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유다서 개관: 잠자고 있는 교회를 깨우는 외침
유다서는 공동서신(일반서신)의 마지막 책이며 신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 중의 하나이다. 유다서는 서신(편지)처럼 시작하고 송영으로 끝나지만 본체는 서신이라기 보다는 논박 혹은 설교에 가까운 요소들이 많다.
<저자>
1절에서 저자는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형제”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형제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형제 유다를 저자로 생각한다. 만일에 이 야고보가 신약성경 기자인 야고보를 가리킨다면 이것은 신학적인 면에서 야고보와 연계성이 있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유다도 야고보처럼 믿음과 행위의 조화를 강조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다 역시 믿음을 강조하고(3,20) 동시에 행위를 강조한다(22-23).
<기록 연대 및 수신자>
학자들에 의하면 유다서는 베드로후서의 연대보다 앞선 것으로 판명된다. 따라서 유다서는 주 후64-68년경의어느 시점에 발생한 베드로의 죽음보다는 앞선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거짓교사들 사이의 유사성은 더욱더 이 두 서신의 비슷한 기록연대를 지적해 준다. 따라서 60년대 초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신지에 대한 암시는 유다서내에 없다. 하지만 17-18절에서 독자들이 회심할 때에 저자가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다고 되어있는 것을 보면 저자는 수신자들의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다. 이들은 주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의 목회와 책임영역에 들어왔다는 것과 유대문헌과 전승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서신내의 증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문헌과 전승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알려질 수 있었고, 거짓교사들이 율법폐기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은 유다서의 수신자들이 이방환경에 노출된 유대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상황>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리스도안에서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었으며(1) 애찬을 나누면서 상호간의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를 공궤했지만(12) 그들속에 부정적인 상황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안에 대적자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밖에서 가만히 들어온 자들로(4)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신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었으며(4) 유일한 주재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했다(4). 뿐만 아니라 교회론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분당주의를 통해 자기들에게 속한 무리만을 목양함으로써 당을 지었다(12,19).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건전치 못한 신학으로 인해 윤리적인 방종을 야기시켰다. 육체적인 타락과 쾌락에 종사했다. 이로 인해 유다서의 수신자들은 의심과 멸망과 타락이라는 부정적인 상황에 처해있었다.
<기록 동기>
따라서 유다는 이러한 거짓교사들인 이단과 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거짓교사들에 관한 설명으로 가득찬 서신의 주요 부분인 4-19절은 독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험을 묘사하고 이 위험에 대처할 법을 20-23절에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유다서는 복음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도덕적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교사들의 억지주장에 대한 반론을 전개하고 수신자들을 바른 신앙 위에 세우고자 작정하고 본 서를 기록한다.
<개요>
- 도입-인사말과 서신기록의 필요성(1-4)
- 거짓교사들에 대한 묘사와 경고(5-19)
(1) 그들의 부도덕성(5-7)
(2) 그들의 신성 모독(8-10)
(3) 그들의 지도력(11-12a)
(4) 그들의 불법(12b-13)
(5) 그들에 대한 심판(14-16)
(6) 그들에 대한 사도적 예언들의 성취(17-19)
3.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20-23)
(1) 그들 스스로 안에서(20-21)
(2) 침입자들에게(22-23)
4. 송영(24-25)
<내용>
서두(1-4)에는 일반적인 저자에 대한 언급이 담겨있고 서신의 본문의 대부분은 거짓교사들에 대해 언급한다(5-16). 이 부분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5-10절, 11-13절, 14-16절) 각 단계에서는 거짓교사들에게 임할 정죄를 묘사하거나 선언하기 위해 구약성서와 유대작가들에게 취한 예증들과 인용문들을 사용한다. 첫 단계에서 모세오경에서 취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들을 인용하고(광야세대, 범죄한 천사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거짓교사들을 그들과 동일한 범주에 집어넣는다(8-10). 둘째 단계에서는 거짓교사들에게 “화”를 선포한 후에 그들을 구약성경의 세 명의 악한 죄인들(각 각 나름의 방식대로 배반한 가인, 발람, 고라)과 연결한다. 연이어 거짓교사들의 악한 행위와 특성을 묘사한다. 14-15절에서는 거짓교사들의 정죄를 알리기 위해 이 악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마친다. 17-19절은 거짓교사들에 대한 묘사와 정죄에서부터 성도들에게 주는 직접적인 권면으로 이동한다. 20-21절에서 신자들에게 두 가지 권면을 하고 22-23절에 신자들에게 거짓교훈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라고 권하는 세가지 권면이 담겨있다. 이 서신의 결론에서는 전형적인 마지막 인사말, 동역자와 여행계획, 기도요청 등이 아니 유명한 송영으로 마친다.
