고 보았다. 과거 20년 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중요한 고고학적인 탐사들은 주로 아하로니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는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의 고고학자다. 그는 초기 이스라엘이 여러 면에서(집터 분포와 위치, 토기류의 성분, 경제 사회적 구조와 같은 부분) 가나안 문화와 다른 점이 있다고 본다. 또한 다윗과 솔로몬의 왕조가 비록 성서에서 묘사하는 것만큼의 웅장한 규모는 아닐지라도, 핑컬스타인이 주장하는 촌락 정도로 작은 규모는 아니었으며 강력한 통치력이 뒷받침하는 도시 규모였다고 주장한다.
○ 성서고고학과 성서 연구
오늘날 성서고고학의 연구 결과는 성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성서고고학은 성서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증’해 주는 경우도 있고, 성서의 기록을 ‘보충’해 주는 경우도 있다. 이 중에서 구약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경우를 소개한다.
1) 바니 하산의 벽화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사악,야곱,요셉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오늘날 우리들은 그들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에집트 카이로의 남방 250km 지점에 있는 바니 하산에서 발견된 벽화이다. 이 벽화의 연대는 B.C.1900년경으로, 이스라엘 조상들의 연대와 매우 비슷하다.
내용은, 37명의 가나안 사람들이 눈화장을 즐겨하는 고대 에집트 여자들에게 ‘눈화장품’을 팔기 위해서 에집트로 옮아 가는 장면이다.
선두에는 검은 피부의 에집트인이 이들을 인도하고 있는데,찬란한 채색옷을 입고 있으며(창세 37:3의 요셉의 ‘장신구를 단 옷’을 연상시킨다), 나귀는 물건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고학적으로 B.C.1900년경에는 아직 말과 낙타의 사용은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남자는 모두 수염을 기르고 활 창 도끼와 같은 무기를 들고, 신발은 샌들을 신고 있다. 여자들은 모두 독특한 머리형을 하고 있으며,남자와 다른 신발을 신고 있다. 또한, 물 담는 가죽 부대 악기 가축(염소와 산양) 등도 보인다.
이러한 바니 하산의 벽화를 통해서 거의 같은 시대에 속하였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모습과 생활 형태를 추정할 수가 있다.
2) 마르닙타왕의 전승기념비
1896년 에집트의 테베(Thebes)에서 마르닙타왕(Marniptah;Merneptah, B.C.1224 11)의 전승기념비가 발견되었다. 이 전승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스라엘은 황무하게 되었다. 그의 후손은 멸절되었다.”
구약 외에서 이스라엘이 언급된 최초이 기록인 이 기념비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 예루살렘의 수구
예루살렘은 천연적 요새지로 난공불락의 도성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땅에 정착생활을 한 이후에도 200년 이상 예루살렘만은 정복하지 못한 채, 가나안 원주민 여부스족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자 곧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였다.
그러면,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어떻게 정복하였을까? 구약이 기록을 보면 다윗왕은 부하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수구를 타고 올라가서 그 성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였다(삼하 5:8).
예루살렘의 수구의 발견은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영국인 C.워런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국의 팔레스티나 발굴기금은 1867년 영국군 장교 워런을 성지로 파견하였다. 워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탐색작업을하던 중 놀랄 만한 발견을 하였다. 히즈키야 터널(Hezekiah Tunnel)을 탐사하던 중에 암벽을 뚫어서 만든 지름 2m 정도의 원통형으로 된 수직 터널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하로 뚫은 이 수직 터널은 통해서 기혼샘으로부터 물을 긷던 장치였다.
기혼샘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이었다. 그러나, 기혼샘이 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적에게 성이 포위당했을 경우에는 물을 길으러 밖으로 나올 수 없었으므로, 주민들은 성 안에서 지하 터널을 파서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물을 길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수구인데, 다윗왕의 부하들은 이 수구를 타고 올라가서 기습작전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수구를 발견한 사람을 기념해서 워런 수구(Warren Shaft)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지하 터널을 파서 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하 터널을 통해서 성 밖의 샘물을 얻는 방법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하솔, 게젤, 므깃도, 기브온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4) 히즈키야 터널
B.C 701년경 유다의 왕 히즈키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려고 할 때, 급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기혼 샘으로부터 지하터널을 파서 기혼샘의 물을 예루살렘의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2열왕 20:20; 2역대 32:30).
