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와 탐욕 바이러스 / Ars longa, Vita brevis / 질문 / Citius, Altius, Fortius /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52) _ 8월 24일
“코로나 바이러스와 탐욕 바이러스”
(Corona virus & Greed virus)
코로나를 거치면서 재레드 다이아몬드 (Jared Diamond) 가 쓴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서 다루었던 균 이야기에 다시 생각이 갔습니다. 그의 핵심 질문은 ‘서구문명 즉 구대륙의 문명은 어떤 요인들에 의해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호주의 애보리진이나 아프리카의 부족들 같은 신대륙 보다 앞세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왜 유럽을 중심한 서구문명이 아프리카나 호주나 미국의 토착민 같은 신대륙 사람들 보다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가를 묻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서구인들이 토착민들 보다 잘 살고 물질 문명을 발전시킨 것은 그들의 유전자가 뛰어나거나 창의성이 있거나 부지런해서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순전히 환경과 자연의 차이에서 해석합니다.

다이아몬드가 예를 드는 것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면역력입니다. 자연과 환경에 따른 면역력의 차이가 인간의 생존능력과 물질문명의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주장입니다. 그에 의하면 서구인들, 즉 구대륙의 사람들은 토착인들, 즉 신대륙의 사람들 보다 병균을 포함한 일체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컷다는 것입니다. 구대륙의 유럽인들은 일찍부터 야생 식물을 경작하여 작물화하고, 야생동물들을 길들여 가축화 하면서 농경과 동물 사육을 통하여 그것들이 인간의 신체에 끼치는 각종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키웠는데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모든 식물이나 동물들과 하나가 되어 자연과 일체를 이루어 살면서 농사나 동물사육의 경험이 전무함으로 면역력도 생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환경이 주는 면역력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서구의 정복자들이 퍼트린 천연두, 홍역, 페스트, 콜레라, 결핵, 인플루엔자 같은 병균들에 대해 원주민들은 죽을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구대륙의 유럽인들은 걸어다니는 세균과 같은 것이어서 사실 총이나 말, 대포나 화력이 아니었어도 이들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몰살시켰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면역력이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병균, 세균, 바이러스에 대해 스스로 싸울수 있고 방어할수 있는 힘과 능력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까? 면역력이 있어야 우리는 우리 인체에 해를 끼치는 각종 독소나 병균을 이길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 코로나라고하는 바이러스를 이겨내기 위해서 면역력을 키워야한다고 말합니다. 선천적 면역력에 대해서는 어쩔수가 없다 하더라도 후천적 면역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운동이나 음식을 통해서 체력을 보강하고 손씻기나 청결을 통해서 환경을 깨끗하게하고 어서 예방약, 백신(vaccine)을 개발하여 면역력을 높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코로나 바이러스를 경험하면서 우리 인간을 가장 오래, 가장 힘들게 괴롭혀온 ‘탐욕 바이러스’ 또한 생각해 봅니다.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 조차도 여기에서 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이 탐욕 바이러스, Greed Virus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부터 주어지는 선천성 병균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이 탐욕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인간을 부도덕 혹은 무도덕적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짐승화 시키다가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치명적 병균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게되고 죄가 자라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탐욕 바이러스는 직업, 인종, 민족, 나이, 성별, 등등 누구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개중에는 더 심각하게 감염이 된 이들도 발견됩니다. 특히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 대통령부터 여러 나라의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매우 심각하게 감염이 되어 그들로부터 제 2차, 3차 감염으로 확대가 되곤 합니다. 빨리 그런 탐욕 바이러스 악성 감염자들은 격리, 감금하여 음압병동으로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감염된 이 탐욕 바이러스의 예방 백신은 무엇일까? 완치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 증상을 좀 경감시킬수 있는 치료제나 다른 면역항체는 무엇일까? 어떤 날은 정말 1-2 시간만 잘 뿐, 이 탐욕 백신과 치료제와 면역항체에 대해 고민하느라, 머리도 좋지 못한 사람이 밤을 지샐 때도 꽤 있곤 합니다.
