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53)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가서 1
미가서를 세 단락으로 구분하는 학자들
미가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보는 사람들 중에는 C. F. Keil & F. Delitzsch, E. J. Young, 최근의 Hassell C. Bullock, Ralph L. Smith 등이 있다. 필자도 이들의 견해를 따르는데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이들이 미가서의 단락들을 잘 구분한 반면,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는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영 박사는 1-2장을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위협, 3-5장을 심판에 따라올 회복, 6-7장을 백성에 대한 형별과 하나님의 최종 자비로 보나 (구약총론, 289-91). 그 제목들이 정확하지 않다. 그러한 구분이 어떤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다소 약한 편이다.
달리 구분하는 사람들
반면, 박동현 교수의 구분은 심판과 구원을 첨예하게 이원적으로 나눈다 (구약성경과 구약학, 75f). 즉, 1:2-3:12는 심판 예언, 4-5장은 구원 예언, 6:1-7:7은 심판 예언, 7:8-20은 구원 예언 등으로 나누는 것이다. 미가서에 이러한 내용의 흐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런 구분을 하는 그 근본을 캐보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즉, 본문의 통일성에 대한 불신이다. 심판과 구원의 예언들을 다른 시대의 다른 신학의 산물로 본다. 이를 테면, 심판 예언을 포로 전으로, 구원 예언을 포로 후로 본다든가…박 교수가 이런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있는 경우가 많은 반면, 그의 구분은 이런 영향 속에 있는 듯 보인다. 최근의 Raymond B. Dillard & Tremper Longman III도 이런 영향 속에 있는 듯 보인다. 깊이 연구하지 않고 비평학의 유산을 답습하는데 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 (An Introduction to the OT, 400). 히브리 성경 기자들의 문학적 관습들에 대한 깊은 연구가 약한 것이다. 구약 본문의 유기성 , 인과성 혹은 선후성, 반복과 변이, 점진성 등에 대해 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필자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미가서의 1-2장, 3-5장, 6-7장은 학자들이 말하듯이, 대체적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진행하면서도 각 단락에 몇 개의 중요한 모티프들을 사용하여 반복, 변이, 점진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각 단락은 일관되게 최소한 다섯가지 중요한 모티프들이 있으니 첫째는 산당 (높은 곳 혹은 우상숭배나 제사)이요, 둘째는 지도자들의 죄 (학대, 뇌물, 백성의 일반 죄)요, 셋째는 선지자 (예언을 금함, 여호와의 신, 점침, 선지자의 권면이나 예언 등)요,, 넷째는 여호와의 날 (혹은 다양한 심판)이요, 마지막으로는 메시야와 여호와의 통치 (여기서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요, 이스라엘은 이상적 이스라엘 곧 남은 자를 말함)이다. 이러한 주제들이 일관되어 나타나타는 반면, 각 단락의 강조점은 다르다.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죄
이 모티프들 (첫째로부터 셋째까지)에서 미가가 다루는 가장 중한 죄는 무엇인가. 역시 산당의 우상숭배나 이스라엘의 타락한 제사행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죄가 맨 처음에 나온다. 미가는 호세아와 같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성적인 타락에 견준다. 음행의 값, 기생의 값 (1:7) 같은 어구가 이것을 증시한다. 첫 단락을 지나 두번째 단락인 3-5장 사이에 위치한 3:12는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높은 곳’은 무엇인가. 1:3에서 이미 말한 땅의 ‘높은 곳’과 같은 단어이다. 곧 산당들이 위치한 곳이다. 성전의 산이 산당이 위치한 산처럼 된다…기절할 예언이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미가는 그가 처한 당시의 산의 높은 곳에서 미래의 회복될 산의 높은 곳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 4:1을 보면 말일의 산의 머리 (로쉬 4:1)에는 바로 그 장소에서 우상 숭배를 하던 미가 때와는 달리 여호와의 전이 우뚝 설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 산의 정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미가는 수풀의 높은 곳 (산당 3:12)과 산 정상의 여호와의 전 (4:1)을 잇달아 배치함으로 우리에게 대조점을 보여준다. 마지막 단락에도 이 주제가 보인다. 가나안 종교의 가증함이 나타나는데, 바로 인신제사가 그것이다. 6:7하반절에,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가 인신제사를 시사한다.
