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마태복음 개관 – 제자도를 실천하는 의의 공동체
마태복음은 초대교회시절부터 교회가 가장 애용하던 복음서이다. 초대교부들의 설교집이나 변증서에는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더 많은 마태복음구절들이 인용되었다. 또한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더 많은 주석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간결한 형태가 인용하기 쉬웠던 점도 있지만 그 내용이 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하는데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특징, 교회의 모체가 되었던 유대교와의 차이점과 연속성,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연결에 있어서 마태복음은 더 없이 좋은 복음서였다.
<저자>
다른 정경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도 복음서의 저자가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작자미상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에서 주님의 제자였던 마태를 저자로 인정한다. 최초로는 사도요한의 제자였던 파피아스가 그의 책 ‘주의 말씀에 관한 해석’에서 마태의 저작을 주장한다. 이런 외적 증거 외에 몇 가지 내적 증거가 있다. 마태는 세리였다(마9:9).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서(마22:15-22) 마가와 누가가 데나리온이라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반면 마태는 보다 정확한 용어인 노미스마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만이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를 내는 기사(17:24-27)를 다루면서 본 복음서의 저자가 전직 세리로서의 전문성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기록연대 및 장소>
마태복음 24:2에서의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나옴으로 성전멸망의 해인 A.D.70년 이전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기록장소는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본다. 마태복음이 유대교와 이방인의 관심을 결합하는데, 안디옥은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자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였고 또한 17:24-27에 나오는 공식적인 화폐의 명칭을 스타테르라고 불렀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 안디옥과 다메섹 뿐이기 때문이다.
<구조>
마태복음은 기본적으로 다섯개의 주요 설교(강화)들과 일곱개의 이야기들로 정교하게 교직 되어있다. 각각의 사건들 가운데 5개의 설교들인 5-7장(산상설교), 10장(파송설교), 13장(천국비유설교), 18장(교회질서설교), 23-25장(종말설교)들이 배치된 형태이다. 또한 연대기족, 지리적 이동도 구조의 중심을 이루는데 연대기적으로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전도명령으로 끝난다.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는 유대(1:1-4:11), 갈릴리(4:12-13:58), 북부갈릴리(14:1-16:12),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16:13-20:34), 예루살렘(21:1-28:20)으로 이동하고 있다.
<저작 목적>
마태복음을 기록할 당시 마가복음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펜을 들었다. 그는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와 교회를 지도하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성장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집필동기를 가졌다. 당시 교회내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공존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선배격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당면한 관심에 대해 답해 줄 필요성이 있었다. 독자의 주대상이 유대인 그리스도인 이었으므로 마태는 경문과 옷 술을 착용하는 등의 몇몇 유대관심들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마15:1-2,23:5등). 또한 율법의 정당성에 관한 마태의 강조는 회심한 이방인들보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익숙한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하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시고 완성하신 메시아가 되시는가에 대한 답변이 필요했다.
그래서 특별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맞서는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그들이 구약에서 예시한 합법적인 상속자들이며 구원사의 중심에 있음을 알려주고 증명해야 했다. 이런 연유로 마태는 예수님을 구약에 나타난 희망의 중심이자 절정이신 분으로 소개한다. 마태는 마가의 증거 위에 예수그리스도야 말로 이스라엘의 희망을 실현하신 분이요 구약성경의 유산을 구체화한 인물로 그리면서 예수님과 그 이름으로 형성된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당시에 군사적 영웅을 기대하는 많은 메시아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고 다시 살리신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구세주임을 논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 사건을 설명할 때 구약을 많이 사용한다. “말씀의 성취”(1:22 ; 2:15,17,23 ; 4:14….20:54 ; 27:9), “기록되었으니”(2:5 ; 4:4,6,7 ; 11:10 ; 21:13….), “성경(구약)에 말하기를”(21:42 ; 22:29 ; 26:54,56….), “율법”(5:17,18 ; 7:12 ; 11:13 ; 12:5….23:23)
따라서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구약의 약속과 하나님의 뜻에 아주 가까이서 있으니 예수님을 믿을 만한 구원자뿐 아니라 믿을 만한 율법교사로 알고 따를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율법의 완성자로 소개함으로써(마5:17) 예수님을 따르는 그들은 성스러운 전승으로부터 이탈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비기독교 유대인들이 따르는 길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임을 주지시킨다. 당시에 기독교의 적대적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속이던 자”라고 하고 예수님의 삶을 “속임”으로 폄하했는데(마27:63-64)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약성경의 본질과 일치하고 있음을 여러 시각에서 서술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임을 분명히 가르치기 위해 많은 구약성경의 본문들을 인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단순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세우는 데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 깊이 포함이 되어있음을 깊이 깨닫게 한다. 사실 그 당시에 교회의 다수가 된 이방인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마태는 서두인 족보에서 아브라함을 먼저 이야기 하는데 아브라함은 “모든 족속에서 하나님의 복(복음)을 전파할 자”(창12:3)가 아닌가? 