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전도서 개관 – 허무주의와 쾌락주의를 극복하고…
우리가 전도서를 잡고 읽기 시작할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일까? 1장1절에서 전도자가 자신을 소개한 후에 곧장 선언하는 말이 실로 우리를 당혹케 하지 않는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이런 허무함의 5중주를 들으면서 과연 우리는 전도서 읽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지속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런 허무함의 강조로 인해 전도서는 전체 정경의 입장에서 볼 때 설득력이 없는 책으로 간주된 시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도서에는 구약의 핵심적 내용인 아브라함의 언약이나 출애굽구원의 사건, 또는 약속의 땅에서의 하나님의 특별한 다루심이 등장하지도 않고 선지자들을 통한 위대한 미래에 대한 선포도 들어있지 않다. 오히려 세속적이고 염세주의적인 책과 같이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 선언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1:2) 역시 같은 말로 본서의 말미를 장식한다(12:8).
이로 인해서 이 책이 마치 다른 성경들과 심각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전도서는 진짜 그런 류의 책인가?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저자에 대해>
1:1을 보면 저자를 솔로몬으로 소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사실 본문 속에는 솔로몬을 저자로 인정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실제적인 저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큰 데 왜 저자를 솔로몬과 연결시켰을까? 그것은 솔로몬만큼 전도서에 나오는 삶의 영역을 드나든 사람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전도서가 말하고 있는 삶의 내용들이 솔로몬의 인생여정 속에 깊이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도서에서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지혜, 부, 즐거움, 영향력 들을 예시할 수 있는 인물 중에서 솔로몬보다 더 나은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목적과 방향>
전도자는 자신의 오랫동안의 사색과 경험을 통해 얻은 사상적인 또는 실제적인 유익들을 젊은 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지혜교사였다. 전도자는 그 학생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그저 자신들의 부와 힘과 지혜를 축적하는데 그칠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부와 힘과 지혜 등을 자신의 욕심과 타인에 대한 압제와 불의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반면, 보람 있는 형제애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면서 그들이 후자의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할 목적으로 이 글을 썼다고 보면 된다.
<중요 주제들>
1. 모든 것이 증기이다.
역시 우리가 가장 먼저 대하게 되는 전도서의 분위기는 허무함이다. 행복한 낙관주의로 가볍게 상쇄시켜서는 안되는 전도서의 지배적인 1차적 주제와 어조는 모든 것이 철저히 허무(헤벨-증기)하다는 것이다(1:2 ;12:8). 이 첫번째 주제인 허무를 드러내기 위해 전도자는 전도서를 해석할 수 있는 구조를 제시하면서 헤벨(증기-허무)이라는 주제어를 37번 등장시킨다. 또한 헤벨(h-5, b-2, l-30)의 숫자가치가 37인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라 하기 어렵고 또한 전반부와 후반부에 각각 111개의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헤벨(허무) 숫자가치(37)의 세 배수이다(37×3=111). 의심할 여지없이 헤벨(증기-허무함)은 가장 중요한 단어로서 전도서의 가르침을 파악하는 1차적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이 증기(헤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한 허무함일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공허함을 가리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길과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가리킨다. 진정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이 우리의 상대적인 무지와 무력함에 방대한 간격으로 존재함으로 인해 발생한 『인간적 한계와 좌절』을 허무로 표현한 것이다. 전도자가 이 허무를 그 유명한 어구인”해 아래 새것이 없다”(1:9) 라고 말할 때 그는 지금까지 생소하거나 새롭게 되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배제한다면 인생의 순환 속에 뛰어들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그것은 아마도 전도자가 새 것에 속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인간적 한계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질 허무한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사실상 우리 인생을 허무(헤벨-증기)로 만드는 것 중의 최고자는 죽음이 아닌가? 죽음이야말로 모든 인간 활동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모든 것을 덧없고 불가해할 것”으로 만든다(3:19-20 ; 4:3 ; 9:3-6,10-12 ; 11:8-12:7) 왜 허무한가? 인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시도를 철저히 무력화시키는 죽음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허무”라는 말이 우리로 하여금 염세주의적 사고와 삶의 방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인간들은 지혜나 부, 또한 다른 인간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보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되고 복된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초점을 맞추도록 권면하기 위해 그 기초석으로 허무를 직시하고 극복하도록 전도서는 우리를 이끈다. 참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배제한 삶이 허무하다는 선언은 결국 염세주의적 표방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이끌어 주는 선구자적 외침일 뿐이다.
2. 하나님께 대한 경외
허무(헤벨)라는 말이 전도서에 37회 등장함과 더불어 전도서는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약 40여 회에 걸쳐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특수진술로 허무를 대항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님 없는 삶은 어떤 경우에서도 허무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을 가장 깊이 체험한 인물이 저자가 은연중에 지목하는 솔로몬이 아닌가? 그 당시의 어떤 부류의 사람들보다 “부와 명예와 권력과 세상적 즐거움”을 향유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헛되다”는 탄식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와 명예와 지식이나 권력은 전혀 무익한 안개와 같은가? 우리는 결국 세속적인 염세주의에 파묻히게 되는가? 세상을 등지고 어떤 적극적 시도도 접은 채 살아야 하는가?
