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이사야서개관 – 고난의 길을 걷는 이 땅의 남은 자들
구약의 책들중에서 그 장엄함과 광휘에 있어서 이사야서에 필적한 만한 책은 아마 드물 것이다. 이사야서는 구약에서 시편, 예레미야서와 함께 가장 부피가 큰 동시에 매우 중요한 책이다.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 가운데 이사야서 사본은 무려 15개 이상이나 된다. 더욱이 이사야서는 세례요한과 신약저자들에게 지대한 여향을 미쳤다. 신약에서 이사야서는 무려 411번이나 인용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이사야서에 관련된 주석이나 책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만큼 교회 역사상 큰 영향을 미친 책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사야서의 사역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누인다.
<첫째> 사회비판시기(2-5장) : 약 주전 740~734년
<둘째> 수리아, 에브라임 전쟁(7-9장) : 주전 734~732년
<셋째> 반 앗수르 모반시기(10-23장) : 주전 713~711년
<넷째> 반 앗수르 모반과 예루살렘 포위(28-32장, 36-39장) : 주전 705~701년
이 시기들은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통치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시대적 배경>
이사야가 선지자의 사역을 시작할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로서 상당한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던 때였다. 왜냐하면 웃시야왕은 유다에 번영과 평화를 가져왔고 군사적으로 공교한 무기를 만들어서 화살과 돌을 발사하게 했으며, 이웃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와 화친했고 영토는 옛날 솔로몬 때의 영토를 북이스라엘과 함께 다 회복했다. 이렇게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나라를 부강하게 했던 왕이 죽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안을 느끼게 하며 나라의 장래를 염려케 할 수 있다.
더욱이 요담이 웃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그때 이미 유다는 물질적으로 부유하였으나 가치관과 신앙이 타락했다. 따라서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던 때의 고대 근동의 정치구조상의 급격한 변화를 말하기에 앞서 유다와 이스라엘내의 탐욕과 부정을 먼저 고발한다. 이때는 앗시리아가 디글랏 빌레셀3세(B.C745~727년)의 통치아래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며 팔레스틴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였다. 오랫동안 앗시리아의 폭정에 시달린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는 다메섹왕 르신과 반 앗시리아 동맹을 결성한 후 요담에게 이 동맹에 가담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유다는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기로 하고 거절한다. 베가와 르신은 배후에 중립적이지만 적대적이 될 수 있는 잠재 세력을 놓아두지 않기 위해 유다를 응징하기로 한다.
당시 요담은 죽고 아하스가 왕위에 올라있었다. 한편 주전8세기 내내 유다에 복속되었던 에돔은 이 기회에 독립을 되찾고자 동맹군에 가담해서 유다를 공격한다(대하28:17). 블레ㅅ도 네게브와 스불라지역을 공격하여 몇 몇 성읍을 취한다.(대하 28:5-15) 이제 유다는 세 방면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다.이에 왕좌가 위태로와진 유다왕 아하스는 앗시리아왕 디글렛 빌레셀에게 엄청난 선물을 보내며 도움을 애걸한다. 그로 인해 디글랏 빌레셀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북방 이스라엘을 황폐화 시키고 곧 이어 살만에셀5세가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폐망 시키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국제정세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책의 구조>
이사야서는 크게 둘로 나누인다. 전반부 1~39장은 심판의 메세지고, 후반부 40-66장은 위로의 메세지다
심판의 메시지(1-39장)인 전반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지적한다. 이스라엘은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1:4)이었으며, “살인자들뿐인 성읍”(1:21)이 되었다.또한 들포도를 맺는 포도원(5:4)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불의를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 없으셨고 이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의 심판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유다는 멸망하고,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살아계신 유일한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다. 과거의 일들을 압도할 엄청난 새 일을 행하실 것임을 후반부에서 선포하신다. 그 새 일이 무엇인가? 물론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도 포함되지만(48:14,20-21) 그 이상의 것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새 일이란 단지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포함한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그토록 여러 번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교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여 가시는가?
