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태 칼럼
도전, 그리고 도약
도시의 종말?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와 마아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는 여행과 걷기를 통해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했다. 비가 개인 엊그제, ‘관광은 못할지라도 걷기는 하자’는 마음으로 새로 이사 온 집 주변을 산책했다. 굽이 돌아 멈춰선 곳은 버스 두 대가 서있는 곳이었다. 빗물 따라 흘러온 낙엽 쓰레기로 보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을 같은 교민 여행사 소속의 관광버스였다.
불과 두세 달 전의 ‘좋은 시절’에는 바퀴의 움직임에 정비례하여 여러 사람의 지갑을 두텁게 해주며 ‘좋은 대우’를 받았음 직한 고가의 버스 아니었던가? 고국의 손님들을 모시고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하며 곳곳의 명승지와 맛집, 쇼핑센터와 스타시티 카지노까지도 신나게 다니며 삶에 활기와 생기를 북돋워준 관광객들의 듬직한 발이 아니었던가? 여행사의 재산목록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큰 머슴이었던 그 버스도 세월의 야속함으로 길가의 도로 표지만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황혼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많은 사람은 이번 COVID 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뉴욕시를 비롯한 대도시의 사망을 알리는 조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높은 인구밀도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세균배양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직장인들은 굳이 사무실 근처의 인구밀집지역에 거주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원격화상회의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사무실’은 과거의 유물이 될 처지가 됐다는 점 역시 도시의 종말을 논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세계는 자국 중심주의를 선택하면서 고립주의가 강화되고 글로벌 가치사슬도 탈동조화하기 시작했으며 비대면경제가 일상화되면서 모든 국가의 ‘뉴딜’도 미래산업을 향하고 있다. 이처럼 성을 허물고 길을 내는 시대가 끝나고 헨리 키신저의 말대로 중세와 같은 ‘성곽도시’(walled city)가 가까이 오고 있는지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가 단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는 W자 형태로 지속해서 반복될 것이라는 점이다.
도약을 위한 디딤돌!
학교도, 교회도 줌(ZOO), 유튜브 등을 통한 온라인 강의와 온라인 예배가 일상화되면서, 넓은 캠퍼스와 초대형 건물이 로망이었고, 아이콘이었던 것은 이제 옛 시대의 추억이 될 판이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도전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반론이 더 강하다. 하버드대 경제학자인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라는 책에서 1970년대 미국 도시들이 암담한 미래와 마주했다고 지적한다. 국제분업을 가능케 한 세계화와 업무자동화는 방직산업에서 해운업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산업의 몰락을 초래했다. 자동차는 원거리 출퇴근을 용이하게 만든 지금의 줌보다 훨씬 중요한 획기적 신기술이었다. 전화 서비스도 싸고 편해졌다. 하지만 수명을 다한 것으로 여겨졌던 도시는 보란 듯 다시 돌아왔고 금융에서 컨설팅·헬스케어에 이르는 서비스 분야에서 새로운 경제적 생명력을 찾아냈다. 팩스와 이메일, 비디오 콘퍼런스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단순자산을 최대한 활용하며 도시는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재창조했다.
글레이저는 금융과 테크놀로지 산업의 경우 근로자들은 일터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멘토로부터 그날그날의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며 서로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그의 데이터에 따르면 ‘인구 100만명 이상의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생활하는 미국인들은 그보다 작은 대도시 거주자들에 비해 평균 50% 이상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이 같은 관계는 근로자들의 교육 정도, 경험과 직종 등을 고려해도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개별 노동자들의 지능지수까지 감안해도 결과는 같다.
갈림길
팬데믹이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도전 앞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에 따라 추락과 도약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14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는 흑사병으로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중세 작가인 조반니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통해 유럽인들에게 들려준 조언은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받아들어여야 할까?
“도시를 떠나시오. 몇몇 친구들과 격리생활을 하다가 가끔 저녁 시간에 함께 모여 먹고 마시며 흥미로운 담소(중세판 넷플릭스 버전인 셈)를 나누시오.”
그러나 유럽 도시들, 그 중에서도 특히 피렌체가 주도적으로 문예부흥기의 막을 연 것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돌림병이었던 흑사병이 물러간 다음의 일이었다.
그만큼 인간은 적응과 창조에 뛰어난 존재이며,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지식과 지혜는 놀랄만큼 ‘점프’하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를 묶었던 ‘봉인’이 하나씩 해제되고 있다. 거리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차는 막히기 시작했고, 업소들마다 끊어졌던 손님맞이로 즐거운 비영이다. ‘사회적 거리’는 여전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좁혀가며,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도전의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야 할 때이다. 경영학 구루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말을 곰삭여 보자.
“우리의 최종 목표는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잘 관리해서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울, 우리는 울고 싶다?
제발 나만 빼고?
험악한 세상, 이론과 학문으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돌발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아래 명단을 살펴보시라.
링컨, 처칠, 옐친, 루소, 키에르케고르, 헤르만 헤세, 헤밍웨이, 나폴레옹, 간디, 마틴 루터 킹,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모세, 엘리야, 바울, 칼빈, 루터, 존 웨슬리, 찰스 스펄전 ….
위인전 리스트?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하나같이 우울증을 앓았다는 것이다. 이 병은 동서고금, 신앙의 유무, 심취한 학문의 분야, 평생에 쌓은 업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가만히 몰래 찾아오고 있다.
