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성탄절 메세지 돌아보기
왕의 왕! 주의 주! (King of kings, Lord of lords, 마태복음서 2:1–12)
시대와 지역과 역사를 초월하는 크리스마스의 영원한 메시지는 생명과 구원, 용서와 사랑, 평화와 화해, 섬김과 겸손, 희망과 약속, 그리고 나눔과 베품입니다. 우주적 구원과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심으로 그 분의 나심을 경축하는 여러분 모두 위에 평화, 희망,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히 채워 주시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촌 곳곳과 모든 자연계와 우주 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평강, 화해와 상생의 은총이 넘쳐나시길 빕니다. 더 나아가 이런 하늘의 영광과 땅위의 평화가, 핵의 공포 아래서 살고 있는 사람들, 죽고 죽이는 전쟁과 살륙의 땅, 가난한 이들, 힘없는 사람들, 압제받는 이들, 나라를 잃고 바다를 떠도는 난민들, 차별받는 소수자들과 사회적 약자들, 정치적 폭력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우리들 주변에서 가까이 보는 Homeless들, 호주의 원주민들과 우리 이민자들, 깨어진 가정들,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성적 착취에 시달리는 여성들, 늙고 병드신 어른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 그 이름 조차도 불러주지 않는 잊혀진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과 희망의 약속으로 다가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와 같은 성탄의 축복과 더불어 오늘은 크리스마스와 연관해서 우리가 좀 더 분명하고 옳바로 알았으면 싶은 것들부터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이 꼭 12월 25일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 생년월일이 1944년 11월 13일인 것처럼 예수님의 호적등본에는 생년월일이 기원 1년 12월 25일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제일 먼저 쓰여졌다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부터 성서의 초기 문서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생일은 물론이고 그의 탄생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사도의 13개나 되는 서신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이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날은 없고 부활절만 있어도 예수님은 충분히 인류의 구세주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강조하고 동정녀 탄생을 마치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교리인양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마치 동산 위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가리키면서 ‘야 저기 저 달 좀 봐!’라고 외쳤는데 가리키는 달은 쳐다보지 않고 가르키는 사람의 손가락 끝만 바라보면서 ‘어디? 달이 어딧어?’ 라고 말하는 얼간이 같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핵심은 놓쳐버리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여러 개로 갈라놓고 교회로 하여금 세상과 멀어지도록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지 마리아와 말구유의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서 중에서도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서나 교회가 자리를 잡은 후 종합적 판단 위에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요한복음서에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사신 날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말구유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바울과 마가와 요한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없어도 그는 넉넉히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빼면 기독교가 존립할 수 없지만 크리스마스 스토리쯤은 없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성탄절 없이 오직 주님의 수난절과 부활절만 경축하면서도 3백여년을 넉근히 지내왔습니다. 적어도 AD 4세기가 되기까지 성탄절은 언젠지도 몰랐고 중요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역사를 추적해 보면 지금 우리들이 지키는 크리스마스는 AD 354년 교황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일’이라고 선포함으로 시작이 되었고 로마제국은 그 날을 민족적 축일로 토착화함으로 자리가 굳어졌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내부적 사정이 있었습니다. AD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거의 3백여년이나 계속되던 기독교에 대한 온갖 핍박에 종지부를 찍고 기독교를 승인하고 로마의 국교로 선포를 했습니다. 이제 로마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의 전폭적 지원 아래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된 기독교에서는 로마의 황제에게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무엇으로 보답을 할까? 