그 다음으로 다루는 죄들
종교적 죄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도자들과 백성이 죄인데 이 둘은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이 죄들은 모두 정직이나 공의에서 떠난 죄를 가리킨다. 탐욕(2:2; 3:11; 7:3), 뇌물수수(3;11; 7:3), 폭력과 학대(2:9; 3:2-3, 10; 6:10-12)와 같은 죄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부정(不正)이나 불의(不義)와 같은 단어로 각 단락에서 보이고 있다.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하야솨르)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2:7하); “공의를(미슈파트) 미워하고 정직한 것(하예솨라)을 굽게 하는 자들아” (3:9중);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미슈파트)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하); “그들의…가장 정직한 자(야솨르)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7:4부분). 아모스와 이사야가 공평 혹은 공법 (미슈파트)과 정의 혹은 의 (쩨다카)를 말하는 반면 미가는 공의와 정직 (3:9; 6:8; 7:4)을 말하며, 때로는 인자, 겸손, 선과 같은 도덕적 속성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선호한다.
예언을 금하는 죄
특이한 것은, 미가는 아모스처럼, 당시 사람들이 참 선지자의 설교를 반대했음을 보여준다. 아모스의 북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암 2:2; 3:7, 8; 5:1; 7:10-17) 남쪽의 유다 사람들도 똑같이 하나님 말씀 전함을 싫어한다.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라고 하면서 귀를 막는다 (미 2:6).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거나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2:7)라고 하면서 여호와의 성령, 여호와의 행위, 여호와의 종 곧 선지자가 전하는 말 모두를 거스른다. 거짓말하는 자를 오히려 선지자 취급한다 (2:11). 3:5-8와 6:4가 다 이 주제를 강조한다. 혼합주의에 빠져 있는 백성들은 순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한다. 당연한 현상이다.
버가모교회화 된 한국교회
미가에서 한국교회을 읽는다. 한국교회의 현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혼합주의 신학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미 6:16). 계시록의 소아시아 7교회 중에 혼합주의의 대표적인 교회는 버가모 교회인데, 먼저 북이스라엘이 버가모교회가 되었고, 그에 못지 않게 남유다가 버가모교회가 되었다. 북이스라엘은 아합 때에, 남유다는 므낫세 때에 혼합주의가 그 극에 달하였다. 아합 때에 바알 신앙을 적극 권장하였고, 므낫세 때에 인신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의 진노를 한껏한껏 격발시켰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에 그 버가모교회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미가와 이사야는 남유다가 망하기 좀 전에 그 버가모교회의 모습에서 돌이키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싫어하였다. 시끄럽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혼합주의를 결의하였으니, 사이좋게 지내자 하면서 이것 저것 다 받아들여 창녀들과 몸을 섞었다. 창녀와 한 몸이 된 북쪽 형제가 죽고, 그 다음에는 창녀와 한 몸이 된 남쪽 형제가 거의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 그들은 “발람의 교훈”을 지킨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지 않았는가. “또 행음하게” 하지 않았는가 (계 2:14).
두아디라교회화 된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창녀와 한 몸이 되어가고 있다. 거짓말로 교묘히 속여서 하나님 말씀을 오도한다. 엠디븨 3학년 신학생이 1학년 입학할 때보다 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져야 함에도 오히려 거짓말에 속아 완전 맛이 간 사람이 된다. 예수님의 처녀 잉태, 물위를 걸으심을 믿지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는다. 마귀의 존재가 없다고 한다.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한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말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하던 귀하고 귀한 말인 것처럼 침을 흘리며 듣는다. 칭의는 구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짓말하는 자에게 넘어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오, 그대의 말은 위대하오 하면서 홀린 눈으로 그를 추종한다. 신학교에서 언제부터인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다 (계 2:20). 신학교가 창녀가 되니 거기서 배출된 자가 교회를 창녀로 만든다. 선교지에서 전도하여 창녀 사교 (邪敎)를 만든다. 아모스와 호세아, 이사야와 또 오늘 미가에게서 배우지 못하는 자들이 한국교회의 강단에 설 자격이 있을까.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엇이 임할까. 칼이 임하지 않을까 (계 2:16), 큰 환난이 임하지 않을까 (2:22).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