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선지서 개관 – 선지서들, 시대적 배경에 따라 배열해 보기
이제 우리는 시가서와 지혜서를 마무리하고 선지서를 살펴볼 차례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선지서를 시대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그 분량에 따라 대 선지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를 배치한 뒤 그 뒤에 소 선지서들이 배열되어 있다.이로인해 성경을 체계적으로 읽음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약간의 혼동이 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시대적 순서에 따라서 선지서들을 살펴볼 것인데 오늘은 개략적으로 어떤 시대에 어떤 선지서들이 기록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1기 : 앗시리아의 위협과 북이스라엘의 죽음시기.
주전 900년에서 609년까지 앗시리아민족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볼 때 고대근동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독보적 세력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 중류에 본거지를 마련한 그들은 사방으로 그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들의 궁국적인 목적지인 이집트에 도달하기 위해 지중해 동부연안의 소수민족국가들을 통과해야했다.그래서 주전 885년에서 785년 사이의 1세기 동안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에게 막대한 압박을 주었다. 이 왕들은 수 많은 시간과 재물을 앗시리아의 위협을 처리하는데 바쳤다. 그러나 주전 782년 초부터 세 명의 앗시리아왕들은 덜 공격적이었다. 이것은 주전 782년부터 745년 까지의 40년 기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이 휴식기간을 누리고 이로 인해 이 두 민족은 평상시의 길고도 안정된 통치를 영위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주전 793년에서 753년까지 통치하였고 남유다는 웃시야가 주전 792년에서 740년까지 통치하였다. 이 시기 동안에 방어보다는 재산축적에 시간과 자원들을 쏟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은 솔로몬 시대 이후 여느 시대와는 다른 부와 번영의 시대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를 배경으로 한 선지서들이 아모스, 호세아, 미가, 요나, 이사야서이다.
앗시리아인들이 평소에 어떤 성격이었든지 그들은 대적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그들의 군대는 옛 고대 근동국가들보다 한층 더 수준높은 조직력과 군사력을 보여주었으며 그들의 정책은 언제나 용의 주도했다. 그들을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따라서 앗시리아는 그들의 대적들이 앞서 대항한 자들의 사례들을 보면서 항복하기를 바랬다.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은 줄기차게 북이스라엘과 블레셋 도성들이 있는 남부해안 지역을 압박했다. 북이스라엘의 왕 호세아는 처음에 앗시리아에 승복하고 그들에게 조공을 바쳤으나 머지 않아 무거운 짐에 지쳐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집트의 원조를 기대한 호세아는 주전 725년경에 조공 바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로 인해 살만에셀의 침공을 받고 722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당하고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하고 만다.
그 후 앗시리아 제국은 에살핫돈의 통치아래 숙원이었던 이집트 정복을 이루었다. 그의 아들 아수르바니팔이 주전 668년에 왕위에 올랐을 때 앗시리아는 권세와 영광이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주전 628년 아스르바니팔 사망 후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 앗시리아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제2기 : 바벨론의 흥왕과 남유다의 죽음
앗시리아의 종말의 시작은 주전 614년에 도성 아수르의 함락과 멸망으로 찾아온다. 그후 앗시리아의 성읍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성인 니느웨가 단지 3개월간 포위당한 후 무너지고 만다. 결국 앗시리아의 군주는 그의 병사들과 함께 서방으로 도망쳤고 거기서 새로운 이집트의 파라오인 느고와 연합하였다. 아마도 바로 느고는 자신과 신흥세력인 바벨론 사이의 완충제로 힘없는 앗시리아를 그대로 살려두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전 605년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의 인도를 받은 바벨론 군대가 앗시리아와 이집트의 군대를 무너뜨린다. 이 당시의 격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활동한 선지자들이 나훔, 스바냐이다.