이것을 히즈키야 터널 또는 실로암 터널이라고 부른다. 이 터널은 총 길이 535m로 완전한 암석지대를 파서 만든 터널이다. 기혼샘의 위치는 해발 636m이며, 이 물이 예루살렘성 안으로 흘러들어 생겨난 실로암못의 높이는 해발 634m 이다. 즉, 2m의 고저차를 535m의 지하터널을 통해서 기혼샘에서 발원한 물이 완만하게 흐르도록 만든 것이다.
이 터널을 만든 과정은 1880년 실로암못 근처의 돌벽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서 밝혀졌는데, ‘실로암 기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굴이 뚫린 과정은 아래와 같다. 양편에서 중심부로 향해 파 나가다가 중간 지점에 거의 도달해서 3자쯤 남았을 때, 우리들은 반대쪽으로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굴이 마주 만났을 때, 사람들은 돌을 깎아 나갔고, 돌 깎는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혔다. 그리고, 샘(기혼샘)으로부터 물은 저수지(실로암)로 1,200자 거리를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히즈키야 터널에 관해서는 아직도 남아 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이 터널이 직선이 아니고, 대략 S자형의 곡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곡선으로 된 터널을 중간지점을 향해서 양편에서 파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중간 지점에서 만났을 때 양편의 고저의 차는 불과 30cm 미만의 오차가 있었을 뿐이다. 왜 직선으로 파지 않고 복잡하게 곡선으로 만들었을까? 그 이유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 의하면, 근처에 있던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5) 히즈키야 성벽
히즈키야왕은 터널을 파서 예루살렘의 급수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성벽을 새로 쌓아 방위를 견고히 하기도 하였다.
히즈키야왕이 쌓은 성벽은 1970년대에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N.아바가드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폭이 7m나 되는 철통 같은 성벽이었는데, 흥미 있는 사실은 기존의 가옥을 허물고 민가 지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굴로 히즈키야왕이 ‘가옥을 헐어 성벽을 세웠다’는 <이사야서> 22장의 말씀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6) 기브온의 못
예루살렘에서 약 13km 북서쪽에 있는 기브온에 큰 못이 있었다. 이 못가에서 다윗의 장군 요압과 이스보셋(사울왕의 아들)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접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 못은 1956 57년 J.프리처드를 단장으로 한 미국팀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지름 11m, 깊이 25m의 원형으로 파졌다. 그런데 발굴 결과,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지하 부분에 있는 샘물 부분에 도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통로임이 판명되었다. 층계를 내려가서 밑바닥 부분에 이르면, 더 밑으로 내려가는 작은 입구가 있고, 입구를 통과하여 내려가면 암반을 파서 만든 경사진 터널을 만난다.
79개의 계단을 밟고 이 지하 터널을 내려가면, 지하 25m 위치에 맑은 샘물이 괸 지점에 도달한다. 이 못도 예루살렘의 수구와 마찬가지 기능을 했던 것으로,기브온 성 안에서 지하통로를 통해서 물을 긷기 위해 만든 것이다.
7) 모압 기념비
1868년 모압 지방(현재의 요르단)의 디본에서 검은 돌에 34행으로 기록된 기념비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기념비는 모압 왕 메서(B.C 830년경)가 자기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내용 중에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이 모압 지방을 정복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구약에 기록된 오므라왕의 업적에는 그러한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왕상 16:23-27). 모압 기념비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은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정치적 업적을 많이 남긴 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8) 아시라아 왕 샬마네셀 업적비
1846년 영국인 H.레이드가 아시라아 제국의 중심지의 하나였던 갈라(Calah)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념비를 발굴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샬마네셀 3세(B.C 859~825)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독특한 모양의 검은 돌에 기록되어 있다.
