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결혼식과 장례식 / Miscentur trista laetis / 아이들과 어른들 / Multi multa, nemo omnia novit / 알고 나면 이해가 됩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0) _ 10월 5일

‘결혼식과 장례식’
지난해 (2019년) 1월 말경 미국 L.A에서 사시던 제 장모님께서 95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름답게 사시다가 복되게 가셨습니다. 장례식 때는 장모님의 유언에 따라 ‘저 좋은 낙원이르니’라는 잘 알려진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저 좋은 낙원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영화롭다 낙원이여
이 산위에서 보오니
먼 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집이로다’
그런데 언듯 보기엔 평범한 장례예식 찬송가이지만 여기엔 장모님의 아주 깊고 오래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 말경 북녘땅에서 먼저 고인이 되신 제 장인어른 이우호 목사님과 결혼식을 올릴 때 불렀던 ‘결혼식 찬송’이 바로 이 ‘저 좋은 낙원이르니’ 였기 때문입니다. 초창기부터 한국교회 교인가족이었던 그이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분은 마침 신학교를 마치고 갖 목사가 되어 처음으로 기독교적 결혼식을 인도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햇내기 목사님은 옛날 신편찬송가에서 이것 저것 고르다가 ‘아 이 찬송가가 결혼식에는 제일 잘 어울리겠구나’ 싶어서 택한 것이 바로 ‘저 좋은 낙원이르니’ 였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사를 다시 읽어보니 결혼식 찬송으로는 아주 적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 좋은 낙원, 한없는 기쁨, 화창한 봄날, 영화롭다, 주 예비하신 것, 화려한 집… 이 모든 표현이 인생의 새 출발을 하는 신랑과 신부에게는 제일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었겠다 싶습니다. 연세가 더해지면서도 가끔 장모님은 그 때, 그 결혼식 때 불렀던 ‘저 좋은 낙원이르니’를 다시 부르시면서 환하게 웃으시곤 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저는 이즈음, 그 옛날 햇내기 목사님이 잘 모르고 골랐다고만 생각했던 결혼식 찬송가에는 인생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깊은 신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결혼식과 장례식이라는 하나의 통과의식은 인생살이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이 찬송을 부르던, 저 성서를 읽던 모든 것은 ‘삶과 죽음’ ‘시작과 마침’의 순환이고 연속이 아니겠는가? 결혼식과 장례식은 모두 다 하나의 시작과 마침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일한 사건이라고도 할수있지 않은가?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고, 또 무엇이 끝났나 싶으면,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웃음 속에도 울음이 있고, 울음 속에도 웃음이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모든 인생살이는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살이는 개별적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이 이어지고 연계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 실패와 성공, 세움과 무너짐, 무너짐과 세움, 만남과 이별, 이별과 만남, 장례식과 결혼식, 결혼식과 장례식, 출생과 죽음, 죽음과 또 다른 출생 – 인생이 마침내 하나로 보여질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조금씩 철이 든다 할 수 있을 겝니다. 집 안에서 보면 이것과 저것이 다른 것 같지만, 집 밖에서 보면 그것이 그것입니다. 지구에서 보면, 이 나라 저 나라, 이 민족 저 민족, 이 사람 저 사람이 달리 보이지만, 우주에서 보면 하늘에서 보면, 그져 모든 것은 다 하나입니다.
일찌기 이미 결혼식 때 장례식도 함께 치루셨던 어른들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의 그날 그 장례식 이후 이어졌을 것 같은 영원한 결혼식도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47) _ 10월 6일
Miscentur trista laetis.

(미스쎈투르 트리스타 라에티스)
miscentur, 원형 misceo, 섞여 있다, 혼합하다, 합쳐 있다, 영어 mixed
trista, 원형 tritis, 슬픔, 근심, 눈물, 영어 tearful, tragedy
laetis, 원형 laetus, 기쁨, 희락, 즐거움, 영어 delight, pleasure
Miscentur trista laetis.
슬픔과 기쁨, 근심과 즐거움은 섞이어 있다.
