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신약성경의 역사적 배경(1) [바벨론 – 그리스시대]
이번 주부터 우리는 신약성경을 대할 것인데 각 권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신약성경의 배경에 대해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오늘은 먼저 역사적 배경의 첫번째 시간이 된다. 구약시대가 끝났을 때 페르시아제국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통치하였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는 로마가 다스리고 있었다.
이스라엘에는 말라기 선지자와 세례요한의 사역 사이에 그 어떤 선지자의 목소리도 없었기 때문에 약 주전400년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를 “침묵의 시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전에는 “신구약 중간기”라고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제2성전시대”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고 있다. 이 용어는 스룹바벨에 의해 주전515년에 제2성전이 건축된 뒤에 주후70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예수님 시대와 초대교회 시기를 포함한다. 제2 성전시기는 팔레스틴의 지배자에 따라 구별되는 다섯개의 위기시대로 구분된다.
첫번째 위기는 유대국가가 통치권을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통치와 성전의 파괴와 함께 찾아온다. B.C. 605~606 느부갓네살이 유다지방을 정복함으로써 바벨론 통치가 시작된다. 느부갓네살의 통치 정책 중 유다 왕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요소는 상류층을 바벨론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그 후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이집트의 힘을 빌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빌미가 되어 바벨론이 주전586년 넷째달 9일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다. 이때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첫째로 성전이 없어짐으로 인해 율법준수가 임시적으로 성전예식과 동물희생제사를 대신하게 된다. 포로기 동안 생긴 두번째 발전은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거부하게 된 것이다. 본토에서 추방된 것이 우상숭배로 인함임을 각성하고 바벨론 포로기에는 우상숭배가 그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런 교훈을 얻는 도중에 신흥국가인 페르시아(지금의 이란)가 바벨론(지금의 이라크)을 공격하여 B.C 539년 10월 29일에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으로 입성한다. 근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고레스는 바벨론과는 달리 정복지 백성이 고향에서 지녔던 지역관습과 종교를 유지하도록 허용해 주었다.
유다를 향한 페르시아 제국의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그리고 성경 예언의 성취로 (사44:28-45:13),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귀환하도록 허락해 주었다(스1:1-4). 그리하여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기 위한 성전기물과 준비물품을 가지고 고향으로 귀향한다. 이로 인해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아래 성전을 재건하고(B.C.515) 느헤미ㅁ야의 인도아래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며, 학사 에스라의 가르침으로 율법을 회복하여 유다 공동체를 다시 일으켰다. 이러한 페르시아 시대가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왔기 때문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고 경제적으로 약하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쓴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제국 페르시아는 팔레스틴을 200년 이상 통치했으나 세계역사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정복전쟁에 패한 것이다. 그리스의 아테네는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가 전면전을 펼쳤던 페르시아를 마라톤에서 물리친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와 전면전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을 동맹으로 이끌어낸다. 페르시아가 점차 쇠락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잦은 전투를 치르며 얼마간 냉전 체제를 유지한다.
그런데 이때 세계사의 큰 별이 나타난다. 그리스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다. 알렉산더는 왕권을 계승하자 즉시 자신의 의지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길들인 뒤에 페르시아에 관심을 갖는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정복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이집트가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3세는 그곳의 지배권을 다시 세워야 했다. 이것이 바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알렉산더 등장의 서막이었다. 다리우스의 군사력이 이집트에 머물러 있게 되자 알렉산더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소아시아로가서 페르시아군대를 무찔렀다. 다리우스3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로 전쟁에 참여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집트와 유다를 접수한 알렉산더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에게 치명적 패배를 안기고 새로운 세계의 통치자임을 선포한다. 알렉산터는 동으로 멀리 인더스강까지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민족적 정체성 문제와 종교적 자유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던 페르시아 제국의 붕괴는 유대국가에 두번째 중대한 위기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헬라(그리스)의 제왕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신봉하여 전 세계에 그들의 사상과 삶의 양식을 뿌리내리려는 헬라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죽음으로 다니엘 환상속에 등장하는 큰 뿔 가진 숫염소의 뿔이 갑자기 꺾였지만, 대신에 네 개의 작은 뿔이 사방에서 자라난다(단8:8).
이제 제국은 알렉산더의 장군들이 제국을 분할하여 차지하고 후계권 싸움을 벌인다. 그 중에서 팔레스틴과 관계된 왕조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쿠스왕조이다. 먼저 이집트의 알렉산더 계승자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가 B.C.320~198년에 팔레스틴을 지배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하에 있던 유대는 마치 구름에 덮인 듯한 애매한 상태속에 남아있었다. 유대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성전 통치시대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계속 유지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는 주로 트랜스요르단에 무역로를 확보하는 것과 적극적인 조세징수와 관련이 있었다.
