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Cherry picking의 오류 / Erra humanum est / Homo Laughing : 웃는 인간 / Siste, viator / 반성문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58) _ 9월 7일
“Cherry picking의 오류”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 심리 밑바닥엔 ‘내가 좀 잘한 일은 드러내고 싶고 못한 일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애썼는데 누가 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특별히 군자나 성인이 아닌 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잘한 것은 들어나 칭찬받고 싶고 잘못한 것은 가려져 숨겨지고 묻혀지기를 바라는 심리는 아마도 타고난 것이거나 아니면 어렸을 때 부터 형성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로 부터 칭찬과 꾸중을 통하여 성장과 발달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스럽게 칭찬을 받으면 기분도 좋으려니와 그 칭찬이 사회적 성공의 척도 처럼 여겨지고, 반대로 꾸중이나 비난은 그 반대가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해왔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자기현시’ ‘자기과시’ 즉, 본래의 자기 모습 보다 자신을 더 들어내고 돗보이게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회학이나 통계학에서 주로 많이 사용하는 ‘체리 피킹 오류’ (Cherry picking) ‘체리 피킹 속임수’ 이론도 이와 흡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체리농장을 하는 이는 자기네 농장을 소개, 혹은 홍보할 때, 자기네 농장에서 나오는 체리 중에서 싱싱하고, fresh하고, 빛갈 곱고, beautiful 하게 보이고, 잘 익은 체리만 보여줌으로 ‘우리 농장 체리는 모두 다 최고의 상품’이라고 소개한다는 이론입니다. 당연합니다. 어느 체리 농장주가 별로 않좋은 상품을 보여주려 하겠습니까? 그것은 사과나 오렌지나 바나나 농장의 경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손님들은 여기에 속으면 않됩니다. 몇개의 sample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면 않됩니다. 대부분의 농장 주인들은 체리중에서 의도적으로 몇개의 좋은 것들만 골라서, 선택적으로 보여주면서 마치 전체가 다 좋은 것인양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표본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행위, 많은 자료 중에서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골라서 보여주거나 해석하는 것을 학자들은 ‘증거은익의 오류’ 혹은 ‘불완전한 증거 오류’라고 부릅니다.

이런 식의 cherry picking 오류가 좀 더 발달, 확대되면 농장주는 물론이고 구매자 까지도 일정한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체리 농장을 경영하며 사업하는 사람은 늘, 당연히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좋은 제품만 골라서 보여줌으로 은근히 ‘우리 농장 제품은 모두 다 최상품’이라는 자기최면, 자기확증이라는 편향성에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매자 역시도 계속하여 동일한 사람에게서, 동일한 말을 듣고, 동일한 농장으로 부터 같은 체리만 구입하다보면, 그 농장의 그 체리에 대한 확증 편향성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농장도 들려보고, 다른 체리와 비교도 해 보아야 하는데 사람이란 어떤 한 가지 일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하는 일이나 자신이 경험한 일이나 자신이 믿는 일에 대해서 거의 종교적 신앙 처럼 확신을 갖게 됩니다.
사업자, 연구자, 조사자, 정치인, 경영인, 심지어는 종교인들 까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하여, 자신이 기대하는 결론을 도출할 목적으로 데이터를 취사선택하는 이 ‘체리 피킹의 속임수’는 단순히 체리 농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런 식의 데이터를 취사선택하고 결과를 미리 상정하여 통계를 조작하는 ‘체리 피킹의 오류와 속임수’는 사업이나 정치는 물론이고 과학이나 종교나 각종 사회 집단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좋은 것만 보여주어서 칭찬받고 인기를 얻고 돈도 벌고 각종 이익도 챙기는 이런 ‘체리 피킹의 속임수’는 이제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않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걱정이 큽니다. ‘잘한다’ ‘좋다’ 는 결과를 조작하여 칭찬을 받음으로 그 다음, 더 큰 이익을 챙기려는 것이 단순히 체리농장주의 마음만이 아니라는데 우리의 염려가 더해집니다.
