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디모데후서 – 시대를 섬기는 자세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목회서신 중 하나이지만 무언가를 지시하는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임박 하다고 느끼고 있던 바울이 보낸 개인적이고 친밀한 격려의 편지란 점에서 디모데전서나 디도서와는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 즉 유언의 성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사적인 내용의 편지이다.
<상황>
바울은 다시 한번 감옥에 갇혀있는데 아마도 로마에서의 두번째 투옥으로 이번에는 주후64년부터 68년사이에 발생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대학살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디모데후서가 기록된 정황은 사도행전28장에 나오는 가택연금 때보다 훨씬 심각했다. 이제 그는 문자적으로 족쇄에 매여있고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1:16-17). 교회 전승은 바울이 오늘날에도 그 폐해를 볼 수 있는 고대기준으로도 비참한 지하감옥인 마메르틴(Mamertin)감옥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바울은 재판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4:6-8) 천국으로 구원되기만을 기대하며 이 편지를 기록한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현장에서 물러나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한 격려와 가르침을 준다. 디모데가 사역한 교회에 무슨 일이 발생했을까?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대표로 하는 그룹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말로 말미암아 교회를 어지럽혔고(2:14) 망령되고 헛된 말로 경건하지 아니함으로 나아갔다(2:16). 이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교회의 일군이 되기를 거절하고 진리의 말씀도 멀리하였다. 그들은 사도바울이 전한 진리를 허물었으며(2:18) 부활이 역사적으로 이미 성취되었다고 말함으로 이들의 거짓된 주장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주장에 말려들지 말도록 충고할 필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후서에 나오는 교회에는 말세의 현상이 두드러진 사람들이 있었다(3:1-4). 그들은 이기적이고 물질적이며 비도덕적이고 비영적이었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것이었다(3:5).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들이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들은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당시 교회의 구체적 상황과 교회사역을 이어받는 후계자인 디모데에 대한 일반적 교훈을 위해 펜을 들어야만 했다.
<기록 연대 및 장소>
바울은 자신의 삶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이 서신을 기록했다. 그가 사용하는 “변명”이라는 단어는 종종 법정에서 변호할 때 사용되는 언어이다(4:16). 그러므로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처형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두번째 로마감옥 생활기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바울이 주후67년에 순교했다는 유세비우스의 견해에 따른다면 디모데후서는그 해나 일년 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이 64년이나 65년에 처형되었다고 생각하므로 이 서신도 그 즈음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개요>
- 도입적 사건들 (1:1-18) .
(1) 문안 인사(1:1-2)
(2) 감사와 신실함으로의 부름(1:3-14)
(3) 믿을 수 없는 동역자와 충성된 동역자(1:15-18)
2. 믿음이 요청하는 헌신(2:1-26).
(1) 고난을 견딤(2:1-13)
(2) 인정받기 위해 열심을 다함(2:14-26)
3. 불신앙의 묘사와 반박(3:1-17)
(1) 마지막 날의 타락(3:1-9)
(2) 타락에 대한 해독제(3:10-17)
4. 마지막 당부(4:1-22)
(1) 말씀을 전하라(4:1-8)
(2) 개인적 사안들(4:9-18)
(3) 마지막 인사(4:19-22)
<내용>
디모데후서는 전형적인 인사말과 감사로 시작되며(1:1-7) 뒤이어 디모데에게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당부가 나온다(1:8-12) 여러 동역자들을 비교한 후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독교사역의 속성을 군인, 운동선수, 농부 등 세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친다. 각 비유는 주의 종이 지녀야 할 적합한 성품에 관해 가르치기 위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2:1-7). 바울은 기독교사역에 대해 일꾼, 다양한 도구, 종 등의 세가지 비유를 추가로 제시한다(2:14-26). 그 후 추가당부, 최근 소식, 끝맺는 인사로 편지를 마무리 한다(3-4장).
