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콜롬바(St, Columba)의 생애와 영성(2)
금세기 시카고 대학 교수인 죤 맥나일(John McNeill)은, 콜롬바가 동료들과 스코틀랜드의 지방을 여행한 후, 서해안 북단 아이오나(Iona)섬에 정착해서 563년에 수도원을 세우고, 스코틀랜드 복음화의 전진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당시 아이오나 섬은 ’I’ 혹은 ‘HY’로도 불리웠고, 라틴어로 ‘Iova’ 혹은 ‘Iona’로 불리웠다. 이 섬은 스코트족과 픽트족간의 분쟁 지역 이었다. 그곳에서 콜롬바는 쪽복음 300권을 복사해서 선교에 사용하였고, 그중에 남은 복사본은 현재 영국왕실의 국보로 보존되고 있다. 콜롬바 자신은 책들을 정말로 사랑했고, 수도사들을 위해서 시편집이나 성서를 복사하는데 온 전심을 기울였다. 그의 생전에 300권이 넘는 성서를 번역했다. 지금 온 영국이 사랑하는 아이오나 섬에서 했던 첫 번째 일은 돌로 만든 높은 십자가를 세웠고, 인생을 마지막으로 보내기 위한 마음의 고향을 기리는 수도원을 세웠다.
Finlay의 전기에 의하면, 콜롬바는 스코트랜드의 동북부에 위치한 픽트(Picts) 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헌신했다. 남부지방은 이미 불란서에서 온 니니안(Ninian)에 의해 전도가 되고 있었다. 픽트족의 왕 부르드(Brude)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아이오나섬에서 배를 타고 스코틀랜드 육지에 그람피안 (Grampian) 산맥 북부지역의 픽트족 복음화를 위해 자신은 도보로 산과 들을 걸어서 여러 마을을 선교하였다. 선교하면서 그가 남긴 수십 편의 기도와 기도시는 켈틱교회의 영성을 담고 있으며, 그는 진정한 스코틀랜드의 영적 아버지며 교부였다. 그의 영성에는 자연을 사랑하며 돌보고 또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찬양하는 시편적인 영성을 지니고 있다.
이상택 교수의 켈틱영성 강의 중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콜롬바가, 하루는 날개를 다친 기러기 한마리가 섬에 찾아왔는데, 며칠 동안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며 치료해 주었더니, 그 기러기는 해마다 철새로 이동하는 시기에 매년 동료 기러기들과 수도원으로 찾아 와서 춤을 추며 수도사들을 기쁘게 해주며 며칠을 지내다가 먼 길을 떠났다고 한다. 마치 한국의 흥부와 놀부전에서 맘씨 고운 흥부가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고 횡재하는 전설을 상기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친절이 동식물에게도 전달되어야 한다고 수도사들에게 가르친 결과의 좋은 예화이다.
대표적인 켈틱기도문을 소개한다.
나를 감싸 주시는 하나님,
나의 주변에 계시는 하나님,
나의 언어 속에 계시는 하나님,
나의 생각 속에 계시는 하나님,
내가 잠들 때에도,
내가 일어 날 때에도,
내가 바라 보고 있을 때에도,
내가 소망하고 있는 일에도,
나의 삶 속에,
나의 입술 속에,
나의 영혼 속에,
나의 가슴 속에,
나의 고난 중에,
나의 무력함 속에,
나의 모든 삶의 여건 속에,
나의 영원한 삶 속에 계시는 하나님.
오늘날은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까지 해상이동은 여객선이 있어서 용이하지만 콜롬바 당시의 바닷길 여행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고, 6세기에 그들이 첫 번째 도착한 섬은 Cronsay였으나 토지가 척박해서, 재이동 후 아이오나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콜롬바에게 특별한 힘을 주어서 아이오나 상륙을 감행케 했다. 하늘과 땅 사이가 가장 가깝다는 스코틀랜드의 외딴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바위,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모양을 갖춘 아이오나섬은 히브리어로 비둘기란 뜻을 가진 평화를 상징하는 섬이다. 온화하면서도 체격이 장대하고 용감했던 콜롬바는 역경을 헤쳐 가며 그의 별명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비둘기’로서 영혼의 섬, 아이오나에 안착했던 것이다.
