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바울의 생애(2) – 선교여행과 그 이후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의 생애 전반부를 살펴보았다. 그의 배경과 출생, 교육 그리고 랍비로서의 기독교 박해와 극적인 회심을 보았다. 오늘은 그 후편으로 그의 생애 후반부를 살피도록 하겠다. 바울의 후기 사역은 주로 세 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우리는 먼저 이 세 차례의 선교여행 이전의 초기사역을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순서일 것이다.
바울은 A.D.34년 경으로 추정되는 회심의 시기 직후에 아라비아로 가서 나바테아 아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갈1:17; 고후11:32-33) 아마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복음에 대한 정치적 지도자들의 반대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으로 이동하여 회당에 가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계시된 메시지,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반대를 받아 다메섹 총독이 바울을 체포하기 위해 성문을 지키도록 명하자 바울은 바구니를 타고 내려가 성벽의 창문을 통해 탈출하게 된다.
그 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15일을 유하며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방문했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로부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처음에는 바울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바나바가 바울을 중재하고 나섰다(행9:26-30; 갈1:18). 예루살렘에서 15일을 보낸 바울은 다소로 돌아와 수년간 시리아와 길리기아에서 복음을 전했다. 시리아에 머무는 동안 바나바가 바울에게 연락해서 엄청나게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에 반응하고 있던 안디옥 교회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초청한다.
<제1차 선교여행>
46년 혹은 47년에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나바와 바울을 안수하여 선교여행을 떠나 보냈다. 이때 바나바의 사촌인 요한 마가도 함께 떠났다. 그들은 안디옥의 항구인 실루기아를 출발하여 배로 구브로를 행해 갔으며, 구브로의 살라미에서 바보까지 섬을 통과했다. 이곳에서 총독 서기오바울이 회심하였다.
바울 일행은 바보를 떠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를 향해 갔으며(중부 소아시아 남쪽해안), 그곳에서 요한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남갈라디아의 여러 도시들, 즉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벌인다. 바울과 바나바는 우선적으로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많은 지역을 복음화 하면서 바울은 그곳에서 반대에 부딪히자 이후부터 이방인들에게 나아가기를 선언한다(행13:46). 유대인들로부터 반대를 당한 후 바울과 바나바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더베에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버가로 갔으며,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머물렀다(행14:28). 이 첫 번째 선교여행을 마친 직후에 안디옥에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고 본다.
<예루살렘 공회>
바울 일행이 첫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오자마자 이방인 구원의 조건에 관한 논쟁에 휘말렸다. 베드로와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유대인-이방인 관계라는 쟁점에 대해 동요했다. 설상가상으로 예루살렘에서 온 일부 거짓교사들이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에게 접근해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행15:1).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임명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이 회의로 인해 베드로와 주의 형제인 야고보는 바울이 전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변호했고 공식적인 기독교적 관점을 확증하는 편지를 이방교회들에게 보냄으로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를 마무리 지었다.
<제2차 선교여행>
공회에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후 49년경에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을 시작한다. 사도행전18:2은 바울이 두 번째 선교여행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다고 진술한다. 그 부부는 클라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축출 명령 때문에 로마에서 떠났는데 이 사건은 주 후 49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사도행전15:37-39에 따르면 바울은 선교단을 재정비한다. 이때 바울은 바나바와 마가 요한과는 결별하고 그 대신 실라를 데리고 간다. 바울과 실라는 안디옥을 출발해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 남갈라디아의 도시 즉, 더베와 루스드라로 나아갔다. 사도행전16:1-3에 의하면 그곳에서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아 그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 이 세 사람은 비르기아를 지나 북갈라디아로 가서 새로운 교회들을 세웠다.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으나 방해를 받아서 갈라디아에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다. 제2차 선교여행 기간에 바울은 많은 지역을 옮겨 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세운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등 선교자로써의 눈부신 활동을 하게 된다. 제일 괄목할 만한 사실은 아시아를 떠나서 그리스로 진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이 환상에 응답하여 빌립보의 항구인 베압볼리로 갔다. 빌립보는 유럽에서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자기 주인에게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한 점쟁이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축출한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투옥되고 매질을 당한 뒤 압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경우하여 데살로니가에 이른다(행17:1-9). 데살로니가에 짧은 기간 머물며 복음화 시킨 후 유대인들과의 논쟁이 일어나 베뢰아로 피신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논쟁을 일삼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옴으로 인해 아테네로 급히 피신한다. 그리스 철학의 본산지인 아테네에서 선교적 좌절을 맛본 바울은 고린도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브리스길과와 아굴라를 만나게 되고 실라와 디모데가 합세한다. 고린도는 로마속주인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항구가 있고 여러 사람들이 왕래하는 매우 번화한 도시였다. 이곳에서의 선교활동은 크게 성공적이었다. 유대인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듯하다.