폭넓은 독서, 오래된 고전 읽기, 인격적 수련, 절제훈련, 종교적 수행, 기도, 경전읽기 – 무엇이 진정 인간들을, 우리를, 저 자신을 이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탐욕 바이러스, Greed Virus에서 구하여 건강하고 건전한 인간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이 공동연구 프로젝트에 함께 해 주시길 요청합니다.
(추천도서: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 2005)
라틴어 인문학 (35) _ 8월 25일
Ars longa, vita brevis.

(아르스 롱가 비타 브레비스)
반대로도 씁니다.
Vita brevis, ars longa.
(비타 브레비스 아르스 롱가)
Ars, 예술, 기술, 영어 art
longa, 길다, 원형은 longus 영어 long
Vita, 생명, 목숨, 생활, 생애, 영어 life, vital, vitality, vitamin도 여기서 파생됨
brevis, 짧다, 순간, 영어 brief.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Vita brevis, ars longa.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기원전 4-5세기, 페리클레스 시대, 그리스에서 서양의학의 아버지라 불리웠던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명언 중 하나입니다.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소중하다고 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 Ars longs, vita brevis 영어로 Art is long, life is short가 더 명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래 히포크라테스는 Ars를 예술이 아니라 기술, 혹은 의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여 ‘의학 혹은 의술이 생명 보다 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만 그후 이 귀절은 일반적으로 ‘예술’을 의미해 왔습니다.
물론 예술을 지칭할 때 보통은 음악, 미술, 조각, 건축, 문학 등을 지칭하지만 요즘은 정치, 사회, 종교 까지 포함하여 넓게 쓰이고 있습니다. The art of Aging ‘나이 듦의 예술’이라는 말도 흔하게 쓰곤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 말은 음악이나 미술 등 전통적 예술 작품을 지칭하여 그런 예술 작품을 남긴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도 그들이 남겨놓은 그 예술품 자체는 영원히, 오래 오래 남는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젠가 최진 선생님은 이 세상을 떠나겠지만, 그 분이 저에게 주신 ‘박고통금’과 ‘아불견 무백 무상흔’은 제 자녀손들에게로 이어질 것입니다. 천옥영 선생님 역시 언젠가는 이 세상을 뜰 때가 오겠지만, 그 분이 제게 남겨주신 귀한 작품 역시 없어지지 않고 저희 가정에선 이어지겠지요.
바흐와 헨델은 260, 270년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린 지금도 때를 따라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을 비롯한 브란덴브르크 콘체르트와 메시야와 할렐루야를 들으며 감동합니다. 모자르트와 베토벤과 슈베르트도 모두 200여년 전 사람들이지만 우린 오늘도 그들이 남겨준 예술의 세계 속에서 ‘아이네 클라이네 낙흐트 뮤직’, ‘운명’, ‘환희’, ‘송어’, ‘마왕’, ‘백조의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역시 이미 5백년 전에 이 세상을 잠간 살다가 갔지만 우린 지금도 루브르를 찿아 ‘모나리자’를 만나고 밀라노로 ‘최후의 만찬’을 보러갑니다. 우린 지금도 바티칸을 찾아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그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고, 성 베드로 성당으로 그의 ‘피에타’ 앞에서 엄숙해지곤 합니다. 밀레를 찾아 파리로 가, ‘저녁 종’과 ‘씨 뿌리는 사람’을 만납니다. 고흐는 불과 37살 밖에는 못 살았지만 우린 그의 ‘별이 빛나는 밤’을 늘 그리워하고 그의 ‘해바라기’ 앞에서 슬픔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고갱은 잠간 왔다가 간 사람이지만 그는 지금도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에게 묻곤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백년 전 사람 로댕은 지금도 파리에서 ‘생각하는 사람’ 그대로 남아서 우릴 사색의 세계로 초청합니다.
단원 김홍도는 오래전 사람이지만 지금도 우리네 옛 풍속을 그리워하게하며 ‘빨래하며 목욕하는 아낙들을 훔쳐보는 남정네들’ 앞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추사 김정희는 지금도 ‘세한도’를 통하여 선비의 길, 한 시대 지식인의 길, 군자가 가야할 길을 지시해주고 있습니다. 이중섭은 정말 어려운 시대, 겨우 40살에 세상을 하직했지만 수많은 ‘황소’들을 통하여 말없이 은근과 끈기, 참음과 기다림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허지만 어디 제가 예를 든 이분들 만이겠습니까? 오늘도 이 악하고 불의한 땅에서,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탐욕과 더불어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가는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삶은 순간이지만 기억은 역사가 되어 오래 남는다’
Vita brevis, Ars longa.
