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16)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16>
호세아 5:15-6:4은 해석의 논란이 많은 본문이다. 영어 역본들 중에 NET, GNT, ESV, NIV, 그리고 한글 역본들 중에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새번역, 우리말성경 등이 6:1-3 머리에 ‘백성들의 불성실한 회개’ 혹은 그와 비슷한 제목을 달았다. 반면, NASB, NKJV, RSV, NLT 등은 ‘하나님의 책망에 대한 반응 The Response to God’s Rebuke’ 혹은 ‘회개를 요구하심 A Call to Repentance’이라는 타이틀을 달음으로 앞으로 이스라엘 (하나님께 순종할 남은 자들)이 이러이러하게 회개를 할 것임 곧 회개를 예시하는 것으로 혹은 회개를 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나 권면으로 보았다. 필자는 이 해석들 중에 ‘회개 예시’ 곧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죄로 고난을 받을 때 그중 ‘남은 자들’이 회개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들이 ‘이러이러한 말로’ 회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본다.
6:1-3을 ‘참된 회개 예시’로 보는 이유들
필자가 이 구절들을 회개 예시로 보는 첫째 이유는 이와 비슷한 구절들이 호세아서의 여기 저기에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 구절들을 직역해 보자. “내가 갈 것이다. 내가 돌아갈 것이다. 나의 장소로, 그들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내 얼굴을 찾기까지. 그들의 괴롭힘의 때에 그들이 나를 간절히 구할 것이다. ‘와라. 그리고 야웨께 돌아가자! 참으로 야웨께서 찢으셨으나 그가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다. 그가 때리셨지만 그가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이다. 그가 우리를 2일 후에 살리실 것이다. 그 3일째 우리를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 앞에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도록 하자. 야웨를 알기 위해 애를 쓰자. 그분의 나오심은 아침같이 준비되었고, 그는 우리에게 비처럼 오실 것이다. 땅에 (내리는) 늦은 비 이른 비처럼.’” 이와 비슷한 구절인 2:7을 먼저 보라. “그녀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들을 따라갈 것이나 그들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가 그들을 찾을 것이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 그녀가 말하기를, ‘내가 갈 것이다. 내가 돌아가겠다. 지금보다 그 때가 내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라고.” 또 비슷한 구절인 8:2를 보라.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을 것이다. ‘나의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이 당신을 압니다.’라고.” 이 구절들에서 작은 따옴표로 표시한 것은 장래에 이스라엘이 이러이러하게 회개의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같은 회개이기는 하지만 ‘회개 권면 혹은 회개 요구’는 이것과는 약간 다르다. 이것은 현재 이스라엘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인데, 말하자면, 돌아와라! 죄를 버리고 야웨께 돌아와라! 이런 말이다. ‘회개 예시’와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것이 ‘회개를 요구하심 혹은 회개 권면’은 10:12; 12:3-6; 14:1-3에 보인다.
둘째 이유는 호세아서의 구조 때문이다. 4:1-6:3과 6:4-11:11이 거의 병행을 이루고 있다는 것인데 (전에 한번 언급함), 이는 4장 처음과 6:4이하의 첫 부분에 아주 비슷한 단어들을 통해 두 단락 모두 죄론 (hamartiology)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6:1-3을 불성실한 회개, 거짓된 회개로 보는 학자들 (참고 Warren W. Wiersbe [2002; 3332]도 그러함)은 바로 뒤에 곧 6:4 이하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는 내용이 이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만약, 이 두 단락이 병행을 이루고, 6:1-3은 회개 주제, 곧 이 회개가 회복을 시사하기 때문에 단락의 끝을 이루는 내용으로 이해했다면, 거기서 단락의 종지부를 찍었다면, 이러한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는 호세아가 즐겨 이런 예언 기술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회개 예시’는 아니지만, 다음 구절들을 읽어보라.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 14:8)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의 회복시에 이스라엘이 하게 될 말과 하나님이 대답하시게 될 말씀을 미리 예시하는 구절이다. 결론적으로 여러 이유들로 볼 때 미래에 하게 될 말의 예시, 곧 회개의 예시로 6:1-3을 보는 것이 맞아 보인다.
단락 제목 붙이는 것도 조심해야
이상에서 하나의 본문을 놓고 해석이 정반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본다. 어떤 사람은 거짓된 회개로, 어떤 사람은 미래에 남은 자들이 하게 될 참 회개로 6:1-3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러므로, 만약 성경의 단락들에 제목을 붙이는 학자들이 좀더 주의 깊었다면 이런 상반된 견해들이 있을 때 차라리 제목 붙이기를 유보하거나 (한글개역), 하나의 제목을 달아도 주를 달아 반대로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음을 알렸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책 (역본)을 읽는 독자는 어떤 본문 내용을 깊이 연구하지 않은채로 기존의 붙여놓은 단락 제목을 그대로 신뢰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내용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해 붙이는 단락 제목 때문에 독자가 성경 본문이 의도하지 않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되거나 혹은 심지어 교리적으로 오도될 수 있기까지 하다면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현재 성경의 장들을 나누는 데에 잘못 나누어 놓은 것들이 꽤 있다. 6:3까지로 단락을 끊어 장을 나누어 놓았더라면 또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곧 학자들이 쉽게 ‘불성실한 회개’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 원본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필사에서, 번역에서, 장절구분에서, 해석에서 사람의 생각들이 들어감으로 혹은 잘 모름으로 오류들이 생긴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다!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