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야고보서 개관: 믿음과 행함의 이중주
14세기초에 정경속에서 야고보서를 포함한 일곱 개의 편지들을 공동서신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이 서신들이 바울 서신들과는 달리 하나의 회중이 아니라 교회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학자들은 이 서신들이 각기 하나의 회중에게 보내진 것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범위가 정해진 특정지역에게 보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야고보서도 이 범주에 해당한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소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야고보서는 개신교 역사에서 신약성경의 다른 책에 비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못했고 늘 바울과의 관계에서 해석되는 비운을 맛보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큰 조명을 받고 있고 또한 마르틴 루터가 오늘날 살고 있다면 야고보서 역시 강조하며 개혁에 앞장섰을 것이다.
<기록 동기 및 상황>
야고보서는 서신의 수신자들 개개인이 처한 특수한 환경과 관련된 것이라기 보다는 수신자들에게 목회적 조언을 주기 위해 기록된 일반서신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또한 야고보서를 받는 교회가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첫째로, 이 교회는 믿음이 시련으로서의 시험에 직면하였고(1:2-4, 12) 그것을 극복할 지혜가 부족하였다. 둘째로, 이 교회는 부자들의 횡포가 있었고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데 골몰했다(4:13-5:6). 셋째로, 이 교회는 말의 문제로 시달렸는데 신자들이 입과 혀를 마음대로 놀렸으며(1:19-27; 3:1-12), 이로 말미암아 비방과 다툼이 발생하였다(3:13-4:12). 넷째로, 이 교회는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가 결핍하였고(5:7-11) 죄인들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데 관심이 없었다(5:19-20).
<저자>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야고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밝히는 것으로 보아(1:1) 저자가 초대교회에서 잘 알려진 야고보라는 것을 시사한다. 신약성경에는 적어도 다섯명의 야고보가 나온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야고보, 사도유다의 아버지 야고보,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이다. 이중에 첫째와 둘째와 다섯째가 가능성이 있는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복음서 외에 언급된 곳이 없고 세베데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44년에 순교하였으므로(행12:1-2),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가장 유력한 저자로 떠오른다.
<기록연대>
야고보서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저작으로 본다면, 그 기록시기는 야고보의 죽음이전이어야 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야고보는 귀족을 비난했다는 이유로(비교:5:1-6)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제사장 아나누스2세에 의해 62년에 처형당한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의인 야고보”가 되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기록시기를 40년대나 50년대 초, 혹은 유대인 반란직전인 60년대로 보기도 하지만 야고보서가 교회내에 이방인을 포함시키는 문제나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야기된 논란에 대한 어떤 논의도 없으므로 대개 예루살렘 공의회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49년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수신자>
야고보서는 특정교회에 보낸 것이 아닌 일반서신으로 분류되어 왔으나 사실은 분명히 특정의 청중을 염두해 두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1의 “흩어져있는 열두 지파에게”를 유대인출신의 그리스도인들로 이해한다. 몇 가지 특징들이 유대인 배경을 가리킨다.
①회당에서의 모임에 대한 언급(2:2) ②”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언급(2:21) ③구약성경의 직접적인 인용과 암시 ④야고보서의 유대 지혜문학과의 유사성 ⑤선지자적인 말투 또한 서신속에는 독자들이 팔레스타인 상황에 친숙할 것으로 기대하는 분명한 표시들이 존재한다. ①초목에 부는 뜨거운 바람은 사막의 기후를 나타냄(1:11) ②위험한 바다와 근접해 있음(1:6; 3:4) ③이른 비와 늦은 비 같은 특수한 팔레스타인의 기후유형(5:7) ④일용직 일꾼들로부터 가로챈 임금(5:4) ⑤다른 신약성경에서는 유일하게 사복음서에만 사용되는 지옥(게헨나)이라는 용어의 사용(3:6) 등이다. 그들은 아마도 헤롯 아그립바1세의 박해 때문에 흩어지게 되었고(행12:1-4; 주후43년) 아마도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는 유대-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높다.