교회는 고심 끝에 한 30여년이 지나자 로마제국, 혹은 로마문화와 보조를 맞추어서 당시 로마인들이 태양숭배일로 지켜오던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선포해 주었습니다. 원래부터 로마는 1년 중 해가 제일 짧은 12월 25일을 동짓날이라고 여겼고 이 동지가 지나면서 부터는 점점 해가 길어지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가고 태양이 힘을 발휘하는 시간이 온다고 해서 이 날을 ‘태양신 숭배일’로 지켜왔습니다. 율리우스교황은 바로 이 로마의 태양 숭배일을 예수 탄생일과 합쳐서 지키도록 했습니다. 313년엔 로마가 기독교를 승인했으니 그 대가로 354년엔 기독교가 이교도의 문화를 인정해 준 것입니다. 아주 전형적은 정교유착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 권력과 문화와 야합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순진한 사람들은 교회를 종교집단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 때부터 기독교는 이미 정치집단이 되었습니다. 이를두고 좋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토착화를 이루어 이교 문화를 기독교 문화와 결합시켜 선교를 확장하려는 시도였다고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 보자면 교회의 정치화와 세속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가 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으니 이는 성경적이거나 신학적 연구 결과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정치적 타협의 산물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는 상실하고 온갖 세속적 행사들로만 가득찬 ‘타락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된 먼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시작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제국 아래서의 크리스마스는 처음부터 정치화, 상업화, 세속화되였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성경적 축일이 아니라 세속적 잔치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로마의 이교문화가 자본주의 문화로 탈을 바꿔쓰고 교회를 점령했습니다. 산타크로스로부터 시작하여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카드, 크리스마스 선물 등등 크리스마스가 붙어있는 온갖 상품들은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것들입니다. 크리스마스 푸딩, 크리스마스 케잌 등 크리스마스 음식들은 나라마다, 식당마다 경쟁적입니다. 북치는 소년, 징글 벨, 울면 않되, 루돌프 사슴코, 화이트 크리스마스 등등 크리스마스 음악과, 34번가의 기적, 크리스마스 케럴, 스크루지 영감님, 산타는 외로워 등등 수백 가지도 더 되는 크리스마스 영화와 드라마는 성경과는 하나도 상관이 없는 이 할러데이 씨즌을 즐겁게 해 주는 것들입니다.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쇼핑쎈타 마다 휘황 차란 합니다. 성경이나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로마식 이교도 문화가 미국식 자본주의 문화와 손에 손을 잡고 향락적 소비문화로 아주 굳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영상 40도를 오르내리는 호주에서 조차도 우리는 white Christmas를 부르고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오는 산타를 노래하는 얼간이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기껏 우리를 출애굽시켜 놓았더니 우리는 지금 디시 그 옛날의 애굽이 좋았다고 하면서 이집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상업주의가 지어낸 창작물과 허구들로 부터 이별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진짜 바보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래 탄생하신 날자는 모르지만, 교회사에서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정치적, 문화적으로 형성, 발전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만, 사실 예수님의 생일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그까짓 날짜란 처음부터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오신 뜻, 그가 세상에 오신 그 사건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겁니다. 날짜는 하나의 상징이고 핵심은 그분이 오신 의미입니다. 이제는 성탄절이 주는 여러가지 메시지 중에서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Native Story를 중심하여 한두 가지만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역사’ 혹은 ‘역사 기록’이란 역사가들이 처음부터 필을 들고 써서 역사가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전해오는 이름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라는 사람들이 구두로 전해오던 이야기들을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서 다듬어 놓으면 그게 역사가 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사람들이 받아서 쓴 책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은 그 말씀을 기록한 최초의 목적과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복음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서로 듣고 전해준 이야기들을 모아서 편집한 책입니다.
