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디도서 개관 – 교회여 공공의 복음을 회복하라!
<상황>
디도는 바울의 의견에 따라 지중해의 한 가운데 있는 그레데(크레타)섬에서 목회를 하였다. 사도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섬에 떨어뜨린 이유는 그레데에 있는 교회들에서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장로들을 세우기”(1:5) 위함이었다. 그곳에는 “거슬러 말하고”(1:9), “대적하고”(2:8), “이 단에 속한 사람들”(3:10)이 있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것”(1:10)이었다. 이러한 언행은 그레데섬에서 출신한 이방인들에게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레데섬에 이주한 유대인들에게도 두드러졌다(1:10). 일단 방향을 잃어버리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똑 같은 현상을 빚어내고 마는 것이었다. 이 같은 대적자들로 말미암아 결국 무서운 일이 발생했다. 대적자들은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사랑과 신뢰로 엮어져 있던 가정들에게 불화와 갈등을 불러일으켜 성도들의 온 집들을 엎어버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1:11).
또한 이들의 삶은 이중적이었다. 이들이 유대적 신화와 헬라적 환경에 젖어있음과 동시에 그레데섬의 잘못된 정서도 지니고 있었다. 그레데섬은 이미 1세기까지는 “강도와 해적의 출몰지”로 유명해져 있었고 “그레데인 처럼되다”는 자신들이 제우스의 무덤을 가지고 있다는 그레데인들의 주장으로 인해(물론 제우스는 신으로서 죽었을 리가 없다) “거짓말하다”의 헬라어 동의어가 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그레데 교회 공동체는 지역 교회에 적절한 지도자가 없어 생긴 연약한 면이 있고 질서 있게 할 만한 지도체제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 따라서 그레데섬 교회의 목회자 디도는 성실히 일할 직분자를 세워야 했다.
<수신자>
디도는 디모데만큼 바울과 친근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바울이 크게 신뢰하는 동역자였다. 디도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할례 받지 아니한 그를 회심자로 받아들이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케이스로 바울과 바나바의 예루살렘 방문에 동행한다(갈2:1-3). 그 후 디도는 바울과 고린도 회중과의 관계에만 등장한다. 디도는 바울의 눈물 어린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전달하며 그들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다(고후2:12-13; 7:5-7). 또한 그는 고린도 교회의 헌금과 관련된 일을 맡는다(고후8:6,16-17,23; 12:18). 확실히 디도는 미묘한 문제와 관련된 일을 맡을 만큼 신뢰를 받는 동역자였다. 사도행전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디도는 바울 서신에서 바울의 측근으로 자주 언급된다. 바울이 그에게 부여한 권한이 그를 그레데섬에 세웠으며, 그는 “남은일”(1:5)을 정리해야 했다. 그레데 문화는 도덕적 타락으로 유명했는데 따라서 디도의 임무는 쉬운게 아니었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디도의 멘토로서 그의 사신에게 부여한 그레데에서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권면한다.
<기록 장소및 연대>
기록장소와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디모데전·후서의 경우처럼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기록된 대로 로마감옥에서 석방된 후에 다시 선교사역을 했을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다시 수감된 것을 전제하는 반면 디도서는 활동적인 선교 사역시기에 기록된 것 같다. 따라서 기록장소는 알 수 없고 기록시기는 디모데 후서보다는 이르고 디모데전서와는 거의 같은 시기인 60년대 초 중반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개요>
- 문안인사 (1:1-4)
- 교회내의 다양한 그룹들에 대한 지침들(1:5-2:15)
(1) 장로들에 대하여(1:5-9)
(2) 거짓교사들에 대하여(1:10-16)
(3) 다양한 연령의 남성들과 여성들에 대하여(2:1-8)
(4) 종들에 대하여(2:9-10)
(5) 결론적인 근거 제시(2:11-15)
3. 결론적 권면들: 선한 것을 행하라(3:1-11)
4. 끝맺는 말(3:12-15)
<내용>
서두의 문안인사에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약속하시고 미구에 실현되도록 하셨음을 상기시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바울은 그레데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디도를 그곳에 남겨 두었는데 이제 그에게 각 성에 장로를 세우라고 명령하면서 그 직분을 맡는데 필요한 자격에 대해 이야기 한다(1:1-9). 그레데에는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바울은 그들을 조심하라고 디도에게 경고한다(1:10-16). 그는 구체적으로 젊은 여자들과(2:3-5), 젊은 남자들(2:6-8), 그리고 종들의 행동(2:9-10)에 대해 교훈한다. 신자들은 “크신 하나님 우리구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을 기다리며 바르게 살아야 하고(2:11-15)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3:1-2). 또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생활방식과 그들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따르는 선한 생활에는 차이가 있어야 하며(3:3-8) 어리석은 분쟁을 피해야 한다(3:9-11). 이 서신은 다양한 사람들에 관한 교훈과 작별인사로 끝맺는다(3:12-15).
