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하박국 개관 – 한 선지자의 고민과 희망
유다의 마지막 개혁자가 누구인가? 요시야 왕이다.그러나 이 요시야가 이집트의 바로느고에 의해 전사하게 되고(왕하23:29)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른지 불과 3개월 후에 바로느고에 의해 이집트에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고 만다(왕하23:31-34). 이로인해 바로느고는 여호아하스의 형제인 여호야김을 왕위에 앉힌다. 그러나 B.C605년에 이집트가 바벨론에게 갈그미스전투에서 패함으로 인해 여호야김은 충성대상을 바벨론으로 신속히 바꾸게 된다(왕하24:1).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이집트정복이 실패로 끝나자 여호야김은 다시 바벨론에 반역한다. 그후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있을 때인 B.C597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이때는 그야말로 역사의 격변의 시기였다.
이렇게 하박국서는 갈대아인들(1:6) (바벨론)이 발흥하는 B.C7세기 후반이나 6세기초반에 활동했었다. 아마 예레미야나 나훔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하박국시대는 이렇게 요시야의 사망으로 인해 개혁시대가 끝나고 유다가 급속하게 국가의 독립성을 상실해가는 중대한 변화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불경건하고 이기적이고 포악한 왕인 여호야김으로 인해 유다는 점점 증가하는 불법과 부정으로 인해 위태로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유다는 서로 합력하여 아름답고 공고한 말씀의 공동체를 세우지 못하고 불의와 악인이 창궐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이로 인해 선지자 하박국은(1:1)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고 공의가 행해지지 못함을 목도하면서 하나님께 여러 번 시정을 간구한다(1:1-4).
독특한 문학형태
이러한 상황속에서 이 책의 첫 부분인 1:2-2:5에서는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록되는 독특한 형태를 취한다.
우선 하박국은 유다에 횡행하고 있는 불의와 악과 폭력에 대해 불평하면서, “악인이 왜 번성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그는 하나님의 사역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시대의 모습을 보니 우상숭배와 부도덕과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왕국은 마비상태에 도달해 있고(1:4) 의인은 저주받은 자요. 악인은 성공한자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갈대아인(바벨론)을 세움으로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1:5-11). 이 대답은 하박국을 더 어렵게 만든다. 위로가 아니라 더 난해한 신학적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하박국은 두번째 질문을 한다(1:12-17).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한 자들이 그들보다 더 의로운 자들을 삼키게 할 수 있으신가?(1:13) 하박국의 논리안에서는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라는 것이다. 악인은 악인대로 그들의 길을 가더라도 의인은 그들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의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악은 계속 번성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2:6-20에서 다섯개의 화를 통해서 변증하신다.
이렇게 첫번째 장면이 하나님과 선지자 하박국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박국서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른 선지자들은 주로 하나님을 대변하여 이스라엘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것을 역설하는 반면에, 하박국은 이스라엘을 대변해서 하나님께서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냐고 질문하고 항변한다.
따라서 하박국서의 구조는 많은 부분이 하나님과 하박국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구조
- 첫번째 대화(1:2-11)
- 하박국의 불평(1:2-4)
- 여호와의 대답(1:5-11)
- 두번째 대화(1:12-2:5)
- 하박국의 불평(1:12-17)
- 여호와의 대답(2:1-5)
- 다섯가지 화의 선언(2:6-20)
- 하박국의 기도와 찬양(3:1-19)
핵심 메시지
이렇게 본문을 분석할 때 주제 구절은 2:4절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임에 틀림없다. 신약에서 3번 사용되는데 먼저 바울 서신인 로마서 1:17과 갈라디아서3:11에 등장한다. 이 구절을 종교개혁자인 마르틴루터가 붙잡고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다. 카톨릭은 믿음과행위기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이해하지만, 개신교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선행은 구원받은자의 당연한 삶의 양식으로 이해한다.이 것을 지지하는 구절이 바로 본문 2:4 이다. ㅍ
또 한 구절은 히브리서10:38에서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환란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세워주기 위해서 사용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낙담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말고 믿음으로 붙잡으라고 권고한다. 이렇듯 이 구절들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속에서 주제구절인 2:4절은 어떤 본래적 의미를 가졌을까? 당시 주변정세가 어지러웠다. 동포인 유대민족은 공의의 말씀인 하나님말씀을 져버리고 약육강식의 쟁탈지로 변모했고, 하나님께서 유대를 치리하시기위해 사용하시는 바벨론은 자신들의 위용으로 인해 교만해졌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에 대치되는 유대의 전반적 삶이나, 자신들의 힘을 무자비하게 의지해서 주변 국가들을 압박하는 바벨론의 교만함을 넘어서는 삶의 방식, 즉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을 견지하라는 권면인 것이다.
