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개관 – 인간개혁의 한계와 하나님의 새 언약.
예레미야는 주전625~586년에 예언활동을 한 선지자로 한 시대의 붕괴와 새 시대에 대한 소망을 전파한 선지자이다. 예레미야는 힐기야 집안 출신의 제사장으로서 고향이 아나돗인 것을 보면 아비아달계의 후손인듯하다(왕상2:26).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대한 포괄절 심판이 있을 것이므로 결혼하여 아이를 기르는 일을 예레미야에게 금하셨다(16:1-4).
<시대적 상황>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등극한 후부터 바벨론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하기까지 (B.C586년) 반세기 동안 예언활동을 하였다. 이때는 유다가 정치적 격변을 겪다가 침몰하는 가장 비극적인 역사시기였다.
앗시리아는 2세기가 넘도록 고대근동의 지배자로 군림했으나 마지막 왕인 앗수르바니팔의 죽음(B.C631년)이후 삼십년내에 축소되고 분열되었다. 이때 바벨론과 이집트는 앗시리아의 쇠퇴와 더불어 자신들의 제국에의 야망을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을 따라서 군대를 진격시켰고 서남쪽의 이집트는 느고가 서북방의 팔레스틴과 시리아를 압박하면서 거대한 앗시리아 제국의 남은 지역들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시 메데인과 동맹을 맺고있던 바벨론이 주전612년에 앗시리아의 니느웨를 포위하고, 이에 대항해서 바벨론 세력을 견제하려는 이집트의 바로느고가 출정한다. 이때 유다의 요시야는 느고의 진군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결국 므깃도에서 전사한다. 앗시리아 이후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가장 큰 전투가 605년 북부시리아의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이집트 사이에 벌어진다. 여기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한다. 그 후 페르시아가 근동의 패자로 부각하기까지 바벨론이 근동의 주인이 된다.
한편 유다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최후의 개혁자로 기억되는 요시야가(B.C640~609년) 여덟살이 왕이 되었다. 그는 열두살 되는 해부터 일련의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요시야의 재위기간에 앗시리아의 지배력이 쇠퇴함에 따라 유다 역시 앗시리아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이에 따라 요시야는 한때 통일왕국의 일부였던 지역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집트의 북방확장 정책을 저지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유다가 그의 둘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으나 유다에 대한 지배력을 휘두르던 이집트의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첫째 아들인 여호야김을 왕위에 올렸다. 여호야김은 겉으로 볼 때 현명한 지도자였다. 그는 거짓으로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를 오가면서 힘의 정치를 구사하려 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화려한 모습으로 왕궁을 재건하려는 등 악행을 저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하다가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끝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B.C597년 3월 16일,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지 불과 2개월만에 여호야긴은 항복하고 만다. 그래서 여호야긴과 유다의 왕족, 지배계층, 장인들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함께 끌려갔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B.C597~586년)를 허수아비왕으로 앉혔고 시드기야는 초기에 공물을 공손히 바쳤다. 그러나 시드기야와 신복들은 호시탐탐 반역의 기회를 엿보다가 주전589년 가을에 바벨론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나 결국 바벨론 군대의 공격을 받아 주전586년 7월에 멸망을 당하고 만다. 이때까지 예레미야는 거의 반세기 동안 5왕의 시대에 사역을 한다. 그는 이렇게 유다 주변국가들의 제국주의적인 야망의 부활과 격랑 속에서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격동의 시절을 목도하였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멀리 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기다리는 동족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한다.
<사역의 동기> 예레미야는 개혁자인 요시야가 죽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시야의 개혁이 지닌 내적이고 도덕적인 면보다 외면적인 면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유다는 요시야의 개혁이 요구하는 고상한 윤리적 요구를 받아들이는데 덜 열성적이었다. 성전에 들어가려고 아우성을 쳤지만 도덕적 삶은 완전한 바닥을 헤메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태도인 절대적인 도덕적 순종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이나 국가가 도덕적 사회적 의무에 대한 민감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아무리 진지하고 순수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받으실리가 만무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예레미야는 사회모든 계층에서의 정의의 위축을 목격하면서(5:1-5),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한다. 그들은 매우 종교적이었지만 오히려 부정이득과 탐욕과 불신이 그 시대를 지배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행동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우상숭배적 태도와 부패에서 비롯된 삶의 타락에 대해 그들의 종교적 열심과는 무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을 읽지 않는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께 역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하나님의 진정 어린 계시가 예레미야를 통해 던져짐을 간파하지 못했는가? 유다는 종교적 열심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종교적 장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성전이라는 탁월한 종교장소가 있었고 열심히 드나들었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과 비교해서 탁월한 종교적 교리도 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산 믿음이 없었다.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계시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종교적이었으나 또한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에 무관심했다. 따라서 삶이 유리된 거짓 신학사상속에서 미혹된채 안전하다는 속임수에 빠져서 하나님께로부터 한참 멀리가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실제적인 위기 상황속에서 하나님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 즉, 삶은 없으면서도 종교제도에 의존해 있던 거짓된 안전의식을 탄핵한다. 그는 유다의 제도들 즉, 왕권, 성전, 제사장직을 규탄하고 근본적인 변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니 그는 자기시대에 있어서 환영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회의주의자요, 불운의 선포자요, 반역자로 낙인 찍히며 사역할 수 밖에 없었다.