Ars longa, Vita brevis.
Life is short, Art is long.
Art is long, Life is short.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53) _ 8월 26일
“질문”
수일전 초등학교 6학년생인 손녀딸이 자기 반에서 친구들과 공동 프로젝트를 하나 하는데 저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만났습니다. 질문이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녹음기 까지 켜놓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 어떻게 호주로 이민을 오셨습니까?’
‘왜 무슨 계획과 목표가 있으셔서 이민을 오셨나요?’
‘이민오신후 처음에 세우셨던 목적은 이루셨나요?’
‘이민의 목표를 이루신 데는 무슨 요인이 있었고 누구에게 무슨 도움을 받으셨나요?’
‘또한 이민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부분은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혹시 호주에 이민오신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으셨나요? 그 후회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인터뷰를 2시간이나 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이 아니라 무슨 신문기자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의 학부모들과는 달리 유태인 가정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오늘 뭘 배웠니?’ 라고 묻지 않고 ‘넌 오늘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을했니?’ 라고 묻는다지 않습니까? 사실 좋은 질문, 깊이 다듬어진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수준 높은 교육이며 대충해주는 대답 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철학은 ‘질문법’을 학문이나 인생살이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발전시켜왔습니다. 왜? 왜? 왜? 계속해서 묻는 것이 진리를 찿아가는 여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린 어렸을 때부터 질문을 차단하는 동양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목사님께 무엇을 거듭 물어보면 꾸중을 듣거나 아니면 기껏하시는 말씀은 ‘이담에 크면 다 알게되!’ 하시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손녀아이는 저에게 이런 말도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할아버지의 대답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질문할 것을 잘 준비하여 물어보는 거야!’
‘이렇게 살아가도 쾐찮은가?’ How are we to live?
책 제목 자체가 심각한 도전이며 엄숙한 질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도 쾐찮은가?’ 당황하게도하고 깊이 생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이 책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비도덕적이며 무도덕적인 세상이라고 진단합니다. 모두가 이기적이며 탐욕의 노예가 되어 마치짐승 처럼 동물적 감각에 따라 끝없는 충동적 이기심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 오늘 우리 인간들과 우리 사회의 민얼굴입니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하루 1불 이하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다른 한편에서는 한병에 수천불, 수만불 짜리 포주주잔을 기울입니다. 지구의 저쪽에서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살아가는데, 이쪽에서는 수만불 짜리 악세사리와 명품이 없어서 못 팔 정도입니다. 수십리, 수백리 길을 걸어가 물 한통을 이고 오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면서도 수십만불 짜리 자동차에 몸을 싣고 질주하는 부잣집 청년들의 영상이 방영되는 이 세상! TV에서는 월드 비전과 굿 네이버스와 콘썬 같은 자선단체들이 하루에 1불만 보내주시면 저들을 행복하게해 줄 수 있다고 계속 호소하지만 그 많은 부자들과 잘사는 나라들과 정치인들은 오늘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그리고 나는, 도대체 나라고하는 이인간은 왜 이렇게도 무능하고 둔감한 존재인가요?
‘이렇게 살아가도 쾐찮은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미 양심은 마비되고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뜨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 책은 거듭 질문합니다. 당신은 양심적입니까? 당신은 도덕적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양심적이며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질문과, 그 질문을 통하여 자신을 성찰하는 데서 첫발을 땔수있습니다. 질문과 성찰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 조절을 가능케 해주는 출발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피터 싱어 (Peter Singer), 노승영 옮김, 시대의 창, 2014을 추천합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36) _ 8월 27일
Citius, Altius, Fortius.
(키티우스 알티우스 포르티우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citius, citus의 비교급, 더빨리, 영어 speed, speedy가 나옴.
altius, altus높다의 비교급, 더 높이, 영어 altitude, 높이, 고도는 여기서 나옴.
fortius, fortis 강하게, 굳세게, 힘차게의 비교급.