‘체리 피킹의 오류’ 이론에는 그외에 ‘케이크 위에 있는 맛있는 체리만 골라서 먹는 행위’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케이크 위에 언져진 체리를 바라보면서, 맛없어 보이는 것, 덜익어 보이고, 시게 보이는 것은 지나가고 맛있어 보이는 좋은 것만 골라가면서 빼먹는 행위 역시 체리 피킹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은 별로 사지 않으면서 선물만 받아가는 것이나 계속 여기 저기 다니면서 먹어만 보고 끝내는 하나도 사지 않거나 카드는 별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포인트만 받으려는 행위 등, 실속만 챙기고 자기가 좋아하거나 쉬운 것만 선택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렇듯 체리농장이나 백화점에서의 ‘체리 피킹’이 아니라 교회를 포함한 종교단체에서의 체리 피킹이 걱정입니다. 복받고 만사형통하고 무병장수에 성공출세를 위한 체리 피킹이 오늘날 종교단체의 경영주나 구매인들 모두에게도 점점 확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못 받고 꾸중만 들어도, 생기는 것은 없고 손해만 보아도, 장사는 잘 않되고 밑지고 팔아도, 받는 것은 없고 줄일만 생겨도, 그래도 포장지만 화려하게 만들고 실속은 없이 살지는 말아야 할텐데, 최소한 나 자신에게 까지는 이르지 못해도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은 속이지 말아야지 … 다짐하며 한 주간을 시작합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39) _ 9월 8일
Erra humanum est.
(에라 후마눔 에스트)

erra, 실수, 잘못, 틀림, 오류, 과오, 영어error, mistake
humanum, 인간적, 인간의 것
Erra humanum est.
(모든) 인간은 실수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오류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한다.
실수란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수하는 것이 인간적이다.
고대 히브리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며, 모순, 잘못, 실수, 한계를 지닌 존재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Erra humanum est라는 경구도 우리가 앞에서 본 Memento mori와 연결되는 경고입니다. 아무리 잘난척 하고 완전한척 해도 인간이란 죽음이란 한계를 지닌 존재요, 실수와 오류, 모순과 잘못을 거듭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란 어쩌다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노력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실수를 거듭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야말로 가끔 실수로 착한 일도 더러 하고, 애쓰고 노력해서 선한 일도 하는 케이스가 좀 있기는 해도,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과 속성은 거듭하여 오류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 경우입니다. 전에도 부지불식 간의 실수는 물론, 의도적 잘못도 참 자주 범하는 평범한 속인이지만 요즘은 나이를 더해가면서 의도적 잘못은 약간씩 줄어드는 반면, 비의도적 실수는 더 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글이나 영어의 맞춥법이나 스펠링이 틀리는 정도가 아니라 약속 시간이나 장소도 틀리게 기억하였다가 실수하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물론 성현군자도 인간이니 다 실수와 모순이 있습니다만 어떻게든 그런 실수나 잘못을 좀 더 줄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좋은 책 하나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왜 실수하는가 (Why we make mistake) 조지프 핼리넌 (Joseph Hallinan) 지음, 김광수 옮김, 문학동네, 2012년 입니다.
헬리넌에 의하면 우리가 실수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주요 원인들이라고 합니다.
1)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과신한다. 당신은 본래부터 부족하고 모자란 인간이다.
2) 당신은 늘 부분을 보고 전체를 유추하고 조금 아는 것 가지고서 모두 다 아는 양 착각 하거나 위선을 떤다.
3) 당신은 색안경을 쓰고 인생을 산다.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4) 당신은 대충 알면서도 완전히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5) 제일 큰 문제는 인간이란 아무도 자신을 콘트럴 할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교만하거나,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헬리넌은 실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1) 겸손해야합니다.
2) 전문가의 말이라고 무조건 믿지 말아야합니다.
3) 지난 번의 실수를 거듭 반성하고 분석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요.
(참고: 영어 mistake나 error는 비슷하게 비의도적이며 고의성이 별로 없는 경우에 쓰는 단어이고 fault는 다분이 의도성이 있거나 분명한 자기의 잘못이 있는 경우로 분리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자동차 사고에서 “It is my fault.”라고 하면 그것은 확실히 내 잘못이고 따라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고, “It my mistake.”라고 말하면 내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일정 부분 상대의 잘못도 있음으로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라는 데 어느 분이 한번 변호사에게 물어봐 주시지요?)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모두의 건행을 빕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59) _ 9월 9일
“Homo Laughing” – 웃는 인간

요즘은 무슨 일이든 코로나 핑계를 대지만, 사실 우린 퍽 오래전 부터 이미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시대는 웃을 일도 점점 줄어들지만 인간성 자체가 많이 매말라졌다고 한탄합니다.