이때 유다는 어떠했나?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여 정기적 조공헌납을 승인하였고, 성전보물들뿐만 아니라 인질들도 볼모로 주었는데 그들 가운데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있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에 대한 여호야김의 충성은 일시적이었다. 느부갓네살의 다른 책무들이 멀리 떨어진 유다의 일들보다 더 중요하리라고 생각하고 3년 후에 계약을 파기한다. 느부갓네살은 곧 군대를 보낸다. 그때가 주전 598년이고 이 혼동의 시기에 에스겔, 예레미야, 다니엘서가 기록되었다. 과연 에스겔등은 바벨론에 머물면서 포로가 된 동포들에게 무슨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을까? 바벨론은 앗시리아와는 다르게 포로된 백성들을 다루었다. 앗시리아는 민족의 계층을 앗시리아제국의 여러 도처에 분산하여 민족을 분열시키고자 하였으나, 바벨론은 이들을 한 곳에 정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텔아비브라 불리우는 곳에 있는 그발강근처의 중앙 바벨론에 다함께 거하게 되었다(겔1:1;3:15). 이러한 바벨론의 접근 방식은 유다포로들에게 희망의 부활을 고무시켜 주었다. 한곳에 모여있었기 때문에 에스겔을 비롯한 신실한 자들은 성경연구를 통해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서 바벨론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기를 거부했으며, 자신들을 성찰하기 위해 성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이 같은 행동은 다니엘이 자신이 읽은 예레미야서를 근거로 하여 포로귀환을 위해 간구하고 있음을 발견할 때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침공초기부터 선지자들을 준비시켜서 70년의 포로기간 동안에도 낙담치 않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때를 대망하면서 인내하게 하심을 보게 된다. 어쨌든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벨론 포로과정은 세 번의 경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전의 앗시리아와 같이 바벨론도 유다 백성들에게 세 번의 기회를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유다가 두 번을 반역하고 있었으므로 문제는 바벨론 군대가 얼마나 빨리 도착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예루살렘 도성이 보존될 수 있는 지였다. 바벨론은 주전 588년에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2년 후인 주전 586년 7월에 예루살렘이 무너졌다. 이런 상황이 하박국과 오바댜서의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바벨론제국은 앗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을 잇는 짤막한 막간에 불과했다. 대개 이 막 같은 “원맨쇼”로 이루어졌다. 이 원맨쇼의 장본인이 느부갓네살이었다. 그가 43년을 통치한 후 주전562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때, 이미 그의 사역을 무너뜨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제3기 :회복의 시기
느부갓네살의 사망 이후 70년 동안 그의 자손들 중 세 명 이상이 보좌에 올랐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왕위에서 내려 앉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왕인 나보니더스때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더욱 강성해졌고 결국 주전 539년에 바벨론은 지구상의 지도에서 사라져 버린다. 고레스가 행한 첫번째일 가운데 하나는 그토록 귀환을 염원하던 포로된 백성들을 고향으로 귀환시키며, 손상된 성전의 재건축을 위해 국고지원을 선포한 것이었고, 그의 포로귀환 선포는 하나의 요행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신제국 정책을 표방한 것으로서, 고레스는 이러한 새로운 정책을 통해 공포정치 대신에 법과 공평과 관용을 내세웠다. 그 결과 고대 근동지역에는 200년간 놀라운 평화가 이루어졌다. 비록 페르시아에 막중한 세금을 바치지 못하면 또 다른 보복이 닥쳐왔지만, 조직적인 반란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유다의 환경은 포로기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다. 사실상 실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포로기 이전에는 적어도 그들만의 왕과 정부와 군대를 거느린 외관상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화려한 황금장식이 벗겨진 솔로몬 성전 조차도 인상적인 건축물이었으며 이 세상에서 적합한 하나님의 궁전이었다. 그러나 포로귀환후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왕도 없고 완전한 독립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행정중심지가 위치한 페르시아 제국의 하위구역에 지나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황폐되었으며, 도시를 건설할 재물도 없었고 도시건설에 대한 열의도 없었다. 여호와의 성전지대가 놓일 때 기뻐하는 소리는, 과거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는 자들의 통곡소리로 말미암아 그 소리조차 분별해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들의 기대에 비해 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운 나머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주전 520년에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건축에 착수하도록 납득시킬 때까지 이 성전 지대는 16년간 그대로 방치되었다. 재건축 작업은 착공한지 20년이 지난 후, 그리고 옛 성전이 소화된 후 70년이 지나서야 비로서 주전 516년에 완공 되어진다. 이 사역을 배경으로 쓰여진 선지서들이 물론 학개와 스가랴서이다.
그 후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페르시아도 약화되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몰락한 것은 대체로 그 국가 안에서 발생한 분쟁과 반역 때문이었다. 페르시아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법과 공평을 추구하려던 페르시아정책은 거대한 관료정치로 낭비가 심했고, 그 제국이 쌓아 올린 엄청난 부는 세계를 정복한 원래의 활력과 힘을 약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주전 333년 페르시아는 먹이에 굶주린 헬라의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만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페르시아가 사용한 종교정책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외교정책을 다르게 취했듯이 종교정책도 다르게 취하였다. 이제 혼합종교가 그 시대를 지배하게 된다. 더 이상 “나의 신 VS 너의 신”이라는 대결구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이 같은 혼합주의는 “이것 아니면 투쟁”이라는 옛 대결구도보다 성경에 기초한 신앙에 더욱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였다. 이제 여호와와 바알-샤마임을 동시에 섬길 수 있게 되었다.
포로기 이후 귀환한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제국 내에서의 사고의 전환은 유일신신앙에 있어서 커다란 위협이었다.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귀환하였지만 이제 그들이 싸울 것은 제국 내에 팽배한 혼합주의에 대항해서 성경적인 유일신 신앙을 계속 견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혼합주의와 싸운 것이 말라기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엘서는 연대측정이 어려운 책이므로 가장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 다음주부터 이러한 순서에 의해서 선지서들을 고찰해 봄으로 인해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섬기는 이 땅의 제사장 된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재조명하고 반추하는 시간들을 갖기 원하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