Citius, Altius, Fortius.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이 말은 1896년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킨 프랑스의 교육자였고 제 2대 IOC 위원장을 지낸 피에르 드 쿠베르탱 (Pierre de Coubertin) 남작이 한 말입니다. 그는 고대 펠로폰네소스 남서쪽 올림피아에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사이에 4년에 한 번씩 열었던 올림픽 게임을 부활시키는데 큰 역활을 했고, 이로 인하여 근대 제 1회 올림픽을 오늘날의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개최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은 그후 21세기가 시작되는 첫 올림픽으로 2004년 108년만에 다시 아테네에서 열렸습니다. 사실 고대 그리스 올림픽은 기원전 393년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쿠베르탱의 끈질긴 설득과 노력에 의해서 약 2300여년 만에 되살린 것입니다. 1896년 제 1회 아테네 올림픽 때는 불과 14개국에 241명의 적은 국가와 선수들로 출발했지만 그후 2004년, 21세기 첫 아테네 올림픽은 세계 201개국, 10만625명의 선수들이 참가하는 인류의 축제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올림픽은 초기의 아마추어 정신이나 순수성을 많이 잃어 이제는 프로들에 의해 이끌리며 상업주의에 물들어버린 측면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인류는 처음 쿠베르탱남작이 꾸었던 꿈을 이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Citius, Altius, Fortius 더 빨리, 더 높이, 그리고 더 힘차게 라는 이 표어에 담긴 올림픽의 이상은 단순히 신체적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표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삶의 자세와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외형적, 물리적, 육체적으로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내적으로, 영적으로도 최선과 성실을 다해야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일과 생각, 외형과 내면, 그리고 타인과 자신 모두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아야한다는 뜻입니다.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승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 라는 말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최선과 성실이다’라는 걸 일깨워 줍니다. 정말 육체만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 지성과 이성, 꿈과 이상도 ‘좀더 빨리 좀 더 높이 좀 도 힘차게’ 전진해가는 저와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와 함께 기억해야 할 라틴어는 Mens sona in corpora sona 입니다.
Men’s, 정신, 영혼
Sona, 건강한, 건전한, 영어의 sound
Corpore, 육체, 몸
영어로는 흔히 A sound mind in a sound body라고 합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
로마의 시인 유벨날리스 (Juvenalis)가 남긴 명언입니다.
저희 시드니인문학 교실의 친구들은 지난해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자리와 아테네의 근대 올림픽 경기장을 잠간 찾아보았습니다. 그때 찍었던 사진 중에서 몇 장을 다시 봅니다.
오늘도 Carpe diem과 Bonam fortunam과 더불어 Citius, Altius, Fortius 그리고 Mens sona in corpora sona로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54) _ 8월 28일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

‘과유불급’이란 사자성어는 잘 알려진 말로 논어에서 공자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것은 같은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넘치지도 아니하고, 모자라지도 않게 알맞춤하게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에다 ‘알맞다’는 것은 시대와 지역, 또 개인과 그가 속한 공동체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제각기 다릅니다. 호주나 미국인들과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생활의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알맞은 삶’ 또한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백악관이나 청와대에 계신 분들과 우리 인문학 친구들 사이에도 ‘알맞음’에 대한 기준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존회사 회장님과 그 회사 직원인 우리 딸네는 ‘알맞다’는 기준이 같을수는 없지요.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수도사로 사시는 이들과 왕실에서 수많은 하인과 하녀들을 거느리며 살아가는 왕족들 사이에는 결코 알맞은 기준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상식과 양식, 판단과 기준의 공통적 이해라는 것이 있습니다. 코끼리와 토끼는 워낙 차이가 크니까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을 ‘알맞게’ 조정하거나 균형을 맞출 수는 없지만, 사람은 부자든 가난하든, 아프리카나에 살든 유럽에 살든, 비슷한 체구와 비슷한 생물학적 존재이므로 어느 정도는 ‘알맞는 기준’이 있고 또 알맞는 기준을 함께 만들 수 있어야한다고 봅니다. 약간의 차이는 피차 인정할 수 있어도 턱없이 벌어지는 것은 좀 막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은잔으로 마시느냐, 손으로 욺겨져서 마시느냐 하는 데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모두 같이 더럽혀지지 아니한 맑은 물 정도는 동일하게 마실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의 차이나 간격은 인정하면서도 서로 받아드릴 수 있는 ‘알맞음의 정도’가 있어야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안셀름 그륀이 말하는 rechte, 영어의 right는 ‘평형’,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아니함’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다음은 안셀름 그륀 (Anselm Grun)의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 (Die Kunst, das rechte Mass zu finden)을 읽으면서 밑줄친 것에다 제 생각을 조금 덧붙여 놓은 잡기장입니다.