“인생이란 생각하는 사람에겐 희극이고, 느끼는 사람에겐 비극이다” – The world is a tragedy to those who feel, but a comedy to those who think. 18세기 영국의 소설가 호러스 월폴 (Horace Walpole)이 남긴 말입니다. 그러나 유명인사의 말이라고 그냥 넘기지 말고 거꾸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생각하는 사람에겐 비극이지만 느끼는 사람에게는 희극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역사상 인간에 대한 정의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주 오래된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호모 이렉투스’ Homo erectus,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를 포함하여 백 가지도 더 됩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호모 라핑’ Homo Laughing – 인간은 웃을 줄 아는 동물 – 이라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을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로 규정했지만 사실 다윈이나 다른 동물학자들 중 많은 이들은 동물들도 웃을 줄 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시인들은 나무도, 풀도, 해도, 달도, 별도 다 웃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인간이야말로 제일 웃을 줄 모르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인간이 웃는 것은 행복해서가 아니라 괴롭고 슬프기에 우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요즘은 의사들이나 음악가, 미술가들도 ‘웃음치료’의 효력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고통을 치료하는 최고의 약은 웃음이다. 실제로 웃음은 우리 몸에서 좋은 호르몬을 만들어내고 피를 맑게 해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로버트 프로빈 (Robert Probine) 교수는 웃음이란 신체적 반응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반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억지로라도, 웃겨서라도 웃는 것은 뇌건강에 대단히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웃는 것도 머리가 잘돌고 지능 지수가 높을수록 잘 웃는다’ 여기에서 잘 웃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히 센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머리가 그리 좋지 못해서 웃질 못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웃을 일이 있는데도 웃지 않는 것은 어딘가 약간은 모자란 것이고, 별호 웃을 일이 아닌데도 웃는 것은 사람이 헤퍼서가 아니라 분위기를 만들고,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코메디 comedy, 조크 joke, 위트 wit, 유머 humor, 개그 gag 등등 웃음과 관계되는 단어들은 많이 있습니다. 비슷하지만 우리말에 농담, 익살, 풍자 등도 추가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사전을 찾아보면 실없이 장난삼아 하는 말, 남을 웃기려고 하는 말 등등 요러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전통적으로 유교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는 이 모든 것을 싸잡아, 경솔하거나 실없거나 가벼운 행동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일반서민이나 쌍놈들은 ‘헛튼 소리’를 해도 양반들은 그러면 않되는 것으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런 영향이 있어서일 것입니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최근에야 코메디안이나 개그맨들의 활동이 크게 나타났지 전에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Homo Laughing – 웃는 인간으로 사람을 보게한 것은 빅토르 유고의 소설 ‘웃는 남자’ The man who laughs (불어로 Homme qui rit) 입니다. 유고는 인간을 Homo lupus, 이리같은 인간으로 본 토마스 홉스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 인간성 속에 있는 선한 존성과 그 선한 본성의 표현으로써의 ‘웃는 인간’을 그려보았습니다.
서양의 정신사 중에서는 비극과 함께 희극이 커다란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들 잘 아시고 계십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리스의 희극에 대한 공부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영화와 연극에서의 웃음을 이야기하자면 찰리 채플린 (Sir Charles Spencer Charlie Chapline)을 빼놓을 수 없지요. 19세기와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가장 슬프고 아픈 시대, 그는 영국이 낳은 영화 배우요 감독이요 코메디안을 넘어서 우리 시대 우리는 왜 웃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물론 채플린은 자기 자신의 출생과 성장도 그러했지만 1,2차 세계 대전과 히틀러, 대공황 등 말로 다 할수 없는 시대를 지내오면서도 한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웃음, 뼈있는 웃음, 폭소, 배꼽잡는 폭소로 초대한 ‘해학과 웃음의 천재’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남긴 명언 중 한 두 귀절입니다.