<주요 메세지>
디모데후서는 사도시대와 속사도 시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땅에 단 한번 있었던 사도시대를 마감하고 사도이후시대의 교회를 세워나감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과 원리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젊은 후계자 디모데에게 어떤 상황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가? 세상을 직시하고 복음이 대면한 현실을 바로 파악하라고 권면한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지난호인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이 세상의 사회질서나 덕목에 부합하는 행동을 함으로 인해 불필요한 비난이나 오해를 피할 것을 권고했다. 세상권세와 세상의 보편적인 선에 대해 인정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우리도 인정받을 수 있고 세상과의 소통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가지 더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과 일치점을 발견하려 하고 대화채널을 유지하려 해도 기독교복음에 적대적인 사회와 영원한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위한 삶에는 힘든 고통과 어려운 상황이 동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을 나눠주고 고결한 삶을 살았지만 투옥과 매임을 수 차례 당했고(2:9)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있을 것임(3:12)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삶의 절대기준인 성경에 근거해서 참된 경건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주변 세상으로부터 유 무언의 따돌림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 시대를 풍미하는 “성공과 탐욕과 높아짐의 철학”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반문화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탐욕이 탑재된 인간의 의견과 사회적 가치관은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 고결함과 함께 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 커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낮아지고 자신을 드려 의를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정한 태도로 수용할 수 없다. 경건함은 이 땅에서 박수 받기 보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삶의 방식이라고 배척 당한다. 우리는 먼저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공동선의 길을 걸어야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선포하고 따라가는 복음의 길은 박수가 아니라 박해와 비난의 길이었음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따라 살아갈 때 이 세상에 뿌리내려야할 기본적 선에 대해 세상은 수긍할 지 몰라도 복음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이 세상임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인간적 수단으로 인정될 수 없고 항상 세상으로부터 배척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성도들의 성별 되지 못하고 분별력 없는 태도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배척 받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명백하게 우리는 세상사람들의 평균적인 윤리적 도덕적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 품격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우리의 도를 증거하는 데에 힘을 보태줌도 안다. 그러나 복음의 순전한 외침을 마음에 간직하고 복음의 참된 능력이 이 땅을 진정으로 회복시킬 것을 믿고 그 길에 투신하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박수 받는 다른 기대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윤리기준을 높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사도 바울과 성도들에게 다가왔던 복음에 대한 세상의 통제장치가 지금도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복음 때문에 고난 받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1:18)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 정당한 성도의 발걸음이 된다.
결국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순되게 반응하며 우리를 거절하는 세상속에서도 복음에 감격해 살고 복음의 능력이 확장되는 사역의 현장에 투입되어 과감하게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확대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된다. 복음에 대한 통제장치가 견고한 세상속에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또 한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사역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충실한 계승자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2:2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여기에는 복음을 접하고 가르치는 네 세대가 언급된다. 바울-디모데-충실한 교사들-다른 사람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복음이 지속적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복음으로 살아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세계기독교 역사에서 찾지 못하는 부흥을 이루었는가?맞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 이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땅의 모든 지역교회들은 항상 잠재적 소멸로부터 몇 세대 떨어져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바울 스스로가 복음을 전파하였던 수많은 공동체가 있었던 오늘날의 터키지역보다 이 사실을 더 선명히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 그곳에서 공격적인 무슬림의 활동이 1300년 이상 지속된 후에 기독교는 바울이 원래 선포했던 모든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소수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호주안에서의 교회들의 잠재적 소멸을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말씀에 대한 헌신을 보였던 세대가 사라지고 복음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사람들이 시대에서 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견고케 하고 그 말씀이 우리 삶을 통해 세상에 흘러 들어가게 하는 책임 있는 헌신이 사라지고 세상적 가치관에 동화되고 순응하는 존재가 되어감으로 하나님 말씀과 능력이 주는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신앙이 슬그머니 소멸될 때 무엇이 나타남을 경험하게 되는가? 또한 우리의 삶을 통해 다음세대로 하여금 경건의 훈련에 돌입하게 하는 일에 소흘히 하거나 실패할 때 과연 우리는 다음세대에 꽃피는 복음의 능력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사도바울은 자신에서 시작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디모데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흘러 들고 또 다른 사람들이 복음으로 전염되어 세상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기를 원했고 또한 그렇게 했다. 은혜를 의지했지만 은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당대에 할 수 있는 책임 있는 행동을 실천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혜 베푸심을 갈망하며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은 존재로서의 책임 있는 삶과 헌신으로 인해 복음이 이 땅에 충만히 스며들게 하기 위한 뼈를 깎는 분투를 동반하며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몸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만 신실한 믿음의 다음 세대를 향한 전승이 일어나고 다시금 세계를 향한 한국교회의 복된 사명을 회복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책임은 항상 함께 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를 섬기는 우리의 마땅한 자세일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