<주요 메시지>
본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디도서는 그레데섬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이다. 그곳에는 교회를 파괴하려는 거짓선생의 준동이 있었고 또한 기독교 복음에 반대되는 세속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레데 교회가 견고히 세워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즉 거짓교훈과 세상문화에 대항해야 했다. 첫째로 거짓교사들은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서 교인들의 집들을 온통 엎어뜨렸다(1:11). 이들의 거짓교훈에는 유대교의 요소가 있었다. 그들은 할례당에 속해 있었고(1:10)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를 가르쳤으며(1:14) 어리석은 변론과 율법의 다툼에 착념했다(3:9). 그레데 교회는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해서 바른 기독교진리를 보존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것이 교회 내에서 힘써야 할 첫번째 영역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위기는 단지 교회내적인 문제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회전체가 기독교복음과 배치된 문화로 채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을 위하는 거짓말쟁이라”(1:12)라는 속담과 같은 표현이 말하는 것처럼 그레데 지역은 비기독교적인 문화가 팽배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그레데 교회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교회 안에서도 도전적인 적대세력들이 활개치고 있고 교회 밖에서는 복음을 배격하는 문화의 탁류가 거세게 흐르는 가운데서 과연 그레데 교회는 대내외적으로 어떤 대응을 해야 했는가? 사도 바울은 먼저 교회를 견고히 세우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에 전념하게 하지만 아울러서 그 교회의 일반성도들이 어떻게 당시 그 사회에 거룩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디도서가 목회서신이라 해서 목회자들에 관한 것만을 쓴 것이 아니다. 교회 직분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조차 바울은 행정조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의 모범이 될 만한 자격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 복음적 가치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교회의 직분자가 돼서 교회를 교회답고 견고하게 세우는 사역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또한 디도서 전반에 흐르는 권고는 그 시대의 그레데 지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사회를 주도하는 존재들로 서라는 것이다. 늙은 여자는 술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고(2:3)(아마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술에 흥청거렸던 것 같다). 종들은 상전것을 떼어 먹지 말고(2:10)(경제적 불의를 행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권세 잡은 자들에게 순종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훼방하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한다(3:1-2)(악한 일을 행하며 선한 일을 훼방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사도바울은 이런 사회 상황속에서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 얼마나 많이 여러 번 모인다거나 얼마나 열정적으로 예배 드린다거나 등을 이야기하기 보다 바른 교훈 위에 서서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선량한 시민으로 설 것을 권면함을 보게 된다. 이것이 중요하다. 공공의 복음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들끼리 교회에 열심히 모이면서도 세상과 소통하면서 이끌어갈 소명을 확인하지 않은 채 그들만의 왕국을 세워 나아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종교적 열심일 뿐이다. 바울은 그레데 교회성도들이 당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어서 시대를 변모시키는 선한 세력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렇듯 신앙은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바울 사도는 장로와 집사를 세우므로 인해서 교회 내부를 견고케 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울러 그레데 교인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사회속에서 참된 본분과 도리를 모범적으로 보여줌으로 인해 책임 있는 사회구성원이 될 것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큰 교훈을 준다. 만약 우리 한국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있어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책임 있는 존재로 자기 인식을 하지 못하고 그저 나중에 천국 가고 이 땅에서는 세속적 축복을 탐하는 집단과 무리로 낙인 찍힌다면 이 세상은 과연 우리에 대한 희망을 유지할 것이겠는가? 왜 한국교회 성도의 수가 감소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는 심각한 상황에 도달했는가? 한국 교회가 공공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삶으로서 우리 당대의 사회로부터 책임 있는 존재로 인정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이 세대속으로 침투하며 복음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한국 기독교는 디도서에서 바울 사도가 제시한 것처럼 문화적으로 시대에 청정한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일까? 또한 경제적 정의를 이루는 일에 앞장서왔고 공정하게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만져주는 민주적이고도 애정 깊은 정치력을 추구함에 앞장서므로 인해 신앙의 공공성에 주력해 왔을까 돌아다 볼 필요가 있다. 한국 기독교 신앙은 식사시간에 기도를 한다거나 술, 담배를 금하는 개인의 사사로운 경건 영역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 하지만 정치 상황속에서 어떻게 기독교 정신을 구현할지에 대한 공적인 고민은 거의 시도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기독교 기업인들이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갖으면서도 실제 상황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버리고 자본의 논리에 짓눌려 여느 기업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착취하고 세금을 탈루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불공정한 거래를 한다는 소식이 연일 끊이지 않는다. 교회도 교회대로 예배에 잘 참석하고 헌금을 잘 드리면 이른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 세상문화가 혼탁하게 흘러가도 우리는 교회라는 외딴섬에서 개인적 신앙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로부터 책망 받으며 개선되기를 훈계 받는 그레데 교회의 상태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데 교회가 바울 사도의 권고를 받듯이 이제 우리 한국 교회도 성경의 교훈에 더 진실한 태도를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는 환골탈태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복음은 사사로운 경건의 영역일뿐 아니라 사회를 선도하는 공공성이 있다. 이것이 기억되고 간직될 때 우리는 교회뿐 아니라 세상도 포기하거나 방치할 곳이 아니라 우리의 적극적 참여로 인해 하나님의 통치가 선포되고 주님의 영광이 구현되는 공간이 됨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사로운 경건에서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공적인 영역에 복음이 침투하도록 접근하는 태도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때야 비로서 우리들은 세상의 희망으로 나설 수 있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