‘인생이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땅만 내려다보는 사람이 어찌 무지개를 볼 수 있으랴!’ You’ll never find a rainbow if you’re looking down.
‘우리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느낄 줄을 모릅니다’ 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독일 통일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헬무트 콜 (Helmut Kohl)이 남긴 말입니다.
‘나 하나가 바보가 되어 독일 국민들이 웃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바보가 되겠습니다’
유머란 무엇입니까?
슬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아픈 시대를 용기로 북돋으며 희망의 무지개를 보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유머란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
1960년대말 MBC-TV가 개국할 때 처음 생겨난 코메디 방송프로였습니다. 70년대를 거쳐 저희가 이만온 후에도 계속되어 90년대 초 까지 이어진 장수프로였다고 합니다. 그때가 어느 시절입니까? 국민 소득 79달라, 6.25후 아프리카 보다도 가난했던 시절, 지금 국민소득의 400분지 1이었던 때, 그 찌드러지던 시절, 그래도 우린 ‘웃으면 복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행복해서 웃은 것이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구봉서, 서영춘, 양석천, 배삼룡, 송해, 이주일, 배연정, 양훈, 백남봉, 남보원, 장소팔, 고춘자, 뽀빠이 이상용, 배일집, 이용식, 서세원, 엄용수, 김희갑, 곽규석, 백금녀 등등등 아, 이 많은 코메디안과 개그맨 개그우먼들이 우리 시대를 행복하게 해 주었구나!!!
웃으며 삽시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정말 누군들 바보라서 슬픈 것도 모르고, 악한 세상인줄 몰라서 웃는 것이 아니랍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고 웃으면 자꾸 웃으면 그럼 행복해 질거라고 믿기에 우린 오늘도 웃으며 살리라 다짐합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40) _ 9월 10일
Siste, viator.
(시스테 비아토르)

siste, 멈추어라, 정지하라, 머물러라, 영어 stop.
viator, 길손, 나그네, 여행자, 방문자, 영어 visitor. via, 길, 행로, 궤도, 방법
Siste, viator.
멈추어라! 나그네여!
잠간만! 여기서 스톱하시오! 너무 서두루지 마시오!
너무 빨리 가지 마시오!
오던 길 멈추고 숨도 고르시고 뒤도 한번 돌아보십시오!
Siste, viator!
저를 포함하여 현대인들은 사실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특히 한국어 중 ‘빨리 빨리’가 세계인들이 거의 다 알아들을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멈추면 죽는 줄 알고’ 달리기만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일 중독’ Workaholic에 걸린 사람들처럼 바쁘게 살아온 우리들 입니다. 습관성 작업,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체질을 이제는 서서히 교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렛슨 중 하나도 ‘하도 쉬지 않으니까 하느님이 팬더밐을 통해서라도’ 좀 쉬어가면서, 천천히, 뒤도 좀 돌아보면서 살아가라는 교훈을 주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나 드린 예화 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안 중 어떤 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중부 아메리카의 넓은 초원을 정신없이 한 두 시간을 달리다가 갑자기 말을 세우고 말에서 내려 한참이나 넋 놓고 뒤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아니 열심히 달리다가 왜 갑자기 멈추고 이렇게 오래 뒤를 돌아봅니까? 뭐 뒤 따라오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 때 그 인디안의 대답입니다. ‘아 지금까지 몸만 너무 빨리 달려와서 영혼이 못 따라와 영혼이 올 때 까지 지금 기다리는 중입니다’
우리도 조금 기다립시다. 마치 work addiction, 일 중독자 처럼 살아온 자신을 잠간이라도 멈춰 세우고 나 자신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벌린 일이란 꼭 우리가 다 끝내야하는 건 아닙니다. 또 내가 시작한 일이라 해서 내가 꼭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뿌리고, 내 아들은 물을 주고, 내 손주는 거두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도 인생의 지혜입니다. 시작은 우리가 하고 마무리는 그들이 하도록하면 정치도, 경제도, 종교도, 가정도, 사회도 다 괜찮게 돌아갈텐데 … 모든 것은 탐욕입니다. 욕심이 장성하면 결국은 죽음이 옵니다.