마태는 복음서를 통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종적 특권을 상대화시키고 모든 만백성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제시한다. 너희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원대하신 구원 계획에 포함되어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시작인 족보이야기에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모두 이방인들이 아닌가?(다말은 고대 유다 문헌에 아람인으로 묘사되고, 라합은 가나안 사람, 롯은 모압사람, 밧세바는 우리아와 같이 헷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 때 방문했던 박사들은 이방 세계의 거짓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한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4:12-16에서 가버나움을 사역의 본거지로 삼으심으로 “이방의 갈릴리”에 빛을 비추실 명백한 의지를 표명하신다(이사야9:1-2).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27:54)라고 고백한 사람은 다름아닌 이방인의 대표인 로마 백부장이 아니었던가? 또한 이러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하신 대위임령인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에서 극치를 이루게 된다. 마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견고히 세워줄 뿐 아니라 그들의 소명이 전세계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임을 마음속에 심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반열에 물밀듯이 들어오는 사건을 이해했다면 구약에 등장하고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던 율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율법은 구약적이기 때문에 무시해도 되는가? 아니면 새로운 틀에 의해서 해석되고 완성되어야 하는가? 마태복음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민감한 그들을 위해 다른 복음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율법을 등장시키고 평가하고 적용시킨다. 새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특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어떤 존재인가? 필연코 그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주제였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마태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정으로 성취되고 완성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율법의 대체자가 아닌 율법의 성취자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심은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지 말되 중요한 것은 그것의 문자적인 적용이 아니라 사랑의 동기에서 행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바리새인들과 대조가 되었다. 당대 유대교의 대표자들인 바리새인들은 해석학적 열쇠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들의 목표는 예수님과 같이 거룩함이 있지만 그들은 “분리”를 통해 그것을 이루려 했고 반면에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을 통해 거룩을 이루려 하셨다. 이런 면에서 마태복음은 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부에 존재되었는지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와 율법의 완성자 되신 예수님의 삶을 통찰함으로 그들을 경건하고 진실한 공동체로 세우기 위해 역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그렇다면 이렇게 구원의 완성자요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을 마태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제시하는가?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소개한다. 사실상 예수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구약성경을 성취하시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과 모세를 평행선에서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헤롯이 예수님 탄생 당시 두살 아래의 남자아기들을 죽이려 했던 행위를 보며 유대 기독교인 독자들은 출애굽기1장의 남아 살해사건(모세가 관련된)을 기억했을 것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설교를 5번 실은 것은 아마 구약의 모세5경을 염두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산상수훈을 주신 사건(마5-7장)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장면을 상기시킨다. 마태14:23에서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기적은 출애굽기14:15-31의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연상케 하지 않겠는가? 또한 마태15:29에서 4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광야에서의 만나를 겪은 기적을 상기 시킨다. 왜 마태는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도 제시했는가? 모세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셨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와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설교하기 위해서이다. 마태는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제시함으로써 그분께서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죄의 포로 된 우리들을 해방시키셔서 자기 백성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강력하게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초대교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특별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면서 마태는 그들을 따르는 존재들로서의 우리의 제자도와 의를 강조한다. 마태복음에는 “의”라는 단어가 26회 등장한다. 마태복음에서 강조되는 “의”는 바울이 말하는 “의”가 아니라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를 다함”을 의미한다. 이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제2의 모세로 인식하고 그 구원을 체험했다면 “의”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중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간직해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고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이웃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 비로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참다운 모습으로 설 수 있음을 마태는 우리의 마음속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