첫째, 남은 자 사상을 통해서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을 거룩한 자이시며 구원자이시며 구속자로 그리는데 이점은 깊은 긴장을 남긴다.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결과적인 공정한 심판이 하나님의 『은혜 및 약속』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그 답은 하나님은 남은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신다. 남은자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재난(보통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주어진 재난)을 겪고 살아 남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인류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 계속 보전되는데 있어서 중심핵이 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결국 진실한 자들이 되며 새롭게 선택된 하나님백성의 중심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이든지 남은 자들을 통해서 그의 거룩하심과 그의 나라를 존속, 확장시켜 나아가신다. 그들은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 같이(6:13), 감람나무 꼭대기에 남은 감람나무 열매같이(17:4-6), 산꼭대기의 깃대같이(30:17) 남겨져서 시대를 밝히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굳게 설 이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진정한 남은 자가 되어서 시대의 헛된 풍조를 거슬러 항해하는 믿음의 진군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살 결단을 할 때에만 이 시대의 진정한 남은자가 되고 그 삶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렇게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종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 땅의 종이 되는 것이 진정한 희망인가? 그리고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인가? 그렇다. 이사야서는 시종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을 이야기한다. 종의 사역을 통해 얻게 되는 첫번째 교훈은 7-12장에 나오는 종되신 왕의 영상에서부터 볼 수 있다. 7-12장은 B.C735년의 앗시리아 위협을 배경으로 한다. 앗시리아의 위협아래 유다가문은 두려움에 싸이며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요동한다. 이때 유다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느끼는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강력한 왕이 필요한가? 그러나 이 때 하나님께서는 한 아기에 대한 환상을 주신다(9:6). 세상이 잔혹함과 억압으로 달려들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은 더 잔인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의 노래의 마지막 부분으로 알려진 52:13-53:12에 나타났듯이 잔혹함과 억압은 그 자신에게 돌리고 대신 사랑으로 되돌려주는 삶을 통해서이다.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남은자들의 최고의 능력임을 증명한다.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가시고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진정 만유의 왕이시지만 왕적 특권을 버리고 종의 길을 걸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의 뒤를 따라가는 이상적이고 회복된 이스라엘의 갈길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후반부인 40장부터는 종의 노래가 집중적으로 4번 나타난다(42:1-4;49:5-6;50:4-9;52:13-53:12). 이 노래들을 통해서 이 여호와의 종이 고난받는 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52:13-53:12의 종의 노래에서 고난이 종에게 주어진 사명의 본질적인 내용중의 일부분이 아니라 거의 사명 전체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고난의 종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기가 범하지 않은 죄를 담당하고 처절하게 고난 당한다. 예수님을 나타낸다. 이 고난의 종은 철저한 고난과 패배를 겪은 후에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때 승리를 선포하신다. 고난의 종의 승리는 반드시 고난 너머에 있다. 고난의 종의 사명은 고난 없이는 불가능하다. 무엇을 교훈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전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승리의 방식은 힘이나 웅장한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고난의 종의 희생적 노력에 의해서 세워진다. 이 일을 성자 하나님이신 우리주 예수님께서 행하셨다. 그분은 고난의 종으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으나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승리를 입증하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사모하고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땅히 이 시대의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한다. 고난의 종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희생을 통해 승리와 하나님나라를 얻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선교적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다. 고난의 길을 걸으며 여호와의 종의 반열에 서기를 주저하거나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한 시대속에서 이사야는 이 시대의 참된 종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준다.
셋째로 이렇게 하나님의 종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함을 강조한다. 이사야서에는 의로움이란 말이 61회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종들의 삶을 의로 이끄신다. 이 의란 무엇인가? 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의가 있다. 하나는 법정적인 의로서 의롭지 않은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하시는 칭의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의로운 종을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의 때문에 의로운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53:11). 그들에게 유일한 필수조건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의는 주로 후반부인 40-66장에 나타난다. 그러나 1-3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또다른 의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속에 나타나는 행동으로 구약성경에는 공의로 표현된 의이다. 이 둘 중 무엇이 중요한가? 둘 다 중요하다. 균형있는 시각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랬듯이 진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의도 중요하지만 구원받은 인간의 책임있는 행위로서의 의도 역시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심을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고 복음의 진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사야서를 비롯해 모든 성경들이 삶속에 나타나는 행동에 따른 의를 강조했음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하셨는가? 구원시키기 위해서인가? 맞다. 그렇다면 구원이 무엇인가? 단순히 지옥의 정죄에서 면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적극 참여하는 현재적인 삶이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이기적인 종교관습에 치중하는 것을 기쁘게 보시지 않으신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었다면 이제는 등잔이 되어서 열방에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됨으로 공의를 실행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주심이 필요한 것이다.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받아 들이는 의”뿐 아니라 “행하는 의”를 통해서 이 시대에 우리 몫으로 남겨진 남은자와 거룩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풍전등화격의 유다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진정한 희망을 하나님의 징계 이후에 나타날 남은자에게서 찾았다. 또한 그들이 고난의 종으로 이 땅을 거룩하게 변모시킬 비젼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 주권적인 하나님의 의와 책임있는 우리들의 공의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 땅에 충만히 이루어지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발 디디고 사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의 노래가 울려 퍼질 수 있음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