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고린도 전후서의 배경
고린도는 B.C.146년 로마군대에 의해서 폐허가 되기 전까지 그리스의 도시국가로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율리우스 시이저가 고린도의 재건을 명령한 B.C.44년까지 고린도는 한 세기 동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폐허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시이저는 식민도시가운데 하나인 고린도에 로마를 그대로 옮겨 놓기를 원했다. 고린도는 아가야지방 전체의 관리를 위해 원로원에서 파견된 총독이 머무는 도시가 되었다. 그 후 해방노예들이 로마로부터 대거 고린도로 유입되어 정착하였고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시리아인, 이집트인, 유대인 등도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고린도의 배경 때문에 바울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라고 말했을 것이다.
고린도는 그리스남단의 펠로포네소스반도를 그리스 본토에 연결하는 지협으로부터 서남쪽으로 8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지협의 동쪽에는 겐그레아항이 있고 서쪽에는 레카이온항이 있다. 겐그레아항은 고린도로부터 동쪽으로9Km쯤 떨어져있고 레카이온항은 고린도로부터 겨우 2Km정도 떨어져있다. 겐그레아항과 레카이온항 사이에 선박화물의 운송은 소형배의 경우에는 짐을 실은 채로 배를 지협으로 끌어올려서 다른 쪽으로 밀어서 보내는 방식을 취했다. 반면에 대형배의 화물은 다른 쪽에 정박해 있는 배로 옮겨 실었다. 네로 황제가 여기에 운하공사를 시작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19세기 말에 개통되었다. 고린도는 이 두 항구를 관장했고 또 펠로포네소스반도와 그리스본토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지협에 인접해있다. 또한 고린도는 지리적으로 로마제국 전체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동반구와 서반구 모두로부터 몰려드는 상인들로 인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놋 기술공, 도예 기술공, 유리 기술공 혹은 바울과 아굴라와 같은 가죽 기술공들이 고린도에 몰려와 상점을 차렸다. 이들은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기술공들끼리 모여 조합을 결성하여 독자적으로 사무원을 두기도 하였고 다른 세부적인 모임을 만들거나 서로 장례를 돕는 등 활동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대 고린도시의 발굴을 통해서 도시의 중앙에 있는 광장4면중 3면에 걸쳐 수 많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고린도시가 산업과 무역으로 붐비었다는 것을 증언해준다.
고린도는 신흥부자들의 도시였다. 이 도시의 유력자들은 한 도시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었던 전통적인 유지들이 아니었다. 고린도 재건에 참여한 군인과 해방된 노예들의 후예에 해당하는 이들이 고린도에서 큰 돈을 벌어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경험한 뒤, 지역정치에도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었다. 또한 고린도는 새로운 도시였던 만큼 새로운 건물이나 광장을 지어주고 자신의 이름을 비문에 새겨 남기려는 자발적 후견인들을 위한 기회로 넘쳐났다. 이러한 비문들에서 나타나는 대로 명예에 대한 추구와 공적인 인정에 대한 욕구는 고린도전후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자기자랑”이라는 주제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에라스투스 비문에 등장하는 “자신의 비용으로”라는 표현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원받는 것을 거절하고 자비량으로 사역하면서 고린도교회를 섬겼다.
고린도와 같이 번영하는 도시는 후견인을 구하려는 예술가나 철학자들로 붐비기 마련이었다. 고린도의 중앙광장과 통해 있었던 북서쪽 주랑 현관과 남쪽 주랑 현관, 그리고 북쪽의 시장과 교차한 지점에 있었던 북쪽 주랑 현관은 후견인들에게 자신을 보이려는 예술가들이나 철학자들을 위한 활동무대가 되었다. 철학자들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사용된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연설은 그 내용만큼이나 포장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심지어 고전적 수사학 이론가들도 전달, 자세, 목소리, 그리고 무대에서의 동작을 강조할 정도였다. 반면에 도시의 유력한 자들에게 유능한 연사들을 후원하는 일은 자기과시와 체면 유지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도착했을 때 교회 내에서 발생한 분쟁에 대한 중요한 통찰들을 제공한다(고전1-4장).