프롤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대한 통치를 얻는 동안 또 다른 그리스왕조가 시리아을 통치한다. 이 사람이 마케도니아인 안티오쿠스의 아들 셀레우쿠스1세이다. 그 후 후계자들이 동서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그들의 영향력이 소아시아 일부지역(현재의 터키)과 팔레스틴 및 메소포타미아 일부까지 미쳤다. 그런데 전략적 요충지인 팔레스틴을 투고 셀레우쿠스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계속 전쟁을 치르다가 마침내 시리아의 안티오쿠스3세가 파네아스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5세를 격파한다. 이 전쟁 이후 팔레스틴인 통치는 이집트인 손에서 시리아인 손으로 넘겨진다. 그리고 팔레스틴을 다스리던 시리아의 통치는 31년동안(B.C198~167)지속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적할 수 없는 세력인 로마와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하강기류는 감지된다. 그들은 로마에게 대량 공물을 바쳐야 했을 뿐 아니라, 안티오쿠스4세는 볼모로 잡혀 로마로 끌려가야 했다. 이렇게 막대한 공물과 조세부담을 가진 셀레우크스왕조의 행동은 유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막대한 돈이 필요했던 그들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을 임명할 때 뇌물을 받아 결정하게된다.안티오커스 계승시 다소 보수적인 대제사장인 오니아스3세가 유다를 지배했었다. 오니아스보다 진취적인 그의 형제 야손이 안티오쿠스4세를 위한 상당한 분량의 돈을 모아서 대제사장이 되는 특권을 산다. 야손은 예루살렘을 그리스풍으로 재구성하려고 했는데,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변절자가 아니라 국가 개혁주의자 혹은 보호자로 인식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 국제무대에 진출시키기 위해 애를 썼으며, 국제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참여자가 되게 하였다. 이런 정책은 지도층에 막대한 기회와 부를 제공했지만 국가의 근간이었던 토라(율법)가 헬라 관습으로 대체됨을 의미했다. 결국 수년 후 예루살렘에서 어느 경쟁당파가 안티오쿠스4세에게 상당한 양의 뇌물로 접근해서 대제사장을 야손에서 메넬라오스로 바꾸었다.
그런데 안티오커스4세는 그리스문화를 전파하려는 욕망과 로마에 지불해야 하는 막대한 양의 돈이 필요해서 결국 예루살렘성전의 보물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그러던 중에 역사적인 무대는 급진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안티오쿠스4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는 사이에 그가 전쟁터에서 살해 되었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다. 이때 실권을 잃은 전 대제사장인 야손과 추종자들이 새 대제사장 메넬라오스를 예루살렘 요새로 밀어내어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메넬라오스가 안티오쿠스4세에게 이 말을 전하자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을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시로 간주하고 수 천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의 반역의 기반으로서 그들 조상들의 관습(토라)을 고수하는 백성들을 공격했다. 결국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안티오쿠스는 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자신을 대적하는 세력의 구심점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이스라엘이 종교적 예식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탄압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유대교를 금지하는 안티오쿠스의 시도는 유대에 세번째 큰 위기가 불어 닥쳤음을 나타낸다.
B.C.167년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할례를 행하거나 토라 사본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토라를 계속 준수했던 사람들은 무서운 형벌에 처해졌다. 절기도 금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금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공동소유가 되었고 예배는 이방인 관습을 수용하도록 바뀌었다. 아티오쿠스가 동원한 모든 수단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예루살렘성전을 그리스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에게 헌정한 것이었다. 안티오쿠스는 성전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단 위에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예배의식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성경에서 예언한” 포악하고 가증한 것이었다(단9:27). 이런 가운데서 안티오쿠스에게 저항하고 유대교를 고수하던 가문들은 끔찍하게 다루어졌다. 남자와 여자들을 몽둥이로 때렸고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한 어머니들은 목 메달아 처형됐다. 그리고 종교서적들은 모두 압수당했으며 종교서적들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이 무도한 행위들은 분명히 신실한 유대인들을 격분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유대에 닥친 세번째 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 유대교를 포기하며 안티오쿠스에게 굴복하여 뜻 없는 평화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삶과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설 것인가? 그들의 대응과 결과가 주목된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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