<새 언약>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단순히 어두운 면만 선포하였을까? 아니다. 국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태한 시기에 예레미야는 이제 옛 시대의 종말을 선포하고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중적인 사명을 가지고 백성들 앞에 선다(1:10). 그들이 실질적으로 무너졌지만 다시 건설하고 다시 심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선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건설하시고 다시 심으실 것인가?
새 언약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요시야시대에 개혁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 인간개혁의 한계이다. 외적인 율법도 중요하다. 그러나 외적인 율법에 의해 그들을 가르치고 회개시킬 때 히스기야왕이나 요시야왕 때의 종교개혁 운동에서 보여주듯이 그것은 표면적이요 일시적인 개혁에 불과했음이 증명되었다. 이제는 외적으로 기록된 율법이나 외적인 가르침의 방법에 의해 이스라엘을 참 회개로 이끌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게 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속에 심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시려하신다. 다시말해 히스기야와 요시야로 대변되는 인간적 개혁의 시도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새 언약이 시행되고 새 언약에 따른 하나님 백성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의 성취이다. 눅22:2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것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그가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흘리실 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 언약이 시작됨을 알려주신다. 이 새 언약의 시대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연결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신다.
<메시지> 그렇다면 이 시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예레미야는 자기시대 안에서 새 시대의 사자 역할을 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했고, 인간적 제도를 비판했고, 오는 세대를 선포했다.
그러면서도 오해와 수치와 비방속에서 사역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그들을 위해 중보했으며 경건한 남은 자들이 소망을 갖도록 격려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모습이다. 우리도 이런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예레미야처럼 이 세상에 대한 관한 사실적인 관찰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이 세상에 대한 정화와 새롭게 됨, 회복을 마음속에 품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가 그 시대속에서 고군분투했듯이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군사로서 고뇌하며 시대를 변혁시킬 일군으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속에서 새 시대와 새 삶을 맞이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 시대는 예레미야 선지자 때와 같이 겉으로는 왕성한 것 같으나 속으로 고독과 절망과 삶의 무의미 속에 표류하는 때이다.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은 새 언약의 백성들, 즉,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케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이 땅의 진정한 회복을 갈망하는 경건한자들임에 분명하다.
예레미야는 옛 시대를 대표하는 세속의 물결과 새 시대를 표방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가운데 서있었다. 예레미야가 포로됨의 아픔과 회복의 소망속에서 긴장에 가득찬 삶을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긴장속에서 참된 소망인 새 언약의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의 삶으로 인해 참된 소망을 퍼뜨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향해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거룩한 분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시대의 하나님백성인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걸맞은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히스기야와 요시야시대의 종교개혁의 한계상황에서 일하셨다. 이스라엘이 비록 인간적 개혁에서 한계를 체험하고 절망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징계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맺은 새 언약이다(렘31:31). 이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다(눅22:20). 인간 개혁의 시도를 뛰어넘은 참된 개혁과 삶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돌아보자. 이 시대 역시 예레미야 선지자의 시대처럼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 공허한 때가 아닌가? 또한 탐욕과 불신과 불의와 부도덕이 난무하는 시대가 아닌가? 예레미야가 이러한 자기 시대의 정의의 위축을 목도하면서 탄식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사역할 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새 언약의 소망을 제시하시지 않으셨는가?
이제 우리 차례이다. 우리 역시 풍요로운 세대속에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팽배하는 시대속에 살고 있다. 그런 것들이 심각하게 이 시대를 타격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 우리가 이 시대의 전령으로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일이 비록 고독한 분투가 되더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새 언약이 이 시대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지할 때 우리는 고독한 분투자가 아니라 성령의 동력자로서 서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언제나 있어왔던 인간 개혁의 한계를 초극하는 하나님의 개혁을 이 땅에 선포하고 뿌리 내리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땅의 진정한 희망인 새 언약, 즉 십자가 복음을 제시하는 이 시대의 예레미야로 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모순된 이 세대를 바로 세우고 개혁시키는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