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20)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20)
세상적-인간적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의 마음의 저변에 참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깔봄과 업신여김이 놓여 있었던 반면, 하나님은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들어주심으로 그 왕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이 망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신다 (호 13:10-11). 또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스렸는가를 알려주셨다. 이것이 지난 호에 다룬 내용이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나는 이번 호에는 얼마나 이스라엘이 ‘자기본위 (自己本位)의 삶’을 살았는가를 언급하고자 한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왕을 달라했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왕을 세운 것은 삼가하지 않는 제멋대로의 인간, 죄의 성향을 속히 따라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자의적 (恣意的) 숭배’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에 의하면, 첫째 이스라엘은 저희들 ‘마음대로’ 여호와를 버렸고, 둘째 하나님이 그어놓으신 법칙 (계명)을 따르기는 커녕 저희들 ‘욕심에 끌리는 대로’ 음란히 잡신 (우상)을 섬겼고, 셋째는 앗수르의 위기에서 놓여나게 할 왕을 하나님의 뜻 (신 17:14-20)과는 상관 없이 ‘제멋대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의적 숭배는 호세아 시대의 특징적인 종교-사회적 측면이었다. 호 8:4-5에 “그들이 왕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제멋대로한 여로보암 1세
북이스라엘의 이러한 짓거리는 호세아 시대 때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나라의 초창기에 여로보암에 의해서 이러한 작태가 이미 나타났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집을 배반하고 (왕상 12:19) 여로보암을 그들의 회의에 초청해서 제멋대로 왕을 삼았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은 이 왕은 조폭들 (대하 13:7, worthless men, scoundrels. NASB)을 규합하였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여 (왕상 12:25) 행정 도시로 삼았다. 그는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하고 벧엘과 단에 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이 경배하게 하였다. 여로보암은 ‘자기 마음대로’ (왕상 12:33) 여덟째 달 15일을 절기로 정하고 자의적 숭배를 실시하였다. 세겜에 도읍을 정한 그가 정말 세겜이 어떤 곳인 줄 알았더러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세겜은 좌우에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있었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반반 나누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의 순종 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있게 됨을 기억케 한 장소가 아니었는가 (신 11:26-32; 27:11-26; 수 8:30-35). 그리고 세겜은 여호수아와 백성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서 언약을 맺어 잡신 숭배를 거절하고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결단한 바로 그 장소가 아니었는가 (수 24장). 하나님께로부터 세움 받지 않은 자기 멋대로 하는 왕 그리고 그 왕을 따르는 난봉꾼과 잡배들 (대하 13:7. 개역개정)이 금송아지들을 숭배하도록 백성을 이끌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과 절기를 정하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를 변개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남쪽 유다 왕국의 아비야왕과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맞붙었을 때 아비야는 남 유다가 이러한 ‘제멋대로인 북왕국’과 달리 얼마나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가는 나라’인가를 말한다. 아비야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다윗과 그 후손)이 통치하는 나라를 ‘다윗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나라’로 언급하는데 이는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지! 많은 구약학자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구약에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하나, 나는 이런 표현 (시 2:6ff; 단 7:13-14 등 참조)이야말로 구약에서도 벌써 하나님 나라 사상을 여실히 전한다고 본다. 북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치는 아비야의 말을 들어보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일어나 자기의 주를 배반하고…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 (대하 13:5-6, 8. 필자의 강조) 아비야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요, 그분의 세우신 사람을 대적하고 깡패들을 규합하여 왕이 된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나라는 세상 나라라고 말한다. 우리 나라는 여호와께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요 너희 나라는 금송아지들이 다스리는 나라니 귀신의 나라라는 것이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내 맘대로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 놀랄만한 것은 그 하나님이 명하신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요, ‘세상 풍속을 좇아 제멋대로 돈을 받고 제사장을 세우고 자의적 예배를 드리는 나라는 곧 사탄 (대적이라는 뜻. 참고, 살후 2:4 ‘대적하는 자’)의 나라라고 아비야는 말한다. 곧 “너희가 아론 자손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수 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들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가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13:9-11)고 아비야는 첨언한다.