우선, 습관적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일 부터 여기서 일단 stop합시다. 우린 흔히 무슨 일을 부탁받으면 대답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사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사람 중 제일 으뜸가는 사람들은 도둑들입니다. 도둑들은 밤이고 낮이고 잠도 않자고 늘 철야 작업을 하면서 아무리 작은 것을 훔쳐도 소리 하나 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성실하고 최선을 다 하느냐 입니다. 하여튼 무조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움직여 온 지난날을 돌아보기 위해서 우린 지금, Siste viator – Stop visitor – 이 나그네 길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말에서 내려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선 제일 열심히, 부지런히, 쉬지 않고 해 온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다. 제일 많이 하는 일, 하루라도, 몇 시간이라도 그것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요? 카톡? 유투브? 컴퓨터? 뉴스보기? 게임? 술? 도박?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정보와 신문과 유투브와 카톡과 소식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부지런히, 열심히, 성실하게 인생을 살겠다는 그 자세와 태도 자체가 나쁘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또 열심히 여행도하고 노는 것도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문학교실이 늘 되새기는 것 처럼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마찬가지로’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모발폰, 스마트폰, 그게 없으면 단 하루도, 아니 하루가 뭡니까? 딘 몇 시간도 못 살듯이 그걸 끼고 사는 우리네 삶은 대단히 크게 병들었고 위험하기 까지 합니다. 모발폰을 들고 문자를 쓰면서, 앞도 쳐다보지 않고 가는 사람들과 부디칠뻔한 일을 거의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 교통사고가 난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게 보셨을 것입니다. 정말 우린 그렇게도 바쁜 것일까요? 병입니다. 제 주변엔 모발폰 없이도 별 문제 없이 사는 분도 있고, email도 일주일에 꼭 한번만 검색하시는 교수도 있습니다.
Siste, viator !
Stop, viator !
나그네 같은 인생들이여, 잠간 멈추십시요!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흘러간 옛노래 ‘신라의 달밤’에 나오는 귀절을 흥얼거립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걸음을 멈추어라”
괴테의 그 유명한 작품 ‘파우스트’의 주제와 줄거리를 다시 또 올립니다. “멈추어라 ! 너 정말로 아름답구나 !”
노자는 ‘무위론’에서 거듭 일러줍니다. ‘가만히 계십시요. 그게 도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일과 사업, 정치와 경제 같은 것은 물론이고 사실 학문이니 진리탐구니 신을 찾아가니 도를 닦니 하면서 별 짓들을 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라와 백성만이 아니라, 기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악행이라고… 아! 노자가 2500년전 가르쳐 준 “무위” –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그냥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라! –
남은 인생은 정말 쌓지 말고 흩으며 살아야지! 여기서 스톱하고 머물러서 지는 석양 묵묵히 바라보아야지! 생각만이라도 다시 하는 하루의 시작입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Siste, viator !
추천도서: 속도에서 깊이로, 윌리엄 퍼워스 지음, 임현경 옮김, 21세기북스, 2010 (Hamlet’s Blackberry, William Powers)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60) _ 9월 11일
“반성문”
요즘도 초등학교에서 계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국민학교 때는 담임선생님이 가끔 반성문을 써오라는 숙제, 혹은 벌을 내리신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싸웠거나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았거나 교실에서 소란을 피웠거나 등등 문제를 일으켰을 때는 꾸중이나 벌을 내리신 후 ‘집에 가서 내일 까지 반성문 한장 써와’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 시절 반성문을 쓰게 하셨던 데는 여러가지 교육목적이 들어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한글 공부 연습, 글쓰기를 통한 창작 훈련,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사고 교육,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상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도덕 교육 등, 참 여러가지 목적이 그 시절 ‘반성문 쓰기’에 담겨있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인문학 친구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세계 3대 참회록 (고백록)으로는 흔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루소의 참회록,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들지 않습니까? 저 역시 젊은 시절에 읽었던 그 글들이 오랫동안 하나의 위대한 반성문으로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있는 한 인간의 신앙과 신학을 담아낸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이에 대해서는 2019년 3월 21일 우리 인문학교실에서 주경식 교수님이 한 명강이 자료로 남아있습니다.) 자신의 내면 세계를 정직하게 들추어낸 루소의 참회록, 인간과 휴머니즘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해 주는 톨스토이의 참회록, 모두 초등학교 시절의 반성문 쓰기를 이어준 저의 젊은 날 독서 여행 중에 만난 축복들이라 하겠습니다.