<특징>
야고보서는 인사(1:1-2)가 포함된 서신서처럼 시작하지만 서신서의 특징인 본체와 결론이 없다. 오히려 서신서 형식을 띤 교훈적 혹은 지혜문학과 흡사하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절반 정도가 명령이나 권면을 표현하는 “명령형 동사들”을 담고 있다. 이것은 야고보서만의 특징과 강조점을 보여준다. 또한 야고보서에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녹아있다. 야고보서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시험중에 기뻐하라(야고보1:2/마5:11-12; 눅6:23)
.완전함/성숙에로의 부름(야고보1:4/마5:48)
. 간구와 응답(야고보1:5,17; 4:2-3/마7:7-11; 눅11:9-13)
.구원에 이르는 인내(야고보1:12/마1:22; 24:13)
.의를 파괴하는 분노(야고보1:20/마5:22)
.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야고보1:22-23/마7:24,26; 눅6:47,49)
. 가난한 자가 하나님 왕국을 상속받음(야고보2:5/마5:3,5; 눅6:20)
.자유의 법, 이웃사랑(야고보2:10-12/마22:36-40; 눅10:25-28)
.긍휼 없는 무자비함은 심판을 받음(야고보2:13/마7:1)
.가난한 자들을 향한 실제적인 돌봄(야고보2:14-16/마25:34-35)
.선한 일의 열매(야고보3:12/마7:16-18; 눅6:43-44)
.두 주인을 섬기는 것에 대한 경고(야고보4:4/마6:24; 눅6:13)
.마음의 정결(야고보4:8/마5:8)
. 겸손과 높임(야고보4:10/마23:12; 눅14:11)
.부의 위험(야고보5:1-3/마6:19-21; 눅12:33-34)
.선지자의 예(야고보5:10/마5:11-12; 눅6:23)
.맹세 금지(야고보5:12/마5:33-37; 눅17:3)
.죄인을 회복시킴(야고보5:19-20/마18:15)
<개요>
- 문안 인사(1:1)
- 세가지 핵심 논지들의 진술(1:2-11)
(1) 그리스도인의 삶 속의 시험(1:2-4)
(2) 지혜(1:5-8)
(3) 부와 가난(1:9-11)
3. 세가지 논지들의 재진술(1:12-27)
(1) 하나님과 연관된 시험/유혹(1:12-18)
(2) 말의 영역에서의 지혜(1:19-26)
(3) “가난한 자들”과 “가진 자들”의 책임(1:27)
4. 확대된 세가지 논지들(2:1-5:18)
(1) 부와 가난(2:1-26)
① 정죄된 편애(2:1-13)
② 행함없는 믿음의 문제(2:14-26)
(2) 지혜와 말(3:1-4:17)
① 혀의 위험(3:1-12)
② 위로부터 내려오지 않는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3:13-18)
③ 예시된 두 종류의 지혜: 폭력과 겸손(4:1-12)
④ 허탄한 자랑(4:13-17)
(3) 시험과 유혹(5:1-18)
① 외부의 박해(5:1-6)
② 인내의 대응(5:7-12)
③ 질병(5:13-18)
5. 끝 맺는말(5:19-20)
<주요 메세지>
아마도 야고보서 만큼 성경적 기독교와 명목적 기독교 사이의 대조를 날카롭게 지적한 신약성경은 없어 보인다. 디트리히 본 회퍼의 고전적 책인”제자도”에 나오는 유명한 “값싼 은혜”에 대한 논의는 불행하게도 단지 나치 통치에 너무도 쉽사리 그리고 지나치게 협조적으로 나아갔던 당시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주류뿐 아니라 교회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과 분파에게 적용될 수 있다.
몰몬교로 알려진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가 복음주의 신학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우리가 너무 쉽게 신앙지상주의(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후에는 마귀처럼 살아도 여전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를 조장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과연 균형 잡힌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견고한 교리와 함께 그에 따른 제자도의 모습이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것일까? 왜 우리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내용을 읽을 때 머뭇거리는 것일까?
과연 성경의 내용이 상호모순 되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또는 우리의 믿음의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야고보서의 핵심 주제문인 2:14-26은 바울의 가르침(롬3:28; 엡2:8-9)과 대치되어 보이는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것은 서신을 받는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즉 언뜻 보기에 야고보는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과 행위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고 바울은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울과 야고보는 수신자들의 상이한 상황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준수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율법주의에 대항해서 편지를 썼고 야고보는 믿은 이후에는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주의나 자유방임주의에 대항해서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주로 우리의 의를 선포함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야고보는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의 의를 증명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야고보와 바울은 서로 다른 구원관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서로 다르게 처한 상황에서 강조하고 있을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점짓 죄를 짓는 연약한 모습에 처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단절이나 취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우리의 의를 증명하지 못한 못난 자녀의 모습을 안타까워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의롭게 되는 칭의(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음.)가 아니라 삶을 통해서 의로움이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만 우리의 삶의 목표인 하나님과 영광을 추구하며 사는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칭의를 끄집어내어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를 우리의 삶을 통해 증명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렇게 믿음과 행동이 함께 갈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 자녀의 온전한 삶을 이루면서 주님의 나라 확장에 바르게 동참하는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주는 가장 강력한 도전이요 깨달음이 아닐까?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