마태 1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서 전체의 콘텍스트를 살펴보면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보고 메시야로 고백하는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전수된 이야기들을 기록하였거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한 책이라고 봅니다. 마태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요,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계승하는 왕의 후손으로 그려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유대인들을 예수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고 유대인 선교가 더 잘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장에는 족보가 나오는데 그 끝에는 예수님을 낳는 이야기로 종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하는 이야기에서는 모두 다 아브라함의 족보에 나오는 남자들의 이름이 쭉 거명 되는데 그 마지막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럼 당연히 ‘이 요셉은 예수를 낳으니라’라고 해야 마태가 첫 귀절에서 의도한 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완성됩니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에서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나셨다’고 하면서 그 마리아란 여자는 처녀요, 동정녀요, 요셉과는 아무런 성적인 관계가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성경은 의학적, 생물학적 논쟁거리가 되는 선언을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물론 역사상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신비로운 출생 이야기들이 한 두가지는 아닙니다.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로마의 황제들,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의 철학자들, 박혁거세를 비롯한 옛날 위인들에게는 여러가지 출생의 비밀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합리적 상식으로는 받아드리기가 어려운 신화적 스토리들입니다. 그래서 나온 이야기가 예수의 혼외 출생에 따른 각가지 설들이 표출됩니다. 사생아설은 마리아가 성적으로 경솔한 여자였다는 주장입니다. 마리아의 강간설은 완전히 상상의 산물입니다. 요셉이 예수를 양자로 들였다는 입양설은 어느 정도는 상상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마리아를 영원한 숫처녀요 동정녀요, 성모요, 하나님의 어머니로 만든 로마 가톨릭교회, 한 때는 동정녀로써 예수님을 낳기는 했지만 그 후에는 보통 아줌마가 되었다는 개신교회의 주장, 거기에다 아예 마리아를 처음부터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로 취급하는 몇몇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별 쓸데없는 주장과 이론들이 난무해 왔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집자 마태의 의도를 잘 읽어내는 지혜입니다. 지금 마태는 생물학적, 의학적, 과학적 논문을 쓰는게 아닙니다. ‘창조과학회’ 사람들의 잘못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 이론이 아닙니다. 성경은 의학책이 아니고 오히려 의학적으로는 무식한 기록입니다. 성경은 신앙고백이고 그 고백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킵니다. 마태는 지금 우리가 읽기에는 말도 않되고 상식적으로 수긍도 않되고 과학적으로는 결코 받아드릴 수도 없는 기록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어떻게든지 예수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성군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약속된 메시야요,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만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한가지 목표에 집착한 사람에게는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별의별 신화나 우수개나 비상식적인 스토리를 동원해서라도 그가 하고싶은 이야기와 주장을 펼쳐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와 하나님이 예수 탄생 스토리에서 등장인물로 발탁한 두 사람,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서 주목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유대적 풍습에 따라 열서너살 짜리 소녀, 지금 우리 상황으로는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어린 소녀가 영문도 모르는 임신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일입니까? 또 약혼한 여자가 자기와는 한번도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는데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고발해서 온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돌로 때려 죽게 해야 할까요? 열일곱이나 열여덟쯤 되었을 소년 요셉은 얼마나 두렵고 고민스러웠을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태는 마리아와 요셉이 이 알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신비를 받아드리는 것으로 배역을 맡깁니다. 그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어떤 전능자가 자기들을 통해서 무엇인가 인간의 상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신비한 역사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순종하고 받아드리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겸손한 여자는 마리아이고 가장 용기있는 남자는 요셉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실로 모든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신비는 자기들 앞에서 펼쳐지는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용기있게 나서고, 겸허하게 받아드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인류 구원의 역사는 두려움과 떨림 앞에서 용기있게 행동한 이들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지만 교만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하나님의 도구로 등장시켰던 마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 불신과 질곡, 탐욕과 교만, 회의와 갈등의 인간 역사 속에서 용기와 겸손으로 대결하는 주역들이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다시한번 더 강조합니다. 크리스마스 스토리에서 핵심은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이냐’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셨느냐’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를 떠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인간 역사 속으로 오신 ‘그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고대의 신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의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스토리를 가지고서 의학적으로 처녀 탄생이나 단성 생식이 가능하냐고 묻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집은 것입니다.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바보들의 행진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처녀 탄생 이야기는 의학적, 과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신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스토리에 대한 신학적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는 못 하실 것이 없다! 그는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 지혜를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나를 사랑하사 친히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을 사랑하는 삶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알려주셨다! 사실 크리스마스 날은 언제이고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나셨는지 나는 모르다!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알고 믿는게 있다. 전능자는 계시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는 그 분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분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받아드리고 감사하며 찬양드린다! 이제 이후 나 또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가리라!’ 사랑하며 살리라! 겸손하게 살리라!’