인생이란, 인생살이란 슬픔과 기쁨, 근심되는 일과 행복한 일이 서로 적당하게 뒤섞여 있고, 또한 피차 교차된다는 뜻입니다. 태어난 후 일정 기간 동안은 슬픈 일만 오다가 ‘슬픔끝’ 하면서 어느 순간 부터는 ‘기쁨 시작’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진감래’ (苦盡甘來) – 쓸 고, 다할 진, 달 감, 올 래 – 라는 사자성어와는 의미를 달리합니다. 고진감래는 ‘쓰린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참고 견디면 마침내는 뜻을 이룬다’, ‘고생 끝에는 낙이 온다’는 뜻으로 다분히 동양적 인내와 종교적 참음을 가르치며, 미래지향적 성격을 지닌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Miscentur trista laetis, 슬픔과 기쁨, 불행과 행복을 동시적이며,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서구적, 인문학적 이해는, 슬픔과 기쁨을 ‘고진감래’의 형태로 보며, 시간적 차이로 해석하는 동양적, 종교적, 미래적 이해와는 다른 시각에서 봅니다.
하여튼 오늘의 라틴어 문장인 Miscentur trista laetis는 인생을 인문학적이며, 현실적으로 보려는 그리스-로마식 철학이 뭍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슬프기 만한 인생도 없고 반대로 기쁘기 만한 인생살이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양적,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것들은 시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니까, 참고 기다리라고 일러줍니다만, 서구적, 인문학적 시각으로 볼 때는, 슬픔이나 기쁨은 다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공간 속에 섞여있는 것임으로, 이 역시 참고 견디며, 이것도 보고, 저것도 헤아리면서 넓은 마음과 도량을 지니라고 충고해 줍니다.
Miscentur trista laetis ‘슬픔과 기쁨은 섞여있다’는 이 말은 슬픔 속에도 기쁨이 있고 기쁨 중에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이는 더 나아가 슬픔과 기쁨,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보고, 같은 것의 다른 표현으로 보려는 생각이 깃들어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은 다른 것이 아니다. 똑같은 것을 다른 자리에서 볼 뿐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은 인생이란 하나의 연극인데, 그 연극은 비극과 희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생이란 하나의 연극이다. 어제는 비극을 상연했으면 오늘은 희극을 연출한다. 매일 똑같은 극만 보여준다면 어느 관객이 이 인생 연극장을 찾아오겠는가?’
자, 그러니 오늘의 라틴어, Miscentur trista laetis ‘슬픔과 기쁨은 섞이여 있다’는 말을 다시 되새기면서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기쁨과 웃음을 찾아보시고 즐거움과 행복 가운데서도 신중함과 엄숙함을 찿아 보시기 바랍니다’
Miscentur trista laetis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1) _ 10월 7일
‘아이들과 어른들’
아이들은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아이들은 참을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늘 자기들이 먼저 하려고 합니다.
먼저 먹으려 하고, 앞장 가려고 하고, 먼저 잡으려하고, 먼저 말하려고 하고, 먼저 나서고, 자기가 일등이 되려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무엇이든 천천히 하려고합니다. 서두루지 않고 기다릴 줄 압니다. 어른들은 나중에 먹겠다고 하고, 나중에 하겠다고 하고, 마지막에 고르겠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말하는 것도 남들이 하는 이야길 다 들어본 다음에 하려고 합니다. 남들 뒤에 서고, 꼴등하는 것도 좋다고 하는 게 어른입니다.
어른들은 손주들과 시합을 하거나 경쟁을 해도 늘 져주려고 합니다. 지는 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간 꼭 실수한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는 길과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른의 자세라는 걸 아는 겁니다.
선생님이 먼저 고르세요. 전 나중에 가질게요.
선생님이 먼저 말씀하세요. 전 선생님 말씀 듣고 난 후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선생님이 먼저 앉으세요. 전 아직 서있어도 괜찮습니다.
나이가 더해지고 어른이 되어가면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냥 알아지는 것들입니다.
인문학, 인문학 하는데, 인문학이 뭐 별건가요?
하루 하루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지요. ‘사람이 사람처럼 되는 것’이 인문학이랄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영원한 목표, 우리가 쉬임없이 가야할 길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저는 아침이나 저녁 시간엔 늘 짧은 기도나 묵상 이후에 일기를 씁니다. 아주 오래된 습관입니다. 저를 돌어보는 훈련이지요. 어제 했던 일과 던졌던 말들을 되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단 하루도 부끄럽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어떤 땐 어른이 되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철없는 아이가 되어가는 저 자신을 보면서 ‘멀었구나! 정말 멀었구나 !’ 한숨을 쉽니다.
