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21)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21)
북이스라엘의 자기본위적 신앙 곧 제마음대로의 숭배는 왕이신 여호와를 업신여김, 금 신을 만들어 숭배함, 마음대로 왕을 세움 (혹은 쿠데타로 기존 왕위를 찬탈함), 세상적 왕이 자의로 행함, 지도층이 함께 썩음, 백성이 썩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왕과 백성이 모두 불행해짐 등으로 이어졌다. ‘자의적 숭배’ (호 8:4)의 결과는 ‘불행’과 ‘비극’으로 결론이 나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의 불행은 이미 출애굽부터, 광야에서 (모압 들판에서) 충분히 예상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내려옴이 더디어지자 백성이 아론을 충동하여 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였을 때 야웨께서는 이스라엘을 다 죽이시고 모세를 통해 큰 민족을 새롭게 이루고자 하셨었다 (출 32:10). 모세의 회개로 야웨께서 그들을 다 죽이시지 않으셨으나, 그리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이루지 않으셨으나, 곧 이어 가데스 바네아의 불평 (민 13-14)으로 결국 출애굽 1세대는 야웨께서 광야에서 다 죽이셨고 (민 14:35) 새로운 세대가 겨우 요단을 건넌다. 우리가 아는대로는 모세 자신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히 11), 악한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못함으로 가나안 입성이 허락되지 않는다 (신 31:2; 32:52; 34:4). 이스라엘의 자기 본위적 신앙의 결국은 불행이다.
‘신명기 사가적 역사’ 이해의 근본적 잘못
따라서 신명기는 1차적으로 출애굽과 광야 시대를 돌아보며 진행되기에 앞의 책들과 먼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소위 ‘신명기 사가적 역사 (Deuteronomistic History; DtrH)’ 이해 곧 신명기를 그 뒤의 전선지서 (여호수아부터 열왕기까지)와 먼저 이어서 본 것은 이 점에서 분명 잘못이라고 하겠다. 물론 신명기에 제시된 내용의 많은 부분이 전선지서에 연결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앞부분의 출-레-민의 역사와 분리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출-레-민에서 이미 언약의 주이신 야웨 왕에 대한 반역의 ‘역사’가 있었고, 이 ‘역사’를 회상함으로 현재를 반성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의 미래를 경계하는 것이 신명기의 우선적인 위치인 것이다. 우리가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열왕기의 역사에 근거하여 읽듯이, 신명기는 먼저 출-레-민의 역사 좀더 멀게는 창세기의 언약의 역사에 근거해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신명기가 요시야의 중앙집권을 위해 조작된 문건이라고 보는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신명기의 위치를 무시하고 전선지서와 먼저 연결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것도 ‘제멋대로’의 성경해석의 일례다.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조작된 정치 문건 정도로 취급하니 이 말씀 (신명기)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믿겠는가. 초대교회의 예수님 신격화의 일환으로 조작된 이야기로 볼 것이다! 제멋대로 왕을 요구한 것이 ‘불행’과 ‘비극’으로 결론이 나듯이, 이들의 길도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닌가.
야웨 왕의 거부는 조상 때부터
요컨대 왕이신 야웨의 거부는 이미 시내산 아래서도 있었고, 광야에서도 있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왕을 업신여기고 자의적 숭배에 빠질 것을 이미 내다 보았다. 야웨께서 이러한 통찰력을 모세에게 주신 것이다. 모세는 야웨의 명을 따라 이 예상이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져서 이스라엘에게 증거가 되도록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이 신명기 32장이다. 야웨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32:3)이시요, ‘아버지’ (v. 6)시요, ‘왕’이시요 (cf. vv. 8-9), ‘인도자’시요 (v. 12), ‘구원자’ (v. 15)시나 이스라엘 (=여수룬)이 살이 찌고 윤택하게 되니 야웨를 업신여겼다 (v. 15;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과거로 말함). 이스라엘은 귀신들을 섬겼다 (v. 17). 이스라엘은 소돔과 고모라가 되었다 (v. 32). 이로 인하여 질병, 요절, 포로 등 재앙과 환난이 온다 (vv. 22ff).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 슬픔의 사람들이 된다.
모세는 우리가 행복한 사람, 기쁨의 사람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어진 33장 ‘이스라엘의 축복’에서 알려준다. 먼저 우리는 우리 왕이 야웨이심을 알아야 한다 (33:5). 우리는 그 왕의 말씀을 받아야 하고 (v. 3),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천하지에 “하나님 같은 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만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이다 (v. 26).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처소가 되실 때 (v. 27), 우리는 비로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가 되는 것이다 (v. 29). 결론은 오직 왕이신 야웨 안에서만 참 행복이 있다,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호세아 선지자는 이 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로오쉬 에하드’
호세아는 야웨가 왕이심을 언급할 뿐 아니라, 야웨 왕과 구별되는, 그러나 야웨 왕과 나란히 나타나는 왕을 또한 언급한다. 이는 호 1:11에 ‘로오쉬 에하드’로 나타나는데 KJV는 직역하여 ‘one head’, NASB, NIV 등은 ‘one leader’로, 개역개정은 ‘한 우두머리’로 번역하였다. 3:5에는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라고 하여 이 우두머리되신 분이 곧 육신으로 다윗의 씨 (롬 1:3)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마쉬아흐 (그리스도)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한 리더에게 남왕국과 북왕국의 남은 자들이 함께 모일 것이며, 이 분 앞에 그들은 회개하고 회복될 것이다. 모든 세상의 자의적 왕들, 앗수르를 비롯한 이방의 포악한 왕들 안에서 찾지 못하던 행복을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이 왕 안에서 찾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호세아는 미래의 메시야를 내다보는 것이다. 이 왕에 대한 언급이 1장과 3장의 말미에 나타나 4장 이후에 나타나는 북이스라엘의 소망 없는 자의적 왕들과 대조되고 있다.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의적인 사람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로오쉬 에하드’ 예수 (곧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삼가하고 주의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이다. 북이스라엘의 자의적인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행복했는가. 그들은 자의적으로 바알 귀신들을 섬겼다. 남유다의 자의적인 사람들을 보라. 그들에게 기쁨이 충만했는가. 이 사람들은 우상 숭배뿐 아니라 심지어 성전에서 태양 숭배를 했고, 여인들은 담무스를 위해 애곡을 하였다 (겔 8:14ff). 자기 몸에서 난 자녀를 몰렉에게 인신제물로 바쳐 살인하였다. 왕들도 산당에 올라가 금신에게 절을 하고 신전창녀들과 성행위를 하였다. 재판정에서는 정의가 죽었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였다. 야웨를 깔보는 속담, 말씀을 업신여기는 속담을 만들어 농을 주고 받았다 (겔 12:22ff). 자의적인 신학에 따라 나온 속담들 (마솰)이었다. 선지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예언을 해주었고, 제사장들은 권세를 남용하였으며, 백성들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혼합주의에 빠져들어 갔다. 남자들도 음행에 빠지고 여자들도 정을 통하는 눈을 하고 아기죽 거리며 걸어다녔다. 가정이 더러워지고 가정이 깨지고 자녀들의 영이 더러워진다. 자연스럽게 죄가 대물림이 되고 죄가 더 심화되고 허무감과 우울증으로 자살이 늘어간다. 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일들이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고, 미국은 더 심화되어 가고 있고, 한국이나 호주는 이 상태로 한참 진입이 되어 있다. 그러니 왕의 자녀된 우리는 이제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호 10:12) 그리고 우리 모두 주님의 빛을 발하는 자녀들이 됩시다.“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