제멋대로 행동한 아론과 이스라엘
구원주 여호와를 금송아지로 바꾼 것은 주지하다시피 이미 출애굽 때부터 있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백성이 아론을 부추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위의 여로보암과 똑같은 말을 이미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이 말했다. “이스라엘아,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출 20장 4-6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말씀하셨건만 아론과 이스라엘은 자기들 좋은대로 하여 하나님 계명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하나님은 출 32장8절에,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라고 하신다. 이렇게 제멋대로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종 모세를 거역하고 자기들도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에게 한 말은 “네가…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민 16:13)이었다. 자의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만들며,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거스르고 자기가 그 사람 (왕)이 되겠다고 한다. 문제는 현 시대가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성경까지 제멋대로 뜯어고친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계명 고치기
로만 카톨릭 측에서 그들의 전통적인 요리문답 (catechism)에서 10계명 중 우상숭배에 대한 구절을 삭제해 버리고 열번째를 두 개로 나누어 10 수를 채운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천주교인 중에는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실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성 소수자 인권 보호를 한다는 명목으로 동성연애 금지 계명 (롬 1:26-27; 고전 6:9)을 뜯어 고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그리하여 이제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았던 때 곧 롯의 때와 꼭같이 될 것이다. 로만 카톨릭처럼 우상숭배 금지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에 포함되어 있으니 굳이 우상숭배 금지를 2계명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해서 빼야 한다면 모세가 우상숭배가 만연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왜 그토록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를 경계시켰는지 이해가 가지 않게 된다. 우상숭배와 동성연애가 별 것이 아니라면, 왜 사도 바울은 음행 (동성연애도 당연히 포함)과 우상숭배를 행하는 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당시 소아시아의 제일 큰 도시 (지금의 서울, 시드니 같은 도시)의 신약 성도들에게 그토록 경계했겠는가 (엡 5:5).
마음대로 성경 해석 하기
요즘 톰 라이트 (Tom Wright)의 로마서 주석을 읽으면서 너무나 교묘한 자의적 해석의 예를 접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함을 받는 것 (以信稱義)은 곧 내 죄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참여했으며 구원 받은 것으로 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함을 나는 믿는다.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니 나는 믿음으로 성령을 의지하며 죄와 싸우며 거룩의 길로 나아간다. 나는 주님 믿음 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길 힘쓴다. 내가 이렇게 살아갈 때 얼마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 안에서 의의 열매들을 맺으실 것이고 영광의 부활의 날에 이를 칭찬하실 것이나 내가 나의 열매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나는 로마서를 그렇게 읽고 구원 받았고, 500년전에 루터도 그렇게 읽고 구원 받았고, 성령 받았고 또 나는 이 사실을 그대로 전도한다. 그러나 라이트는 “칭의는 그저 ‘내가 나의 죄를 용서 받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메시야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 가족을 창조하시는가에 대한 것이다”라고 구약의 이스라엘이 할례로 언약 백성이 되듯이 예수 믿음이 새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도구인 것처럼 말한다 (라이트에게 칭의는 구원이 아님; 롬 주석 참조). 라이트는 최종 칭의는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간 나의 삶으로 받는다고 한다. 라이트 같은 세계적인 학자가 로마서의 칭의를 이 정도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또 언약신학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파이퍼 (John Piper)는 라이트의 이러한 교묘한 자의적 해석에 대해 갈 1장을 들어 ‘다른 복음’이라고 말한다. 심히 안타까운 일이고, 한국의 몇 신학자들도 새관점의 이 논의에 맞장구를 치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라이트의 학문적 연구가 다 그릇되었다는 말이 아님). 라이트의 새관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일단 Phil Johnson의 비디오 연설을 권한다. 그는 “A New Perspective on Paul?” (Alpha & Omega Ministries, YouTube)에서 Wright는 right하지 않다고 하였다. 아니면 파이퍼의 The Future of Justification: A Response to N. T. Wright (한글판도 있음)나 D. A. Carson 등의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을 참조하기 바란다.
제멋대로 하면 안된다
나의 옛사람은 늘 내 멋대로 하고 싶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생활은 늘 성경의 표준을 따라 ‘삼가해야’ 한다. 자기본위로 살다가는 내가 왕 (=하나님)이 되고, 내 멋대로 금신에 머리를 조아리고, 내 구미대로 말씀을 뜯어고치며, 내 멋대로 현란한 성경 해석을 하게 된다. 이제 마지막 때가 가까와 적그리스도 (최고의 인간본위=마귀의 아들)가 와서 제멋대로 ‘때와 법을 고치고자’ (단 7:25; 살후 2:3 ‘불법의 사람’, 2:8 ‘불법한 자’) 할 것이다. 그는 ‘자의로 행할’ (단 8:24) 것이다. 사람들로 우상을 숭배케 할 것이며 (계 13:14) 음녀와 음행 (계 18:9)을 권장할 것이다. 그는 ‘거룩한 언약을 거스르며 자기 마음대로 행’할 것이다 (단 11:28, 36). 왕이신 예수님의 뜻에 유의하라. 왕이신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삼가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 (잠 16:20). 제멋대로 하면 ‘산산조각’난다 (호 8:6).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