요즘 한국의 신인 트롯트 가수로 크게 유명해진 임영웅이란 분이 얼마 전 자신의 선배 가수인 이미자씨와 나훈아씨의 공연을 보고 난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정말 전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갈길이 멀고도 멀군요!’ 요즘은 이렇게 공개되는 글에선 누구, 누구 하면서 이름을 말하는 게 참 어려워서 누구 누구라고 거명을 하진 못하겠지만, 저 역시 저 앞서 인생을 살아오신 선배들을 생각해 보면 ‘저야말로 언제 사람이 되고 어느 세월에야 어른이 될 수 있으려나? 멀었다, 정말 멀었구나’ 싶습니다.
이 아침도 부끄러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48) _ 10월 8일
Multi multa, nemo omnia novit.

(물티 물타 네모 옴니아 노비트)
multi, 원형은 multitudo, 군중, 대중, 대다수, 많은 사람, 영어 multitude
multa, multi와 같은 뜻으로 사람이 아닌 물건에 쓰임, 다량, 온갖 것, 많은 것
nemo, 누구도 ~아니다, 아무도 ~않다.
omnia, 모든것, 일체, 전체,
novit, 원형은 novi, 안다, 알고 있다.
Multi multa nemo omnia novit.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많으나,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없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많지만, 전지전능한 인간은 없다.
오늘 우리 시대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시대입니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거대한 우주와 자연, 인간과 역사로 부터 시작하여 일상에서 벌어지는 깨알같이 작은 것들 까지도, 정말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라틴어 문장은 이런 우리들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줍니다.
Multi multa nemo omnia novit.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많이 알 수는 있어도,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omniscient 하거나, omnipotent 한 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남들 보다 공부 좀 더하고 책 좀 더 읽었거나, 이것저것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냈다고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것’이란 비교적이요, 상대적입니다. 절대로 절대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많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적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지식과 정보란 언제나 제한적인 것임으로 ‘많이 아는 것 같아도 실은 별것이 아니니’ 우쭐대거나 뽐내지 말고 늘 겸손해야한다는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박사’란 ‘넓을 박’이 아니라 ‘얇을 박’ 박사라는 말도 단순히 우수개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한국남자들은 모였다하면 군대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를 주요 화제로 삼는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남자들은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저마다 전문가요, 일가견을 지닌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가 아예 작심을하고 깊고 깊은 산골에 들어가 일체 모든 뉴스를 차단한 채 한 10년 쯤 후에 세상에 다시 나와도 정치계는 똑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린 모른다고해서 하나도 손해될 것도 아니고, 안다고 해서 하나도 득될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냥 입씨름만 거듭하고 피차에 마음만 상하게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Multi multa nemo omnia novit.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문장이 일깨우는 두 번째 렛슨은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꼭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종종 많은 것을 알려고 하다가 정말 꼭 알어야 할 것, 인생에 있어서 정말로 소중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 저것 잡다한 것들, 별로 쓸모없는 것, 몰라도 괜찮은 것들은 많이 알고 있는데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볼 것을 요청합니다. 정말 알아야 할것, 정말 꼭 알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Know yourself.
‘나는 오직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I know only one thing that is that I know nothing.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What is I?
Multi multa nemo omnia novit.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길 !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2) _ 10월 9일
‘알고 나면 이해가 됩니다’
인간이해에 대한 저의 생각 중 하나입니다.