1) 낭비와 인색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절약하는 태도와 베푸는 습관을 함께 익혀야합니다.
2) 성서, 불경, 스토아철학은 한결같이 욕망은 모든 고통과 비극의 원인이고, 탐욕은 악의 뿌리라고 가르칩니다.
3) 세월호처럼 짐을 너무 많이 실은 배는 결국 가라앉고 맙니다. 삶이라는 배에도 짐을 너무 많이 실으면 파선하게 됩니다.
4) 오늘날 소비사회는 욕망을 계속 부추깁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포기하면 죽는 줄로 알고 있는데 사실 여기에서 멈추어야 살 수 있습니다.
5) 자기비하와 교만 사이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극단적 자기비하와 교만은 결국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비하의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들로 부터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숨은 마음이 있습니다.
6)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거절이 필요합니다. 무절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탐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너무 꼭 껴안으면 숨이 막힙니다. 적당히 해야 합니다.
7) 우리는 평생 모든 사람의 꼭드는 행동만 할 수는 없습니다.
8) 잘못된 것을 보면 화를 내야한다고 하며 그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거룩한 것과 분노는 연결될수 없는 단어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은 마음 속에 자기는 그 사람 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9) 성공하는 삶에는 꼭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입니다.
10)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모든 걸 가지고 있어도 허전해하고 전혀 필요없는 것도 갖고 싶어합니다.
11) 어떤 사람이 도가 깊은 선승에게 영성수련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앉아있을 때는 앉아있고 서있을 때는 서있고 걸어갈 때는 걸으면 됩니다’ 그가 항의조로 말했습니다. ‘그건 모두가 다 하는 일이잖습니까?’ 그러자 선승이 다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사람들은 앉아있으면서도 서있을 때를 생각하고 서있을 때는 벌써 걸을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걸으면서도 직장 학교 가정 먹을 걸 생각합니다’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12) 겸손이란 자신의 결점을 알고 그걸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지 말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겐 친절만이 아니라 공격적인 면도 있습니다. 나에겐 사랑만이 아니라 미움도 함께 있습니다. 나에게 진실이나 정직만이 아니라 사실은 거짓과 속임수가 더 많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13) 약점도 내 일부입니다. 부끄러움도 내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14) 상처가 큰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값비싼 진주가 있습니다.
15) 우리 안에는 건강과 질병, 아름다움과 추함, 믿음과 불신, 정직과 거짓, 장점과 단점 등, 상반되고 모순된 것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상반되고 모순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받아드리는 사람이 ‘인간다운 인간’ 입니다.
16)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써준 글입니다.
‘나무는 가만히 두면 잘 자란다. 자꾸 손을 대고 여기 저기 옮겨 심으면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을수가 없다. 나무는 그냥 가만히 두고 물이나 넉넉히 주고 햋볕이나 잘 쐬어주면 잘 자란다.’
17) 거절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저는 이 일을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부탁하는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탁받는 일마다 다 들어줄수는 없습니다. 거절은 관계를 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18) 내가 이룬 일은 사실 남들도 다 할수 있는 일입니다. 나 말고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수두룩합니다.
19) 우리는 실수를 반복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실수하거나 한두 번만 실수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결심해도 또 실수합니다. 우리가 거듭 실수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주말되시길 바랍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의 추천도서: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 안셀름 그륀 지음, 최용호 옮김, 카톨릭 출판사, 2017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