마태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그 다음 2장에 가면 더 분명해 집니다. 여기에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오늘날 신학자들 중에는 이 스토리를 실화로 보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박사들이란 누구냐? 점치는 사람들이다. 천문학자들이다. 철학자들이다.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세 가지 예물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다는 점과 연결해서 동방박사들의 숫자를 세명으로, 그리고 있지만 열 두명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출신지도 ‘아라비아다, 메소포타미아다, 이디오피아다’라고 하고, 이름도 구체적으로 카시파와 멜키오르와 발타사르라고 적시합니다. 이들이 베들레헴을 찿아온 시기도 처음에는 예수 탄생후 2년이였다고 했다가 훗날 아우구스티누스가 13일 후라고 해서 그렇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동방박사 스토리가 전해 주려고 하는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내 인생에 있어서 진정으로 참된 왕은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헤롯왕과 유대인의 왕입니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 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 질문은 이 두 왕 중에서 누가 진짜 왕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헤롯이냐? 예수냐? 성경은 그 때나 지금이나 모든 독자들에게 ‘누가 참된 왕이냐?’를 결정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물론 ‘왕’이란 상징입니다. 헤롯왕은 이집트의 바로를 이어오는 모든 세속적 권력자들을 대표합니다. 그는 일찌기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새 왕의 탄생을 방해합니다. 바로는 모든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나일강에다 버리도록 했고, 그의 뒤를 이은 헤롯은 두살 이하의 어린애기들을 모두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새로운 지도자, 새 임금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모세는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았고 예수는 모세가 떠나왔던 그 이집트로 피신하여 생명을 보전하게 됩니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으로 인하여 소동을 벌리며 당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새 왕을 기다리지도 않았고 막상 새 임금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그를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새 임금을 거절했을 뿐만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죽이려했고 마침내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왕이 되면 않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가 왕이 되면 그들의 자리는 흔들리고 그들의 기득권들은 하루아침에 날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원한 왕은 헤롯이고 헤롯이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최선의 안전지대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왕권을 지키려고하는 이들은 누굽니까? 모든 시대를 통하여 기성 종교를 대표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체제를 수호하려는 인간들입니다. 그럼 그들의 풀 써포트를 받는 헤롯왕은 누구입니까? 팍스 로마나를 부르짖는 가이사 아우구스도입니다. 그가 임명하고 조종하는 졸개들입니다. 거대한 제국주의와 그 아래에서 떡고물을 바라는 분봉왕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새임금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자본주의, 물질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향락주의의 민낮을 도처에서 맞다뜨립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 우리는 다시한번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헤롯이 왕인지 예수가 왕인지, 물질이 더 소중한지 인간이 더 귀한지, 권력의 힘이 더 강한지 십자가의 능력이 더 강한지, 핵무기와 ICBM이 더 강력한지 사랑과 겸손이 더 강력한지, 결정하고 결단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누가 우리의 영원한 왕입니까? 헤롯입니까? 예수입니까? / 바로입니까? 하나님입니까? / 씨이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 돈과 권력과 자본입니까? 하나님과 그의 의와 사랑입니까? 두 사이에 서서 머뭇거리지 마십시요! 하나님이면 하나님, 바알이면 바알, 결정하셔야 합니다. 양심과 지성과 참된 시앙을 걸고 결정해야 합니다. 저는 에카르트의 말대로 양심과 인격과 신앙에 따라 진정으로 ‘예수가 나의 왕 나의 그리스도’라고 결정을 내린 다음, 크리스마스 런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승인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공의와 불의 사이에서,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돈과 권력으로 치장되어 상식과 양심을 지닌 사람들은 결코 다니기가 쉽지않은 이 타락한 교회와 겸손과 희생으로 가다듬은 참되고 순수한 복음 사이에서 우리가 따라가야 할 왕을 선택하는 날입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정치? 돈? 명예? 도날드 트럼프? 말컴 턴블? 문재인? 목사의 세습과 함께 수천억의 숨겨진 물질을 위장하는 한국의 초대형교회? 아닙니다! 정말 이런 것들은 아닙니다! 예수입니다! 예수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삶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인류의 희망을 볼 수 있습니까? 헤롯과 씨이저, 트럼프와 문재인, 권력과 물질은 우리의 희망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예수가 인류의 마지막 소망입니다! Jesus, Jesus Christ is the Final Hope of the World! 그래서 크리스마스날에는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을 크게 틀어놓고 ‘왕의 왕 주의 주’를 힘차게 노래합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