전도서는 아니라고 답한다. 하나님의 뜻과 연관이 될 때, 즉 다시 말해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계획과 포부와 향상에 대한 욕구가 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져서 이웃을 향한 유익한 도구로 쓰여지는 자리에 설 때, 그것 조차도 허무하고 무익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권력에 대해서는 헛된 악마적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갈등해소와 인간평등을 주창하고 실제로 이룩한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직과 그 권력에 대해 손가락질 하고 폄하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전자가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증기”와 같은 무익한 사욕을 추구했지만, 후자의 경우는 자신을 평생 희생하면서까지 형제우애적 평등의 사회를 위해 획득하고 사용한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권력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될 때 그것은 결코 “헛된” 증기와 같은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인간 욕망의 발로를 따라 무한 추구하는 어떤 종류의 욕망도 허무한 것으로 결말이 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길을 묻고 선택하고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에서 얻는 물질이나 권한이나 지혜는 헛된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행하는 행동은 허무를 넘어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 아래에서”라는 말의 등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전도서에는 “해 아래에서”라는 말이 무려 29회 사용되는데 이것은 해 아래 사는 우리들이 “해 아래가 아닌 곳” 즉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과 대비를 촉구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어떠한 방편에서든지 하나님의 또 다른 영역인 내세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 속에서 인도되는 우리의 삶이 내세와 연관이 되어 있다면,그리고 이땅에서의 천국의 확장을 위해 분투한다면 그것은 결코 “허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는가? 전도자는 결국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최고의 위치를 부여 받으신 분이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시라면 그 분이 행하실 공의로운 일에 대해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경배 받으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계획하고 계시는가?
3. 인생의 즐거움
전도서의 그 다음 주제로서 이렇게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고 진리 되신 하나님께 나아와 그를 경배하는 삶으로 돌이켰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기대되는 현상은 무엇인가? 삶의 즐거움이다. 이상하게도 전도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고난을 참는 인내 등으로 말하지 않고 삶을 즐기라고 권면한다. 약간 의아스러운 부분이 아닌가?
이것은 전도서 전체의 구조를 보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전도서에는 다섯번에 걸쳐서 중간 결론격의 진술을 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의 즐거움을 지금 누리라”는 권고이다(3:12-15,22 ; 5:18-20 ; 8:15 ; 9:7-10). 다시말해 위의 동일한 권면이 그의 교훈의 중간결론 부분들에서 다섯번 반복되며 강조 되어진다. 이 즐거움은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볼 수있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하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즐거움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무책임하게 흥청망청 쓰면서 즐거움을 탐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이라 할 수 없다. 그런 방도의 즐거움을 추구하면 결국 우리는 “불만족과 공허함”을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즐거움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알고 받아들인 다면, 그래서 이 즐거움조차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사용한다면 해 아래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의 허무함과 본질을 알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의미를 세우시고 경배 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제는 허무하지도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즐거움을 매일 매 순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도자가 5번씩이나 강조했던 중간 결론이요 삶의 지혜인 것이다. 어떤 것으로 인생의 낙을 즐길 것인가? 돈이 많아지면 더 즐거워지고,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즐거움이 절대화 되는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일이 우리의 삶 속에 발생하면 그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라는 교훈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겪은 모든 상황들이 크고 작건 간에 우리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고달픈 삶의 현장 속에 살아가지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처지를 주신 것에 대해 오늘 이 시간에 즐거워한 적이 있는가? 식구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조촐한 식탁에 둘러 앉은 그것으로 인해 밀려오는 행복을 만끽한 적이 있는가? 또한 내가 행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삶을 즐겁게 함으로 인해서 내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가?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에 말이다. 허무함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우리의 그런 실존을 자각시키시고 하나님의 훌륭하심을 인정하게 하신 그분께서 일상의 작은 일을 통해 내 인생이 의미 있게 하심을 인해서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서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때”를 보낸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삶을 즐거워할 순간은 주어진 “지금”이라는 시간이다. 하나님을 진정 우리의 주권자로 모신다면 우리 자신이 우리의 미래를 지배하려는 무모하고도 무익한 시도에 종사하는 대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그것도 가까운 곳에서… 언제나 천국은 “지금”(now), 그리고 “여기서”(here)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하나님 없는 세상의 절망감과 허무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찾아진바 된 존재로 태어난다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임을 증거한다.
자! 이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무책임한 실존주의와 내가 나를 위해 즐거움을 극대화하자는 쾌락주의가 팽배한 시대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그리고 진실한 삶의 모범이 제시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 경외함으로부터 발생하는 삶에 대한 역설적인 헌신으로 우리는 매 순간 참된 즐거움과 기쁨과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지금” “여기서”의 천국을 체험할 수 있다.
전도서는 허무주의도 쾌락주의도 지지하지 않는다.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땅에 팽배한 허무주의와 쾌락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기쁨을 매일 같이 누리며 살아갈 때 우리는 삶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은 채 온전한 순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이 땅에 형제우애적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면서.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