콜롬바는 처음 나무로 된 수도원을 지어가면서 순례행진을 시작했다. 달리이다의왕 코날(Conall)의 허락을 받고 수도원을 짓고, 기도, 금식, 연구, 저술, 농사를 통해 선교 센타를 만들어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매일 작업장, 목장, 창고 등지에서 감사의 기도와 축도를 하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마귀의 영을 내쫓곤 했으며, 수요일, 금요일은 금식기도, 주일날은 성찬식, 토요일은 조용히 명상과 휴식을 했다.
4) 노년시절
아담난의 ‘콜롬바 자서전’에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축복의 기도를 받기위한 순례자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물, 과실나무, 소금, 우유, 강가에있는 돌멩이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게 축도를 했다고 한다. Blessing and Cursing(축복과 저주)는 종이 한장 차이다. 남을 저주 하지 않고 축복해 주는 콜롬바의 정신이 현대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영성이다. 아이오나는 수세기 동안 크리스찬 영성개발 프로그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그후 오랜 세월동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교회들은 선교사들이 후에 로마에 가서 가져온 것들과 구분해서 콜롬바가 수도원적 삶을 위해 정해 놓은 계율들을 준수해 왔다. 동방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바실(Basil)의 규칙에 근거한, 콜롬바의 규범들은, 로마교회의 청빈수도원의 창립자, 성 베네딕트의 규정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서부유럽의 많은 수도원들에서 사용되었다. 콜롬바는 매우 엄격한 생활습성과 성격을 갖고 있었다.
콜롬바의 삶의 방식은 단순하고 청빈해서 잠을 잘 때도 바위위에서 돌베개를 베고 잤다. 그는 주로 보리와 오트밀케익을 먹고, 단 한 시간도 낭비하는 시간은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금식을 하고 모든 인간의 인내력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금욕적인 행위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의 얼굴에서 거룩한 기쁨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고, 그것은 그의 가장 깊숙한 영혼을 채우고 있는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들어내 주었다. 그는 기도의 힘으로 질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오나에서 수많은 악한 영혼들을 쫓아내었다. 시간이 나면 기도하고, 책 읽고, 글 쓰고, 공동체에서 노동 봉사를 하였고, 금식의 고난도 이겨냈다.
콜롬바가 자신의 임종이 가까운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그가 사랑하던 말이 나무아래 앉아있던 주인에게 걸어와 얼굴을 맞대고 울었다고 한다. 그 말은 소외양간으로부터 우유통을 나르던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의 수행원이 말을 쫓으려고 하자, 콜롬바는 “그냥 놔두시오, 그 말은 나를 그만큼 좋아하고 있소. 당신은 인간이고 이성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의 떠남을 모르겠지만, 창조주께서는 이성이 없는 겸손한 이 짐승에게 그 주인이 세상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말에게 알려 주셨소”, 이렇게 말하고 콜롬바는 애마를 축복하였고, 그 말은 슬픈 기색으로 그를 떠났다. 지금도 아이오나 수도원 벽에 걸려있는 ‘콜롬바의 애마와 마지막’이라는 그림이 인상적이다.”
서기 597년 6월 9일 주일새벽, 아이오나에서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3일 낮과 밤 동안의 그의 장례식 기간에 비를 동반하지 않은 폭풍이 일었다. 그 바람은 매우 격렬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콜롬바를 안장한 후 즉시 폭풍과 바람은 멈추고, 바다는 잔잔해졌다.
잠시 후 그의 거룩한 영혼이 떠나고 찬송이 끝났을 때, 그의 신성한 몸은 시편이 영창되는 가운데, 그의 장례식은 모든 명예와 존경 가운데에 성스럽게 치루어져, 그의 존경스러운 몸은 좋은 아마포로 만들어진 깨끗한 수의로 감싸져 준비된 관에 놓여졌다. 콜롬바는 빛나고 영원한 광휘와 함께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 모든 합당한 존경을 받으며 매장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노정언 장로
한남·촬스슈터트대학 신학석사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