정말 이러한 상황, 즉 대내적으로는 유다가 부패했고 대외적으로 바벨론은 포악함으로 교만함의 극치를 보일 때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성도란 이런 존재가 아닌가? 주변의 상황들이 하나님의 공의에서 어긋나는 것 같아 보이고, 개선될 기미가 없는 세속의 파도가 거세게 넘실대도 “믿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주권적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부패(유다), 그리고 교만(바벨론)에 깊이 둘러싸인 것 같은 상황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이 땅을 복음으로 재건하기 위해 다시금 하나님앞에 서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하박국은 깊은 고민과 하나님께 대한 항변,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답변을 받음으로 인해 신앙의 방향이 재정립됨을 체험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침묵하심 같은 상황 때문에 실족하였다. 분명 인격의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에 자행되는 악에 대해서 침묵하실 수 없지 않는가? 그가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항변했을 때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이 돌아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또한 교만한 바벨론을 심판하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는지를 발견하고 결국은 그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가?(3:1-19)
어떻게 하박국은 이러한 변화속에서 하나님의 진정 어린 마음과 계획을 수용할 수 있었는가? 다시 말해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시야가 좁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볼 수 있는 원대한 믿음의 안목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는가?
2:1에 그 실마리가 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른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그는 서서 말씀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되신 마음에 담긴 답변을 듣고는 자신의 시각에 고정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신뢰하고자 하는 결단을 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나 세상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무릎 끓고 하나님의 크신 안목에 전적으로 순복하여 참된 샬롬을 얻게 된다.
그리고 참된 부흥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 시대의 참된 부흥을 간구한다(3:1). 이것은 교회가 숫적으로 늘어나기를 소망하는 문가가 아니라 “무너진 시대의 영적 도덕적 상태가 회복되고,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께 무릎 끓고 경배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삶으로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갈망하는 기도”이다.
얼마나 거룩하고도 충격적인 기도요 고백인가? 다 무너져 버린 주변의 상황이 아닌가? 유다는 선택된 믿음의 공동체, 우정의 공동체를 상실한 채 부도덕과 부패, 우상숭배를 향해 치닫고 있었고, 바벨론은 교만으로 자신의 욕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황속에서 있었다. 바로 그때 하박국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진행되는 하나님의 진정한 부흥, 즉 인간성의 회복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바른 인식을 위해서, 그로 인해 공동체의 참된 영성이 재건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가올 바벨론의 말발굽소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참된 찬양을 드린다. 3:17-18은 이런 상황속에서 드리는 성도의 신실한 노래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을 우리는 하박국서의 전체적인 구조속에서 교훈을 발견한다. 성도가 믿음의 위기를 겪는다. 그때 하나님과 대화하고 탄식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고 결국 성도는 하나님께 찬양한다.
그렇다. 세상은 악할 수 밖에 없고, 성도는 그로 인해 고민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관자되심으로 인해 이 땅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황폐함을 두고 고민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께 탄식하고 기도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관자되심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가? 그리고 매일의 삶속에서 회복되어지고 확장되어지는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인해 감사하고 감격하고 찬양하는가? 이것이 바로 불의와 교만이 가득찬 이 시대를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말씀의 도전이 아니겠는가?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