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데살로니가 후서 개관: 종말을 사는 주의 백성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를 써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변화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대개 세 가지 문제였다. 첫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외부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듯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를 향한 핍박을 데살로니가 전서를 기록할 때보다 더 강도 있게 표현한다. “모든 박해와 환란”(1:4)이라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다양한 핍박을 의미할 뿐 아니라 강력한 핍박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번째 상황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사설의 위험에 봉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사설은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흔들거나 두렵게 할 위험한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 아직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 사설은 내용에서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방식에서도 위험하였다. 이 사설은 세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 받았다는 편지로”(2:1)였다. 사설을 퍼뜨리는 미혹자들은 예수의 재림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영적인 체험을 근거로 삼았고 설교로 자신들의 주장을 확립시키려고 할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을 사칭한 편지를 사용하기도 했다. 세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게으른 자들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무위도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임박할 재림 기대로 자신들의 생업과 절도 있는 삶의 방식을 방기한 사람들이 문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란과 사설과 나태 앞에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내용>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박해를 견딜 때 신앙을 유지할 것을 권면한다. 이 박해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의 날의 임재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졌음을 지적하고 2:1-12에서 이러한 생각을 바로잡아준다. 그 다음에는 믿음 안에 견고히 서라고 권면하고 그들이 용기를 얻도록 기도한다(2:13-17). 이어서 바울 자신과 실라와 디모데가 사역에 충성하며 박해자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3:1-5). 곧이어 데살로니가 전서 4:11-12에서 언급했던 게으름의 문제가 악화되었으므로 바울은 그 주제에 대해 장황한 권면을 시작한다(3:3-15). 이 서신은 간단히 소원을 비는 기도, 바울이 친필로 그 편지를 썼다는 확인, 그리고 은혜를 기원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3:16-18).
<개요>
- 서론 : 인사말과 함께 박해를 견디며 신앙 유지할 것을 권면(1:1-12)
- 주제문 : 주의 날이 도래하지 않았으며 진실한 신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2:1-2)
- 바울의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2:3-19)
① 첫번째 증거: 주의 날은 도래하지 않았다(2:3-12)
② 두번째 증거: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을 기대하면서 소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다(2:13-17)
4. 권면(3:1-15)
① 기도 권면(3:1-5)
② 게으른 자들과 관련된 권면(3:6-15)
5. 맺음 말(3:16-18)
<주요 메세지>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회가 성도들에게 수치를 주는 방법으로 그들을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도록 압박하는 것에 대해 신앙적 충고를 준다. 바울이 회심한 성도들을 괴롭히는 자들의 운명에 관해 크게 강조한 것을 보면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성도들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의 큰 이슈인 교리적 문제(2장)나 게으른자의 문제(3장)를 언급하기 전 그들을 믿음 안에서 안정시킬 필요성을 크게 인식했다. 그래서 서신의 서두부분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주지시킨다. 다시 말해 그들이 믿음의 인내가운데 박해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며 믿음을 견지하는 것이 누구의 눈에 명예롭게 비치고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즉, 그들의 그러한 견고한 신앙자세와 삶의 모습은 하나님과 여러 지방에 퍼져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로부터 각별한 명예를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1:3-4). 그들이 기억할 것은 사람에 대한 평가에서 하나님의 평가가 가장 중요하고 치명적이란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세대에서가 아니라 심판 때에 힘을 발휘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현명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명백하게 사회속에서 냉대와 모욕 또는 거절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수치스럽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명예에 합당한자들로 서가고 있느냐이기 때문이다(1:5). 따라서 경건치 못한 자들로부터 오는 반대를 견디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성도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을 함을 먼저 알아야 한다. 박해속에 인내하면서 자신을 훈련할 때만 정금 같은 신앙인으로 빚어지고 하나님의 명예에 합당한 모습으로 세상속에 선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류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에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도 평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부류들은 결국 그들의 행동에 대한 결과물로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1:6-7) 데살로니가 교회성도들은 사회적 압박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움츠려들지 않고 결연하게 복음에 합당한자의 모습으로 설 것을 권면한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격려한 후에 바울 사도는 2장에서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일부 성도들의 오해를 수정해 주기를 원한다. 전 편지인 데살로니가 전서5장에서 바울 사도는 임박한 재림을 가르치면서 주님의 재림이 다가옴을 아는자들로서 합당한 생활을 당부했었다 (살전5:7-8). 그들의 영적 체험이나 바울을 사칭한 편지 등으로 인해 역사의 끝이 이미 이르렀다고 생각하면서 큰 혼동에 빠졌을 것이다. 사태를 잘못 파악한 성도들 중에 일부는 일터를 떠나거나 그들에게 남아있는 사회적 관계 마저도 모두 끊고 광신적 집단으로 변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러한 행동들은 주류사회의 눈에 천박한 모습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종말론적 기대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성도들은 일을 그만 두고 이 악한 세대의 마지막 몇 주나 몇 달을 신앙공동체의 지원에 의탁하면서 보내려고 했던 것 같다.