우울증은 남성의 5-12%, 여성의 10-25%나 앓고 있는 병이다. 그래서 이 병을 ‘정신적 감기’라고도 한다. 우울증에 꼭 따라오는 이야기가 자살이다. 우울증 환자의 2/3가 자살을 생각하고 10-15%는 자살을 실행한다. 또 자살 인구의 80%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자살심리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심리는 ‘희망의 상실’이다.
두 사람
20세기 두 걸출한 인물도 우울증을 피해가지 못했지만 대처방법과 결과는 전혀 달랐다. 바로 바로 ‘불굴의 의지와 승리의 아이콘- 윈스턴 처칠과,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다만 파괴될 뿐이다’라고 외친 행동주의 문학의 거장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두 사람은의 빛나는 성취 스토리 이면엔 평생 우울증과 싸우며 자살 욕구에 시달린 어두운 세월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처칠의 우울증은 집안 내력이었다. 아버지도, 아들들도 자살하거나 알코올중독의 길을 걸었다. 26세에 하원의원으로 당선, 소위 ‘소년 급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 안 돼 우울증이 본격적으로 찾아왔다. 거의 폐인으로 자살 일보 직전까지 갔던 그를 구한 것이 그림 그리기였다.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평생을 검정개(Black Dog·우울증)와 같이 살았다. 그러나 내가 하늘나라에 간다면 처음 맞는 100만년 동안은 그림을 그리면서 살겠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정계에 진출해 활약하다 너무 소신에 충실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사실상 은퇴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그를 도와준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가 유럽을 공격,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영국인들은 고집불통이지만 싸움꾼인 처칠을 만 6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총리로 앉혔고,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았다.
그의 우울증은 전쟁 중에도 심각해, 밤낮 일에 몰두하면서도 잠자리에 들어서는 베개를 껴안고 소리 내어 울었고, 새벽녘까지 브랜디를 마시고 일하면서 ‘검정개’와 싸웠다.
종전 직후인 1945년 ‘전쟁 영웅’ 처칠은 총선에서 패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국인들은 평화 시 지도자로서 처칠을 원하지 않았다. 이후 처칠은 무엇을 했을까?
이쯤 되면 시골 영지로 내려가 좋아하는 샴페인에 브랜디, 시가를 즐기면서 편안한 노후생활을 즐기거나, 가끔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설도 해 돈도 벌고, 명예도 즐기는 시간을 가져야 할 텐데, 그럴 수 없었다. 우울증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자살 충동 때문에 배를 타거나, 강가나 호수 주변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몰두할 것이 필요했다. 그림 그리기 외에 택한 것이 ‘글쓰기’였다. 그때부터 자신이 겪은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써서 8년 뒤인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때 그의 나이 79세. 집필 활동 역시 우울증을 이겨 내기 위한 방도 중 하나였다. 이후 처칠은 12년을 더 살고 1965년, 만 91세 나이로 별세했다.
처칠이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땅을 치고 가장 억울한 사람이 헤밍웨이였을 것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작가였다. 역사상 헤밍웨이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은 문필가는 없다. 지금으로 따지면 비틀스나 BTS(방탄소년단)에 못지않은 팬덤(fandom),부, 명예, 사랑을 다 가지고 있었다. 단 하나 갖지 못한 것이 노벨문학상. 결국 그는 처칠이 수상한 다음 해인 1954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도 역시 처칠과 비슷하게 우울증을 유전 받았고 평생 고생했다.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고 아들, 손주도 우울증의 길을 걸었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노인과 바다’처럼 남자답고 모험을 즐기고 도전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지만 내면은 정반대였다. 동료 작가 노먼 메일러는 말한다.
“헤밍웨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내면의 풍경은 비겁함과 자살의 유혹과 싸우는 악몽이었다.”
헤밍웨이가 평소 술을 좋아하고 권투, 사냥, 바다낚시, 사파리 등 거친 스포츠를 즐겼으며 심지어 목숨이 오가는 살벌한 전쟁터를 수차례나 참전한 내면의 동기에는 신경정신증 질환들에서 오는 고통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숙원인 노벨문학상을 받고서 심신이 급격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폭음을 일삼았고 더 이상 짧은 문장조차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우울증의 비옥한 토양일 수 있다. 헤밍웨이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는 없었고 62세이던 해(1961)에 장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갈림길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의 차이다. 처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했다. 세상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담하거나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그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려 했다. 스스로의 약점도 감출 줄 모르는 그의 솔직성은 남을 보는 안목도 탁월해 당시 유럽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마성’을 직관할 수 있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견해,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과도 함께 살 수 있다. 이런 초연함이 그토록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그토록 세계사적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90세가 넘게 장수한 비결로 보인다.
반면 헤밍웨이는 현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려고 했다. 세상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니까 낙담하고 절망하고 분노했고, 향락을 도피처로 삼았다. 자신이 최고라는 교만은 말년에 그가 사람도 싫어하고,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COVID 19 팬데믹으로 우울해지고, 울고 싶은 이때, 처칠의 길과 헤밍웨이의 길, 두 갈림길 앞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송기태 목사 (상담학박사. 알파크루시스대학교 글로벌온라인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