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요한1서 개관: 우리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나?
요한1서에 대한 강의에서 마틴 루터는 “나는 이렇게 단순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이렇게 형언할 수 없는 묘사를 한 책을 읽어 본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요한1서 저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편으로 요한사도는 우리들에게 경건하고 거룩한 삶 전반을 가르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랑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지침을 내려준다. 요한사도의 이런 가르침은 체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권고를 통해서 다양한 가르침을 준다.” 윌리암 펜은 요한1서에서 주어진 새 계명 때문에 너무 큰 감명을 받았기에 펜실베니아주의 최고 도시를 필라델피아, 즉 “형제 사랑의 도시”라고 불렀다.
<저자>
초대교회 전통은 요한1서의 저자가 세베대의 아들 사도요한이라는 사실을 만장일치로 고수해 왔다. 물론 요한1서는 히브리서처럼 공식적으로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고 서신의 어느 구절도 어느 이름이나 묘사를 통해 저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 많은 초대 기독교 저술가들은 이 서신의 저자로 요한을 지칭한다. 내적으로 요한1서는 어법과 구문상으로 요한복음과 매우 닮았고 공통적 논지들 혹은 용어들이 드러난다(생명, 빛, 믿음, 증거, 진리, 내주, 계명 지킴 등). 공정하고 면밀히 살핀 주석가들은 이 서신이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한다.
<기록 연대 및 장소>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전통은 요한이 소아시아에서 그리고 에베소와 그 근처에서 남은 시간을 보냈음을 강하게 나타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후66년 유대반란이 있은 직후의 어느 시기에 팔레스틴에서 소아시아로 사도들의 대 이동이 일어났다. 우리가 요한복음이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할 때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90년대 중엽의 이른 어느 시점일 것이다.
기록장소를 살필 때 우리는 고대의 전통을 참조할 수 있다. 고대 전통은 요한이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생애의 후반을 보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폴리크라테스는 로마의 빅터에서 보낸 서신에서 요한을 에베소에 매장된 지도자들 중의 하나로 불렀다. 이레니우스는 요한이 트라야누스황제가 통치할 때까지 영구적으로 에베소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의 요한의 사역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이에 반하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에베소 전통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수신자>
본서속에는 요한이 “자녀들아” “아비들아” “형제들아” “사랑하는 자들아”등 회중속에 있는 다양한 무리들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있다. 그들 청중에게 이런식으로 안부를 묻은 것은 요한과 그 독자들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설정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요한1서는 특정한 이름과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특정한 사건에 대한 언급도 거의 포함되지 않으며 요한이 가능한 한 많은 신자들에게 서신을 보내기 위해서 폭넓게 관련된 중요한 진리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1서가 주로 에베소와 에베소 주변에 있던 이방인 교회들에게 보내진 회람서신이었던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상황>
본 서신은 받는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 예수님의 행위와 죽음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했다. 그들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교정하면서 육신을 입은 아들의 삶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입장을 가진 형제자매들과 계속 연합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기 위해 갈라져 나왔다. 사도요한에 의하면 그들은 그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불화를 야기했던 경쟁과 분열이 촉발되자 공동체를 떠났고 그로 인해 사랑과 연합의 언약을 파기했다. 이러한 분리주의자들은 그들이 사고하는 방식 안으로 그리고 그들의 교제 안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끌어들이는 일에 치중했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사도요한은 이러한 분리주의자들을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기록 동기와 목적>
이러한 상황속에서 요한1서가 보내졌던 교회들은 거짓 교사들이 최근에 교회를 떠남으로 인해 분명히 고통스럽고 불쾌했을 것이다. 그 남은 교회성도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거짓교사들이 떠남으로 겪게된 최근의 대격변의 상황속에서 이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해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거짓교사들의 정체를 알려줌으로 성도들을 견고케 세울 필요성 역시 존재했다. 이러한 이탈자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부인했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과 관련해서 더욱 그러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동안 이탈자들은 죄의 개념을 거부하면서 어둠가운데 행했다. 이렇게 이탈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에 대해 불순종했고 죄의 중요성을 최소화시키는 윤리적 타락으로 새로운 도덕을 제시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탈자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신앙관으로 에베소와 그 근처에 있는 교회들속에 침투하여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노년의 사도요한은 이 상황을 말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따라서 사도요한은 성도들이 올바른 교리안에서 믿음과 사랑을 결합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된다.