<주요 메시지>
우리시대의 특징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다원주의사회이다. 절대적 기준의 진리나 삶의 증거를 거부하고 나름대로의 진리가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진리의 유일성을 교회 내에서도 주장하기를 꺼려하게 한다. 마치 산꼭대기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어느 산책로를 이용하든지 정상에 오르면 되듯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정상은 하나이나 그 오르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다는 사상이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여러 종교들은 같은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통해 다른 산꼭대기로 향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교회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쟁이 발생할 수 있다. 교회안에서의 모든 외침과 가르침이 동등하게 우리의 신앙여정을 올곧게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성경이 제시한 산정상이 아니라 다른 꼭대기를 목표점으로 삼고 끌어가는 지도자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런 거짓교사들이 존재했었다.
본서에 등장하는 이단적 거짓선지자들은 그리스도안에서는 속박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이제 어떤 영역의 삶속에서도 자유할 수 있다라고 역설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은 성도들로 하여금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양심과 신앙의 가책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으로 오해 시켰다. 죄짓는 면에서도 자유 하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반율법주의 영향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들로 하여금 어떤 형태이든지 그들이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유를 갖게 한다는 오해를 했었다. 결과는 열매 맺는 삶에서 실패하고 도덕적 타락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중대한 오해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용서되었을 때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거룩한 삶으로 반응하게 하시는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상기해야 한다.
유다서 저자는 본서를 통해 그들 중에 거짓교사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의 가르침이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분명히 정죄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거짓교훈의 위험한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분별력 있는 신앙에 몰두하기를 권면하다. 수신자들은 마치 교회와 교리안에서 자신들을 편안하게 하는 거짓선지자들의 자장가에 영향을 받아 잠자고 있었는데 이제 유다는 그러한 교회와 성도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바른 신학과 신앙속에서 온전한 열매 맺는 삶으로 매진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그 당시 수신자교회는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교회속에 침투한 거짓가르침과 그 영향력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번영의 신학이 팽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다서를 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반율법주의라는 자장가에 취해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들이 잘못 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평안함을 외쳤듯이, 오늘날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번영의 신학이 불러주는 자장가에 깊이 잠들어 있어 참된 진로를 벗어나고 있다. 번영의 신학은 어떤 자장가를 불러주는가? 예수믿어 커지는 것이 목표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는 주님의 쩌렁쩌렁한 음성에는 귀 막고 번영의 신학이 불러주는 자장가에만 심취되어 깊이 잠들어 있다.
건전한 교리속에서 이 땅에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한번 따라가 보자는 마음에서 솟구치는 의기투합보다는 예수께서 한번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신약성경에서도 업급되지 않은 물질적 축복이라는 사탄이 던져주는 달콤한 말에 함몰되어 비틀거리고 있다.
어느 시대든지 거짓선지자들, 거짓교사들은 존재했다. 유다서 당시에 거짓교사들은 비도덕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는(4)일에 선구자가 되었듯이 오늘날의 거짓선지자들은 번영신학이라는 피켓을 들고 사람들을 모으면서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주님의 반대편에 세우고 교회를 심히도 쇠약하게 하고 있다. 이제 교회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그 번영신학에 대한 반문화적 태도를 보여야만 할 때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교회와 사회속에 침투해서 은근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반성경적 가치관과 관행에 대해 날선검을 들이대면서 아픔을 감수하더라도 그 환부를 도려내는 사람들이다. 구약과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을 그러한 용감한 행동을 보였다.
유다는 본서를 통해 거짓교사들을 찾아낼 진단도구들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비도덕적인 삶의 양식, 이기주의와 자기 중심적 성향,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물질주의적 동기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상은 이러한 지적에 부끄럽게도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더 심화된 부분은 없겠는가? 예수님과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걸으시며 세상을 깨우쳤던 그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길에서 멀어지고 언제나 성도들에게 가장 큰 대적이었던 맘몬(물질의 신, 돈의 신)이 실질적으로 오늘날의 성도들의 마음속에 숨어서 자리잡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을 돌아보면 우리가 치유해야 할 영역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어찌 우리들은 번영의 신학이 불러주는 자장가에 깊이 취해 영적인 잠에 빠져들어 주께서 가셨던 그 길에 서기를 주저하며 세상적 기준과 동일한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 태도, 그리고 물질주의에 깊이 빠져있는가? 초대교회 시대에 유다가 반율법주의적이고 방임적인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잠에서 깰 것을 촉구했듯이 오늘날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시대의 가장 큰 매력임과 동시에 유혹인 맘몬주의에서 벗어남으로 번영의 신학에서 탈피해 십자가에 길을 걷도록 강권한다.이것이 이 시대에 영적인 각성 없이 잠자고 있는 우리를 깨우치는 성령의 외침이 아니겠는가?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