종말에 대한 이러한 곡해의 근원이 무엇이고 어떤 큰 문제를 만들어냈든지 간에 바울은 주의 날이 비록 가까이 오긴 했으나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주지 시키려고 글을 쓴다(2:1-2). 그날의 임박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바울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기본적인 일들을 거론한다. 즉,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배교”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나타나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함을 주지시킨다. 이 불법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신을 신이라고 내세우는 자이다. 그런데 이 불법자의 출현은 현재 “억제하는 자”에 의해 저지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직 불법자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억제하는 자”조차 물러가지 않았으니 주의 강림은 지금 당장 박두한 것이 아니라 한참 더 기다려야 함을 알린다. 다시 말해 이러한 논증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종말론적 열광을 잠재우고 이와 함께 임박한 재림기대 때문에 절도 있는 생활을 방기한 사람들을 그들의 본업과 일상적인 삶속으로 되돌려 놓고자 이 글을 쓴 것이다.
이것은 곧 바울로 하여금 연관된 문제로 눈을 돌려 글을 쓰게 한다. 성도들 중에 게으르게 행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 대한 보고가 바울에게 이르렀다. “게으르게”라고 번역된 단어는 “무질서하고 훈련되지 않은 방식으로”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대열을 제대로 따르지 아니하는 군사들에게 사용된 군사적 은유이다. 바울 사도는 이들을 단지 게으른 사람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기독교 공동체의 고상한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들로 묘사한다.
이들이 왜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이 더 가난한 사람이 더 부유한 사람의 후원을 얻으려는 관습에 배경을 둘 수도 있고, 또는 주 후 51년에 발생한 그리스지역의 흉년에 의할 수도 있지만 문맥상 종말론에 대한 혼동 때문에 일부 성도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볼 수있다. 이들은 오늘날의 종말론적 열광주의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직업을 그만두고 옥상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을 것이다.
이 같은 행위의 동기가 무엇이든 바울 사도는 그러한 행위가 기독교적 가르침과 바울의 실례와 반대된다고 역설한다. 바울은 교회의 재정지원으로 사는 사도로서의 권리를 버리고 대신 생계를 위해 밤낮으로 수고 했던 것이 아닌가? 바울은 따라서 게으른 자들의 행위가 야기하는 치명적 결과를 나열한다. 첫째, 게으른자들은 직업에 종사하지 않음으로 남는 시간을 다른 사람들의 일을 방해하는데 사용했다(3:11). 둘째, 그들의 일 거부는 관대한 형제자매들에게 부당한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 더 나아가서 그들의 행위는 불신자들과 “이방인”의 빈축을 샀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대단한 위험요소였다. 1장에서 바울은 외적인 핍박을 거론했지만, 3장에서는 그 보다 더 위험한 내적 위험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직업과 맡은 일에 대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여부가 세상으로부터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를 유도하는 현실적인 잣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로부터의 핍박과 의혹이 크면 클수록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 자신이 사회에 악영향을 주거나 아예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모범을 제시할 시대의 대안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 여러 방면에 있어서 기독교의 행위 윤리가 중요시되는 시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종말을 사는 우리들의 삶의 태도를 보아야 우리가 허망한 것을 좇는 존재들이 아님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작금의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데살로니가 후서 1장에 등장하는 박해의 상황에서 위기를 맞이 한 것이 아니라 3장에 나오는 종말을 사는 성도로서의 믿어 봄직한 모습의 부재에서 야기되고 심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광적인 종말론자가 되지 않고 교리적으로 이탈하지 않은 고상한 신앙체계를 가졌다고 바른 종말론신앙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구별된 존재다움을 삶속에서, 특별히 직업 현장속에서 증명할 때 우리는 지금 한국사회로부터 받는 의혹과 냉대에서 벗어나 시대의 대안이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말에 서있고 그 기독교적 종말사상이 참되다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시대속에 스며들게 하여야 할 것이다. 밤낮 일하면서 작업현장속에서 복음의 생명력을 뿌리내리게 했던 바울의 현장속의 선교가 더욱 필요한 시대이고 이러한 고결한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제안되어있다. 이것을 깊이 자각할 때만 우리 스스로 종말을 사는 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