요즘은 자서전을 출간하는 분들이 퍽 많이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유명인사들로 부터 평범한 시민들도 자서전을 많이 쓰십니다. ‘모든 자서전은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자서전이란 이름이 붙은 글들은 자기의 실수나 잘못은 숨기고 자기 자랑으로 일관되어 있다’ – 혹평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이름이 넓리 알려진 사람들의 자서전 중에는 정치적 목적이나 인기나 화제거리들을 자서전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돈을 벌려는 상업적 목적도 적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통 소시민들의 자서전쓰기는 우리 초등학교 때의 반성문 쓰기 처럼 일상을 돌아보는 자기 반성, 늙어도 계속해서 글쓰는 습작훈련, 그리고 나이들어도 무엇인가를 자꾸해 보는 창조적 자기 기쁨과 보람 같은 것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인문학친구들도 반성문이라 하든, 참회록이라 하든, 자서전이라 하든, 한번 자기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글을 써보시길 권면합니다. ‘아니 원 세상에 홍길복같은 사람도 잡기장을 쓰는데’ 하시면서 용기를 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른이 된후 거의 일생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을 주로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이 곳 저 곳에 글도 더러 쓰고, 보잘 것 없는 책도 몇권 냈습니다. 거기에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문학교실이 모이질 못하니 그 핑계를 대면서 우리 카톡방에 그져 글 같지도 않은 잡기장을 마치 심심풀이 하듯이 내보내기도 합니다.
지금의 모습을 포함하여 지난 날을 돌이켜보며 뭐, 참회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을 반성합니다. 지난날 했던 설교문들도 가끔 들춰봅니다. 남아있는 기도문들도 다시 읽어 봅니다. 어제는 이 카톡방에다 올린 글들도 모두 다시 한번 읽어 보았습니다. 정말 미안도하고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겠습니다. 짧은 지식, 다듬어지지 아니한 식견과 판단, 유치한 표현, 하느님의 이름을 동원한 권위와 위선, 틀린 단어나 오자, 탈자 같은 것들은 모두 차치하고라도, 표현 방법의 미숙함을 넘어서, 혼자만 아는 척, 혼자 잘난 척했던 것들이 다 들켜납니다. 정말 부끄럽고 챙피합니다. 아직도 완벽주의자로 남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이제 그만’이 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모든 게 다 쓸데없는 거야! 헛되고 헛될 뿐인데…’ 하면서 이 새벽, 저는 국민학교 때 한글을 배우며 글쓰기를 연습하며 반성문을 썼던 것처럼, 저 자신을 마주합니다. 쓰잘데 없는 잡문,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스레를 뜬 라틴어 인문학, 오늘로 100번째가 되는 날이니 거기 제 얼굴이 보여 반성문을 씁니다.
반성합니다.
남들이 2, 3천년 전에 다 해놓은 이야길 저 혼자 아는양 수선을 떨어서 부끄럽습니다. 다 이미, 남들이 했던 이야기들입니다. 새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릇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건데 단지 말을 않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남들도 다 아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은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너 보고 하라고 양보하고 있는 거야! 이 바보야!’
추천도서 :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선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3 / 김희보 옮김, 동서문화사, 2008 / 최민준 옮김, 바오르의 딸, 2010
참회록, J.J. 루소, 홍승호 옮김, 동서문화사, 2016
톨스토이 인생론 참회록, 육문사, 2012
(감사의 말씀 : 지난 4월 27일, 처음 카톡에서 잡기장을 시작할 때는 한 100회 쯤이나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코로나가 우릴 여기까지 오게 했네요. 생각 같아서는 어디 팤에서 커피라도 한잔 나누면서 얼굴도 뵙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만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하여튼 백문경 대표님을 위시해서 모든 인문학 친구들에게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은 않하시지만 뒤에서 격려해 주시고, 읽어주시고, 또 다른 친구들과 나누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