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요한복음 개관–믿으라! 보아라! 따르라!
어느 성도는 자신이 아내를 커뮤니티센터에서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다음에는 말을 바꾸어 성경공부시간에 처음 만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에는 자신과 아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탁자에 마주앉았을 때라고 했다. 과연 어느 말이 맞을까? 그러나 사실은 이 세 가지가 모두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커뮤니티센터에서 성경공부가 진행될 때였고 그들은 같은 탁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세가지 상황이 서로 보완해서 완전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왜 4복음서가 필요한가? 예수님의 대해 한 가지 복음서이면 충분하지 않는가? 요한복음을 비롯한 4복음서는 각기 처해진 상황에 따라 필요한 복음을 전했기에 모두가 우리의 신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저자>
저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도이며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이다. 기록연대는 대개80년대 중엽에서 90년대 초반으로 잡는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사두개인에 대한 언급이 적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었는데 요한복음이 성전 파괴(주 후70년) 이후에 쓰여졌기에 사두개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요한은 “갈릴리 바다”를 “다베랴 바다”라는 지명으로 분명히 하는데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바다로 대중적 차원에서 부른 것은 80년대나 9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셋째로, 만일 로마가 예수님께 했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도미티아누스황제 치하(주후81-96년)의 황제 숭배를 상기시킬 의도였다면 이 책의 기록연대는 주 후81년 이후가 될 것이 유력하다.
<수신자와 기록동기>
요한이 후반부에 사역했던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사람들이 주요 수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한 지역에 거주하는 독자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록동기는 첫째로 성전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요한은 유대교선교의 틀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고 선교의 촉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메시아가 성전을 대치하며(2:18-22) 유대 절기에 함축된 상징들을 성취하셨음을(특히5-12장) 보여주어야 했다. 둘째로 교회가 형성된 지 50년이 지나서 이방인 선교가 무르익었을 때이기 때문에 선교적 동기가 기록을 유발시켰다고 본다.
<구조>
요한복음은 “서론”(1:1-1:18), “표적의 책”(1:19-12:50), “영광의 책”(예수님의 십자가, 장사 지냄, 부활에 이어 성부와 함께 하늘 승귀에 촛점을 맞춤)으로 불리 우는 두번째 주요 단원(13:1-20:31) 및 “에필로그”(21장)로 이어졌다. 첫번째 주요단락인 표적의 책에서는 선정된 7가지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이 때 표적이라는 것은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진정 이 땅의 구원자로 지명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완전 수인 7을 통해서 증명하려는 시도를 말하신다. 요한복음에는 표적이라는 단어가 17번 등장하는데 이 모든 단어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믿도록 유도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래서 표적의 책에는 7가지의 표적들이 등장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2:1-12)
성전 정화(2:13-2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3-54)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47)
오병이어의 기적(6:1-15)
소경을 고치심(9:1-2)
나사로를 살리심(11:1-44)
이러한 일곱번의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보내신 분이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특이하게 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곱번”나는…… 이다(I am……)라는 선언이 기록되어있다. 이 “나는……이다”구절은 출애굽기3:14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기 지칭언어이다. 이 선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선언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48,51)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이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15:1)
이렇게 주로 전반부(1-12장)에서는 표적들과 예수님 자신의 선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보냄 받은 메시아 되심을 점진적으로 증거한다.
그리고 그 이후인 13-20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우주적 대권을 받으실 분으로 승귀 하시는 과정을 보여준다.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자신이 배반 당하실 것을 경고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킨다. 14-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떠나실 것과 제자들이 고난을 받을 것, 그리고 주님이 성령을 통해 다시 돌아오셔서 제자들이 증인의 삶을 살도록 강건케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후 17장에서 위대한 대제사장적 기도를 드리신 후에 18-19장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을 소개한다. 그리고 드디어 20장에서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진정한 영광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13-20장의 영광의 책을 통해서 주님과 제자들이 어떻게 이 땅에 참된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가와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과한 영광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온 우주의 주권자가 되시는 모습을 피력한다.