아테네에서 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는데 이 두 도시에서의 선교활동의 차이를 든다면 크게 두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아테네에서는 바울이 혼자 활동했던 반면 고린도에서는 예전의 동역자들인 실라와 디모데 이외에 새로운 동역자들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얻어 최소한 다섯명이 함께 선교활동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아테네에서 바울이 만난 사람들은 그 도시의 특성에 걸맞게 철학하는 사람들, 즉 이성과 논리, 인간의 지혜로 맞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한 반면, 고린도에서는 아무래도 무역, 금융,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에 있던 시기가 언제쯤일까? 바울의 선교여행 시점을 가늠하는 기준이 있을까? 사도행전18:12은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린도의 재판소앞으로 데려갔는데 당시 제2차 선교여행 말엽에 아가야지방의 총독은 갈리오였다. 당시 로마관료들의 임기는 1년이었으며 총독계약은 전형적으로 7월1일에서 다음해 7월1일까지 이어지는 것이 로마관습이었다. 델피에서 발견된 한 비문은 크라디우스의 26번째 황제 축하기간을 위해 만들어 졌는데 그때 고린도의 총독이 갈리오였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정보에 의하면 이 기간은 A.D.52년1월25일에서 8월1일에 일어났다. 이는 갈리오가 51년 7월1일부터 52년7월1일까지 그곳의 총독으로 재임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갈리오 앞에 서게 된 사건은 고린도에서 머문 18개월 끝무렵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데살로니아가 전후서가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당시 바울은 총독 갈리오 앞에 끌려왔으나 갈리오는 그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유대법에 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무리를 쫓아냈다. 그 뒤 며칠 후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겐그레아 항구에서 출발하여 에베소와 가이사랴로 향하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뒤(행18:22) 안디옥에서 1년 이상 머물렀다.
<제3차 선교여행>
바울은 52년쯤 안디옥을 떠나(행18:23) 다시 한번 육로로 북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지나 에베소에 이르렀다. 아시아지방의 수도인 에베소는 바울이 머물고 있던 그 다음 3년동안(행20:31) 그의 선교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에서 성공을 거둔 고린도와 마게도냐 지방이 모두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에베소에 있는 동안 이곳들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두란노서원에서 2년간 강론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이룬 바울의 업적 중 중요한 것은 많은 서신들을 집필한 것이다. 이때 바울은 고린도 전후서와 로마서를 기록했다. 디도가 없는 동안 에베소의 은장색이 일으킨 소동이 발생했다(행19:23-20:1). 이 사건은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도를 듣고,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을 위해 일하는 데메드리오가 바울과 그리스도교의 확장이 자신들의 사업에 지장을 주는 것을 우려해 일으킨 소동이다. 그 일로인해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고(고후2:13) 다시 그 후에 고린도에 오게 된다. 아마 55년 겨울에서 56년 봄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고린도의 3개월간 머물면서 선교활동 기간 내내 마음을 기울여온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운동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생각을 한다. 이 모금 운동에 갈라디아 교회들, 마게도냐 교회, 야가야 교회들 등 바울이 세운 거의 모든 교회가 동참하였다(롬15:25-26). 이로써 바울은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로 대표되는 지중해 동부지역의 선교활동을 마무리하게 된다.
<말년>
바울은 구제연보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되는데 바울은 그의 투옥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언에도 단념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그가 성전에 있을 때 아시아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곳에 있는 바울을 보자 바울이 모세율법을 위반하고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감으로써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다고 바울을 고소하였다. 그들은 바울을 덮쳐서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 구금하였으며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유대총독 안토니우스 벨릭스에게 보냈다. 벨릭스는 2년간 바울을 구금했고 새 총독인 베스도가 부임하자 바울은 그의 로마 시민권 덕택으로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기를 요청한다(행25:11).
로마에 도착해서 가택연금 상태로 2년간 머무르는데 그때 바울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한다.
교회전승에 따르면 첫번째 구금 이후에 석방되어서(약60년경) 사역을 하다가 다시 붙잡혀 보다 심한 구금상태에 놓인다. 결국 네로 황제로부터 유죄판결을 받고 이후에 살비애라 불리는 곳에 있는 오스티아 도로의 세번째 이정표에서 참수당한다. 아마 그때가 A.D.66년이나 67년경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첫번째 석방과 두번째 감금 사이에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했고, 두번째 로마감금 때 디모데후서를 기록했다.
결국 바울은 3차례의 선교여행과 구금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초석을 마련함과 동시에 우리의 삶의 영원한 이정표가 되는 13권의 서신서를 남겨둠으로써 우리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