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신약개관 – 신약시대의 종교단체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이 종교가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소수민족으로 살아간 상황은 유대교가 이방종교와 타협하고 혼합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교를 받아들이거나 이교와 유대교의 혼합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소수였고 유대사회에서 곧 제거되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타종교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대교의 순수성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을 확고하게 붙든 사람들만이 유대사회에 집결되었고 유대교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민족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면서 모든 우상숭배를 이전보다 더 철저히 배격하게 된다. 멸망 이후 체험한 이교문화와의 접촉이 오히려 신앙을 더 철저하게 지키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멸망 이후 귀환으로 이어지고 그 이후에도 다른 종교는 유대교에 하등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출발에 있어서 다른 종교를 보는 것은 불필요하고 유대교안의 분파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사역할 당시의 유대교는 구약성경에 기초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상적으로 완벽하게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다. 당시의 세계가 정치, 사회상화에서 다원화되어 있었던 것처럼 종교생활에도 다원화 현상이 뚜렷했다.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많은 단체들이 유형 무형으로 존재했다. 심지어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는 생각들도 조금씩 달랐다. 신학사상이나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했는가에 관하여는 각 계파간에 많은 상이점이 존재했다. 역사가 흘러가며 유대인들이 온갖 어려움을 경험하는 동안 믿음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다른 강조점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자라났고 이것이 결국 계파로 형성된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에는 대개 네 개의 종파가 있었다고 한다.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구별된 사람들’을 의미하는 사람들로 모든 불결한 것들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 절대적 순결을 추구했던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마카베오상 2장 42절이다. 따라서 그 기원을 B.C.164년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카비 반란군이 셀루쿠스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실질적인 유대 통치권을 획득했을 때, 그들을 지지했던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더 이상 마카비 가문을 따르지 않았다. 마카비 가문의 지도자들이 종교적인 관심보다는 정치적인 야망을 더 크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도왔던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전이 회복되자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경건한 비정치적인 유대인들로부터 서서히 바리새파라는 하나의 패쇄된 단체가 형성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나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했지만 사회를 떠나지는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회개운동과 같이 부정과 불결한 생활에 대한 회개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그들의 이상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순종에 두었다. 그들은 다가오는 메시아의 시대에 즈음하여 율법준수생활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 결과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들을 가려낼 수 있도록 작은 단체를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서로 형제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려는 목표가 이교적 사회나 비유대적 관습을 멀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을 따르지 않는 같은 유대인들을 멀리하는데 까지 이른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은 약 6천명이 있었는데 공동식사를 좋아했고 죄인과 세리를 멀리했으며 물건도 그들의 형제들에게서만 샀다.
그들은 늘 소수였으나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높은 도덕적 이상과 그 이상을 실현하는 추진력과 실천력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막연한 이상주의자들이 아니었고 이상주의자들인 동시에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실행을 위한 그들의 열심은 구전이라는 새로운 멍에를 탄생시켰다. 계명을 글자 그대로 매일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세밀하게 규정한 것이다. 율법중에 어떤 계명들은 사회와 문화, 정치판도의 변화 때문에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킬 수 없었는데 이러한 것까지도 실천 가능한 범위로 현실화하려고 했다. 한 예로 유대인 모든 남자들은 1년에 세번씩 성전에서 여호와 앞에 서야 한다는 계명은 로마에 사는 사람들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계명을 통째로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계명의 ‘세번씩’을 ‘가능하면 세번씩’, ‘가능하면 자주’, ‘적어도 한번은’으로 해석하여 누구나 예루살렘을 멀리하지 못하도록 했다. 율법에 대한 이런 상황적 해석을 구전, 장로들의 유전 또는 전통이라고 불렀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창조적이며 실제적인 해석이라고 여겨서 그 권위는 기록된 율법과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서기1세기 초엽에 바리새파안에는 두개의 유명한 학파가 있었다. 힐렐파와 샤마이파였다. 힐렐파는 아주 자유롭고 급진적으로 율법을 변화하는 사회에 적용하려고 했다. 계명의 폭넓은 해석이 특징이었다. 반면에 샤마이학파는 보수적이고 엄격하게 율법을 해석했다.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 특징이었다.
<에센파>
근본주의자들인 에센파는 쿰란 공동체와 거의 같은 사람들로 취급된다. 쿰란 공동체는 1947년 쿰란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십수개의 동굴이 발견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독신 생활을 강조했고, 결혼은 종족 보존의 수단으로만 허용했다. 또한 기존사회를 떠나 광야에서 공동사회를 건설하고 살아갔다. 그들의 발생시기는 안티오커스 4세때(B.C.171년)로 추정된다. 대제사장 가문에 속하지 않은 메넬라우스가 최초로 대제사장에 임명되고 정통 대제사장이 이집트로 도망한 것을 계기로 경건한 사람들은 더 이상 기존사회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하나 둘 이스라엘 사회를 떠나 광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카비 반란이 일어나 성전이 회복되고 대제사장직 탈환에 성공했으나 대제사장직은 끝내 사독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B.C.152년 맛타티아의 막내아들 요나단이 대제사장 자리를 계승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사회를 떠났다. 바리새인들은 사회에 남아있으면서 정결과 거룩을 원했지만 이들은 도피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비해 이들은 대부분 제사장 가문, 특히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수도원 생활과 같이 엄격한 규칙을 준수했다.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1년간의 엄격한 시험기간을 거쳐야 했고, 사유재산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명상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동예배, 공동작업등 주로 공동생활에 참여해야 했다. 이들은 예루살렘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를 거룩한 집단, 빛의 아들들, 깨끗하고 흠없는 영적 성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다만 도래할 구원의 시기에 합법적 제사를 드릴 수 있기를 갈망할 뿐이었다. 즉 깨끗한 제사, 합법적 제사장, 바른 제사 등을 고대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임시적 공동체로 생각했다. 이에 반해 다른 사람들을 어둠의 아들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 두 무리 사이의 전쟁으로 설명된다.
<사두개인>
사두개인의 근원도 사독가문의 후예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독 대제사장 가문의 사람들 중 한 부류는 사회를 떠났지만(에센파) 다른 일부는 사회에 남아 명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하스몬 왕가가 대제사장으로 등장했을 때 이들은 그들을 부정하는 대신 유대관계를 맺고 귀족계급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헬라화 정책에 긍정적이었고 신앙과 삶의 영역을 날카롭게 분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개인적인 삶에 국한시키고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은 아무 상관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하스몬 시대에는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나 바리새인들의 득세로 인해 점차 약화일로에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세력은 반반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인정하며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구전과 그 권위를 철저하게 부정했다. 율법을 변화 없이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지켰는데 특히 제사와 의식적인 면에서 더욱 철저했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이들이 더 보수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세오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거부했기 때문에 부활이나 천사나 영적인 존재, 메시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않았다. 서기 70년, 성전이 파괴된 후 이들의 존재는 사려져 버렸다.
<열심당원>
열심당원의 근원은 서기6년에 있었던 과세를 위한 인구 조사로 꼽고 있으나 정신적인 근원은 마카비 가문의 반란에서 찾을 수 있다. 열심당원은 바리새인의 한 분파로 정치, 사회적 국면에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유대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들은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세금내기를 거부했다. 개인적인 정결만이 아니라 전 사회의 정결과 거룩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들의 이상은 하스몬 왕가와 같이 무력으로 유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열심당원이라고 불리었다. 부정한 이방인이나 이방군대를 약속의 땅에서 몰아내고 거룩한 땅을 정결케 하며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 이상대로 서기 66년 칼을 들고 무력으로 항거하여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왕국의 시작을 선포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