<구조 및 개요>
요한1서는 그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그 구조를 주제별로 혹은 저자의 사상의 흐름대로 일목요연하게 재단해 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저자의 논리의 흐름이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가기 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게 여러 주제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바울처럼 교리를 다룬 다음 그 뒤에 그에 상응하는 윤리를 제안하기 보다는 교리와 윤리를 한 묶음으로 취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구조에 대해 분명한 것은 요한이 반복적으로 세가지 핵심 논지들을 순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 계명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에 따라 개요를 나타낸다면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겠다.
- 서문(1:1-4)
- 일생의 시험들: 주기 1(1:5-2:27)
(1) 죄 대(對) 순종(1:5-2:6)
(2) 서로를 향한 사랑(2:7-17)
(3) 옳은 기독론(2:18-27)
3. 일생의 시험들: 주기 2(2:28-4:6)
(1) 죄 대(對) 의(2:28-3:10)
(2) 서로를 향한 사랑(3:11-24)
(3) 옳은 기독론(4:1-6)
4. 일생의 시험들: 주기 3(4:7-5:21)
(1) 서로를 향한 사랑(4:7-21)
(2) 옳은 기독론(5:1-15)
(3) 죄 대(對) 생명(5:16-21)
<주요 메세지>
사도요한은 요한1서를 통해 이상적인 신자들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과연 이 시대의 이상적인 신자들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특별히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호주내의 교회안에서 성도들의 이상적인 모습은 어떠할까? 안타깝게도 어떤 성도들은 백화점식 구매방식으로 교회를 선택하고 신앙생활을 한다. 일명 강남형 교회와 같이 모든 것이 잘 구비된 괜찮은 교회에서 시시때때로 제공되는 최첨단의 프로그램을 누리면서 시대를 앞서가는 지위를 확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교회안에 의외로 꽤나 많은 모양이다. 이왕 신앙 생활할 바에야 그래도 규모와 함께 힘도 갖추고,헌신과 봉사보다는 누릴 것이 많은 쪽을 택하는 것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절기를 따라서 꽤 다양한 프로그램과 특별순서들이 준비돼 있고 내가 선택해서 누릴 수 있으니 더 좋다. 그러나 그런 것이 과연 이상적인 이 시대의 성도들 모습일까? 교회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교회에서 무슨 유익을 얻기를 원하기 보다 교회를 통해 나의 섬김이 하나님과 세상을 순전히 흘러 들어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큰 교회 성도이면서도 이상적인 신자가 될 수 있고 작은 교회 멤버이면서도 역시 이상적인 신자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아마 교회를 통해 어떤 유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내가 교회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동참하느냐일 것이다. 요한1서의 독자가 되는 교회에는 이런 갈망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분리주의자들이었다. 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합당한 고백과 온전한 헌신이 아니라 교회내에서 힘을 과시하려던 그들은 결국 분파를 이루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사도요한은 그 이유가 그들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은 대부분 악마적 힘에 감염되어있기 때문에 세상적 가치와 야망에 얽매이게 우리를 유도한다. 교회와 성도가 이런 세상적 가치관에 연합하면서 다름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와 다름없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더 얻고 누리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의 가치와 기대를 반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그 분 앞에 선 것이다. 이것이 변화된 삶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품격 높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을 담고 살아가는 변화된 삶이 없다면 우리의 삶과 믿음은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위해 사랑과 헌신이 필요함을 사도요한은 역설한다. 우리는 삶의 현장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드러내기 위한 씨름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헌신은 분명하게 사랑의 동기에서 발현될 것을 사도요한은 촉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성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분리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교회를 휘젓는 상황속에서 사도요한은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과 사랑에 뿌리를 내리는 참 신앙의 공동체로 견고해질 것을 강권한다. 이때에만 참된 신앙의 성숙을 맛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드니 지역에는 크고 작은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믿음의 분투를 하고 있다. 특별히 작은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가 작다고해서 그것이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씨름에서 미미한 역할을 한다고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이상적인 교회와 신자들은 교회의 규모와 관계없이 이 다섯가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항상 확인하면 좋지 않을까?
첫째, 우리는 성령을 통해 경험했던 삶이 변화되는 회심을 체험했기에 그리스도안에서 확신가운데 서 있는가?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에 순종하고 있는가? 셋째,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셨던 하나님의 그 본질 때문에 사랑하고 있는가? 넷째,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안에서 성숙하고 우리의 인격을 숙성시키고 있는가? 다섯번째, 그리함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다름의 행동속에서 거룩한 충격파를 던지고 있는가?
이러한 그림들을 우리의 삶속에서 그려 나아갈 때에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그 분의 다스림이 우리속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제자로서의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점검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임을 인식하면서….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