예술도 고린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중앙광장에서 북서쪽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연극을 공연하는 대형공연장과 음악과 시를 낭송하는 소극장들이 원형계단식 좌석을 구비한 채로 서있었다.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의 모든 주요 도시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고린도의 종교적 장소나 종교적 활동에서도 그리스-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은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바울이 말한 “많은 신과 많은 주”(고전8:5)는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종교와 세속적 삶 사이에 구분이 없었고 교회와 정부 사이에 분리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교회의 모든 측면 뒤에는 그리스-로마의 전통적 종교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신들에게 적절한 예의를 갖추고 그들이 베푸는 호의를 인정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도시의 축제나 이스미아 경기, 각종 모임과 수공업 조합의 저녁식사자리, 심지어 개인적인 저녁 식사자리에서도 예외 없이 하나 이상의 신들과 관련된 종교적 의식이 수반되었고, 진심이든 아니든 이러한 신들에 대한 일종의 예배행위가 모든 삶의 부분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 바울은 그의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마게도냐에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 차례로 교회를 세운 후에 베뢰아와 아테네를 거쳐서 고린도에 이르렀다(행16:11-18: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대략 49년에 시작되었으니까 그가 고린도에 들어온 해는 약50년일 것이다. 바울은 1년반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울의 고린도 선교활동에서 특이한 사건은 그가 여기에 도착하는 즉시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유대인 부부를 만난 것이다. 아굴라의 직업이 바울과 마찬가지로 천막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바울은 손쉽게 그와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의 집에 묵으면서 함께 일하였다(행18:2-3
).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면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 고린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있었던 셈이고, 이들이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되었다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최초로 얻은 그리스도인인 셈이 된다. 어쨌든 이때부터 이들 부부는 바울 선교 활동에 중요한 동역자로 협력하였다.
바울이 그의 제2차 선교활동의 거점을 고린도로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린도는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고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바울과 같은 외래객도 이질분자로 따돌림을 받지 않으면서 활동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그리고 2년마다 열리는 이스미아 경기의 관람객과 치유의 신인 에스쿨라피우스 (Aesculapius) 신전의 방문객이 끊임없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고린도는 천막 짓는 직업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던 것이다. 바울은 그의 고린도 체류가 끝날 무렵에 아가야주의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갈리오 앞에 고발을 당했으나 무죄로 방면되었다 (행18:12-17). 고린도교회는 가정 교회들의 연합이었다. 각 가정교회는 소그룹 모임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집을 소유한 몇몇 유력한 회심자들의 후원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것은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게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유형이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에베소에 있는 조그마한 회심자들의 모임을 위해 자신들의 가정을 개방하였다(고전6:19). 라오디게아와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과 눔바도 각각 자신들의 가정을 개방하여 성도들의 모임장소를 제공하였다(몬1-2; 골4:15). 스데바나의 집도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고전16:15)는 구절로 보아 스데바나의 집에서도 가정교회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고린도의 가정교회들은 가끔 전체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가이오가 “온 교회를 돌보아주었다”는 로마서 16:23의 표현으로 보아 가이오의 집이 전체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고린도교회의 온 회중이 다 모여도 50명에서 100명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가이오가 고린도에서 비교적 큰 집을 소유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이상의 숫자를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작지만 성령의 역사가 왕성했던 교회로 그 구성원들은 성령께서 교회가운데 거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하여 알았고 또 성령의 은사로 채움 받은 것에 대한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고린도교회내에는 가이오와 같이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나 에라스투스처럼 고린도의 재무관(롬16:23)의 지위에 있는 사람도 있었다. 스데바나와 글로에도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자신들이나 교회의 대표단이 당시 바울이 머물고 있었고 후에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던 에베소까지 여행할 수 있도록 경비를 댈 수 있는 재력을 소유하기도 했다. 이 밖에 기술공이나 상인들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소유했겠으나 회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가난한자들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뒤 고린도교회내에 긍정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바울은 교회 상황을 분쟁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고전1:10-11). 이 분쟁은 고린도교회들이 여러 명의 복음전도자들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바울이 떠난 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회심자 아볼로가 고린도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다. 아볼로는 대중연설가로서 높은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행18:24; 19:1; 고전1:12; 3:5-6). 이러한 아볼로의 자질은 고린도 교회교인들의 취향에 부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관행을 따라 바울과 아볼로를 비교하면서 이들 각자의 장점을 내세웠고 결국 자신들이 선호하는 복음전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이루게 된다.
공동체 내부의 경쟁, 자기과시, 그리고 이로 인한 분열은 교회의 다른 부분까지 확대되었다.
첫째, 우상에게 바친 동물의 고기를 먹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강한 자”와 “약한 자”사이의 벽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둘째로 계층간의 구분을 따라 발생한 분열은 성만찬을 기념하는 의미 마져도 손상시켰다. 교인들간의 사회적 계층차이가 성만찬 자리에서도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셋째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공동체 전체를 세우시기 위해 주신 영적인 은사마저도 경쟁과 자기 과시의 재료로 사용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공동체의 삶속에서 “덜 귀하고 부족한 지체”들을 배려하고 귀히 여김으로써(고전12:23-26) 공동체 전체의 일치를 도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제 바울은 몇 차례의 서신들을 통해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을 바른 신앙가운데 세우기 위해 힘쓰게 된다. 두 주에 걸쳐 이것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