이 업적비의 특이한 형태 때문에 샬마네셀의 오벨리스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예후왕(B.C 842 ~ 815)이 아시리아 제국을 방문하여, 샬마네셀왕 앞에 무릎을 끊고 엎드려 조공을 바치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예후왕의 모습은 이스라엘 왕 중에 그 모습이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이스라엘에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 말씀에 근거해서 왕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음). 그런데 이 샬마네셀왕의 업적비에는 예후왕이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쓰여 있다. 오므리 왕조를 혁명으로 거꾸러뜨리고 왕이 된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부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해서 오므리왕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 산헤립왕 업적비
B.C 701년 유다의 히즈키야왕 때 아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왕은 유다왕국을 침략하여 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아시리아 군대에게 공격을 당한 예루살렘의 운명은 백척간두의 상황이었다(왕하 18-19장). 이때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였다(이사야 36-37장). 그러나 히즈키야왕은 금 30달란트(1달란트는 약 34kg), 은 300달란트를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으로 바치고 굴복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1850년대초 H.레이야드가 니느웨성의 산헤립왕 궁전에서 발굴한 기념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히즈키야에 대해서 말하면, 그 유다인은 내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산헤립왕)는 유다의 46개의 견고한 성읍들과 작은 마을들을 함락시켰다. 나는 20만 150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고, 말,귀,낙타,소,양을 빼았았다. 그는 (히즈키야) 그의 왕궁이 있는 성, 예루살렘에 새장의 새처럼 갖혀 있었다. 나는 포위하여 아무도 그 성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히즈키야는 나의 위엄에 기가 질렸다. 그가 예루살렘을 수비하려고 모은 장병들은 우리와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그는 내게 금 30 달란트, 은 800 달란트, 붉은빛이 나는 석재, 상아로 장식한 침상과 의자, 또 그의 딸들과 궁전의 여자들 및 노래하는 념녀자, 또 그의 딸들과 궁전의 여자들 및 노래하는 남녀를 대신을 시켜 조공품으로 니느웨로 보내고 내게 굴복하였다.”
10) 라기스의 오스트라카
오스트라카(단수는 오스트라콘)란 깨진 토기 조각에 글시를 써 기록한 것을 말한다. 라기스는 유다 왕국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그런데 1935년 라기스의 발굴에서 불탄 성문 옆 잿더미 부분에서 21개의 오스트라카를 발굴하였다. 그 연대는 B.C 588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라기스를 불지르기 직전이었다. 그 내용은 라기스 근청의 경비초소의 책임을 맡은 호사야가 라기스의 주둔군 사령관 야오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거기에 보면, 당시 유다 왕국의 군사령관 고니야가 에집트에 내려갔다는 구절이 있다. 바빌론 군대가 침공한 위급한 상황에서 유다의 군사령관이 에집트를 방문했다는 것은 에집트에 군사원조를 구하기 위해서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에제 17:15 비교).
또 다른 오스트라콘에는, “우리들은 라기스의 신호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세가의 신호는 이제 끊어졌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은 진군하는 바빌론 군대의 말발굽 아래 유다의 도시들이 하나식 함락당하는 모양을 잘 나타내고 있다.
11) 바빌론 제국 역대기
열왕기하 24장의 기록을 보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B.C 597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여호야긴왕을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그 대신 시드키야를 왕으로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바빌론에서 발굴된 ‘바빌론 제국 역대기’에 보면, 열왕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B.C 605년 느부갓네살이 바빌론 왕으로 등극하고, B.C.597년 유다 왕국을 정복하여 시드키야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역사적 기록의 정확성이 고대 근동의 다른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2) 여호야긴왕의 포로생활
열왕기의 기록은 B.C 597년 바빌론에 잡혀간 여호야긴왕의 포로생활의 기록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여호야긴왕)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생계를 잇게 하기 위하여 왕(바빌론 왕)은 그에게 매일 음식을 제공하였다”(왕하 25:30). 이 말은 여호야긴왕이 바빌론 왕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고학자 R.콜데위는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바빌론을 발굴 하였고, 그는 이 발굴작업에서 바빌론 제국 왕실문서 보관소를 찾아냈다. 거기에서 많은 토판문서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잡아온 왕족 귀족 들에게 기름과 보리를 나누어 준 기록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식량배급 명단에는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다서 아들에게 물자를 배급해 준 기록도 들어 있다. 이러한 바빌론의 기록은 포로생활을 한 여호야긴왕의 상황을 실감나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성서고고학의 현황과 전망
성서고고학은 약 100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 동안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성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에는 20군데 이상의 장소에서 발굴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여기에 전세계로부터 모여든 자원 발굴자들이 참여함으로써 고고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땅에는 적어도 6,000이상의 장소에서 고고학적 예비조사가 이루어져서 발굴 가치가 있음이 밝혀졌는데, 그 중에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곳은 약 200개소(약 3%) 정도이다. 200개소의 발굴지 중에서도 대규모의 발굴작업이 진행된 곳은 불과 30군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0.5%). 이러한 상황을 P. 랩은, “성지 고고학은 이제 유아기 단계(infancy)는 넘어섰으나, 아직 유년기(childhood)는 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고고학 연구가 이루어진 성지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에도 앞으로 연구되어야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두말한 나위 없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성서고고학이 연구해야 할 분야가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