<메세지>
첫째로 표적의 책인 전반부에서 살펴볼 것은 과연 표적의 의미가 무엇을 의도하는 것 인가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메시아적 표적으로서의 기적들은 요한복음의 전반부(1-12장)을 지배하면서 자신의 부활을 예고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전반부에서는 특별히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이 크게 드러난다. 이곳에서는 우리 인간실존의 심각한 문제들 가운데 어떻게 깊이 개입하셔서 해결하시는지를 보여준다. 특별히 많은 숫자들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장면의 경우 요한은 많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실에 주목한다. 성전을 정화하신 장면에서는 성전을 짓는데 걸린 오랜 세월과 “새로운 성전”인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대조된다. 백부장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은 매우 먼 거리에서 일어난 어려운 기적이고, 고침 받은 병자는 병든 지 무려 38년이나 된 사람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많은 무리를 먹이셨고 고침 받은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였다. 끝으로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상태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아적 신분의 놀라운 본질을 강조하고 보여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신적 메시아 되심을 보여주는 의도로 행해진 일곱가지 표적들이 잘못된 사람들에 의해 그릇되이 수용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죄성이 깊은 인간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신적인 메시아사역의 예표들을 진실되이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욕구충족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6:26). 따라서 표적을 기초한 믿음은 때때로 천박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참된 선의로 베푸신 표적들 일지라도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되거나 간과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그들은 주님의 참된 뜻, 즉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남아있게 된다. 표적이 때로는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으로 이끌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긴박한 상황속에서 표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는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표적, 즉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주어져 있지 않는가? 더 이상 우리의 믿음을 위해 표적을 구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정당한 요구도 아니다. 요한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표적의 정점인 그리스도의 부활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붙잡고 흔들림 없이 믿음의 길을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인 후반부의 영광의 책(13-20장)에서 보여주는 교훈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우리의 삶의 방향이다. 요한은 복음서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영화의 과정인 것으로 소개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과정을 시작으로 해서 부활에 이르셨고 승귀 하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게 되셨다. 따라서 십자가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과 승귀를 위한 필연적인 길이다. 그래서 요한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 형을 고결한 죽음으로 제시한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에게 수치를 주려는 반대자들의 간악한 행동이 있었다. 예수님은 결박 당하시고(18:12,24), 얼굴을 가격 당했고(18:22), 채찍질 당하며 군사들에 의해 가시면류관과 자색옷으로 조롱 당하셨다(19:1-3). 그리고 십자가를 짊어지셔야만 했고(19:17)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벌거벗겨지고 수치스러운 죽음에 던져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강요되었기에 억지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결한 길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임을 요한은 보여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적들이 성공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부하나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아버지의 일을 성취하기 위한 복종의 길이며 동시에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되었다고 요한은 기록한다.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자발적인 순종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인류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 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속죄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값진 표현이며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는 구원의 죽음임을 선포한다(3:14-17).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을 피할 수 없어 억지로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 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13-20장에서는 비록 사건의 전개가 긴박하게 돌아가지는 않아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촛점을 맞추면서 그 십자가의 길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이루고, 인류에게 유익을 끼치는 대 사건임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는가? 1-12장에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상징하는 표적들을 보고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표적을 보고 믿음의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에 유익을 끼치는 십자가의 길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 세상의 영광을 취함으로써 가 아니라 주님이 걸어갔던 그 십자가의 길을 주님의 모범을 좇아 따라 감으로서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자세히 관찰하고 감동받고 따라갈 때 그 길이 십자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 길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된 성도의 걸어갈 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길을 따라 믿음과 순종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본분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교훈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구조속에서도 발견된다. 요한복음의 서론부분인 1:1-18에서의 핵심권고는 “믿으라”이다(1:7,12). 그리고 본론인 1:19-20:31에서의 권면은 “보아라”이다. 다시 말해 본론속에는 예수님의 “표적”이라는 단어가 17번 등장하면서 예수님의 신적 메시아 되심을 보여준다. 그러면 결론적인 에필로그에서의 권면은 무엇일까? “따르라”이다(21:19,22). 무엇을 보여주는가?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구주 되심을 보았으면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길을 따르라는 것이 요한복음 저자의 강력한 권고인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우리 한국교회의 자화상은 어떠할까? “믿으라”와 “보아라”까지는 잘 도달하는 것 같다. 세계의 어느 교회들보다 “믿음”이 큰 것 같고 많은 현상들도 나타나서 본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믿어라”와 “보아라”를 넘어서 “따르라”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맘몬 우상(돈과 물질을 숭배하는 우상)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 시대속에서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서 주님이 걸으시고 권면하셨던 그 길을 “따르고”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은 서론인 “믿으라”와 본론인 “보아라”까지는 잘 행하는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결론인 “따르라”에 있어서는 실족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세상에 결론이 없는 이야기는 없다. 특별히 신앙세계에서 옳게 마무리되는 결론이 없다면 그것은 지붕을 덮지 않는 집과 같은 것이다. 오늘 이 시간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자!
나는 과연 “믿으라”, “보아라”, “따르라”는 주님의 그 음성에 참된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순종하고 있는지를……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