‘내가 미처 몰라서 그렇지 알고 나면 이해가 되고 모르면 늘 오해가 생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 중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내운 선생님은 1960년대 초, 제가 대학에 들어갔던 해에 문과대학 교육과의 교수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채플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무슨 특강 때였는지 정확하게 기억 되지는 않지만 그 무렵 선생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초창기 한국 교육계에서 민주와 민족교육을 이끌어 오신 성내운 선생님은 대학교수로 오시기 전, 당시 문교부 수석 장학관으로 일하시던 중에 겪었던 일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서대문에 있는 미동국민학교로 장학시찰을 가셨답니다. 마침 4학년 교실에 수업참관을 들어가셨는데 미술 시간이었답니다.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자유화 시간이다. 너희들이 그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그려라’ 아이들은 질문이 많았습니다. ‘선생님! 집 그려도 되요? 자동차 그려도 되요? 비행기 그려도 되요? 꽃 그려도 되요? 나무는요? 새는요? 해는요? 별은요? 아빠 그려도 되요? 엄마 그려도 되요?’ 등등 많은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자유에 대한 훈련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질문과 두려움이 많은 법이잖아요? 하여튼 그 때 마다 선생님은 연속 똑같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래 그래 무엇이든 그리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그려라’ 드디어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앞에서 부터 학생들의 그림 그리는 것을 개별적으로 살펴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중간쯤 오셨을 때, 선생님은 한 아이에게 약간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 이녀석아 이런 그림이 어디있어 ! 어떻게 주먹이 얼굴 보다 몇배나 크냐? 고쳐서 그려봐!’ 그리곤 다음 학생에게로 넘어가셨습니다. 야단을 맞은 아이는 그림을 좀 빨리 그렸는지 이미 색칠까지 다 한 것을 다시 고쳐보려고 야를 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수업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습니다. 선생님은 말씀했습니다. ‘오늘 그린 그림을 모두 다 앞으로 가져 오너라. 끝까지 완성 못한 것도 괜찮다’ 그리곤 아이들의 그림을 모아선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성내운 장학관도 교무실로 따라 가셨습니다. 그리곤 담임선생님께 아이들의 그림을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조금전 그 아이가 그린 도화지는 약간 구겨져 있어서 금새 눈에 띠었습니다. 들여다보니 미동국민학교라고 쓰여진 교문 앞에 왠 조그만 아이 하나가 넘어져 있는데 그 옆에는 등치 큰 고등학생이 교복을 입은채 손을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주먹을 쥔채로 어린 아이를 때리려는 그림이었는데, 정말 그 고등학생의 주먹쥔 손이 얼마나 큰지 얼굴 보다 한 3,4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성내운 선생님은 담임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그 4학년짜리 학생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데리고 운동장 곁에 있는 나무그늘 벤치에 앉으셔서 말을 붙였습니다. 이름이 뭐니? 어디사니? 부모님은 다 계시니? 그런데 아이는 아무 대답도 않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후 성내운 선생님은 또 물었습니다. ‘넌 오늘 무슨 그림을 그렸니? 선생님도 초등학생 때 그림을 잘 못그렸어. 그래서 선생님한테 꾸중들은 적이 있었어’ 이렇게 말하자 갑자기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월사금을 못냈단 말입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무슨 그림을 그렸느냐?’는 질문에 아니 ‘월사금을 못냈다’니? 시간은 좀 지났지만 그날 성내운 선생님은 그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점심도 사 먹이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미술 시간이 있기 몇일전, 학교에서는 월사금 밀린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서 월사금을 받아오던지 아니면 언제 까지 내겠다는 약속을 받아가지고 와서 책가방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도 월사금을 못 냈기에 책가방은 교실에 둔채 그야말로 쫓겨나서 월사금을 받아오려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아이는 집으로 가지 않고, 남대문 시장에서 노점을 하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함께 정사하는 다른 몇분 아저씨들에게서 부탁하여 돈을 꾸어서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애는 너무 신이 나서 그 돈, 그 월사금을 손에 꽉쥔 채로 다시 달려서 학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왠 고등학생 형이 교문 앞에서 아이를 가로막더니 ‘야 이 자식아! 그 돈 이리 내놓아!’ 하더니 주먹으로 갈기곤 그 돈을 빼았아 갔습니다. 소위 깡패에게 아빠가 힘들게 빌려서 까지 주신 월사금을 빼기고 만 것입니다. 한참후 아이는 담임선생님에게 가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몇일만 더 기다려 달래요’ 그리고 책가방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두워진 후 아버지는 돌아오셔서 물었습니다. ‘오늘 월사금 잘 드리고 왔냐?’ 아이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예 잘 드렸어요’ 아이의 마음엔 고민이 생겼습니다. 학교에다는, 몇일만 기다리라고 하고, 아빠한테는, 월사금을 잘 냈다고 했으니, 정말 어쩔 수 없는 갈등과 고민 속에 어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순간, 미술 시간에 선생님은 ‘뭐든지 그려도 된다. 자유다. 그리고 싶은 것은 아무 것이나 다 그려라’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이는 당연히 그날, 그 순간, 월사금을 빼겼던 순간, 자기의 모습과 고등학생 형아와 그의 주먹쥔 손이 떠올랐습니다.
성내운 선생님이 대학 신입생인 저에게 들려주신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얼굴 보다 10배도 더 큰 주먹을 그린 그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누군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를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면 마침내는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오해는 몰라서 생기고 모든 이해는 알아야 가능해 집니다’
저는 오늘도 당신을, 당신의 참 모습과 깊은 마음을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