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목사님이 뭐 인생을 아세요? /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 Living Together – 함께 사는 삶 /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 인문학적 해석 연습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3) _ 10월 12일
‘목사님이 뭐 인생을 아세요?’
한 20여년 전, 제가 현역에서 목회하던 교회엔 아주 구김살이나 티없이 화통하고 밝은 성격을 지닌 여자 권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연세는 저보다 한 7, 8세 쯤 위였습니다. 예배후 점심식사 때나 차를 마실 때는 물론이고, 무슨 공개 행사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편하게 둘러앉은 저리에선 걸죽하게 농담도 아주 잘하셔서 여러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게 하시곤 했습니다. 하여튼 유머감각이 뛰어나시고 위트와 재치가 넘쳐나는 재담가였습니다.
‘목사님은 바울이나 베드로가 제일 좋다고 하시겠지만 난 세상에서 나훈아와 남진이 제일 좋더라’
이런 식으로 교인들 앞에서 트로트가수들 이름을 쭉 열거하다가 분위기에 따라 한두곡을 뽑기도 하셨습니다.
숟가락을 마이크처럼 들고 구수하게 인생노래 한곡을 부를 때, 교인들 중에는 ‘아멘’ ‘아멘’ 하면서 장단을 맞추는 이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이가 한 좀 지나치다 싶은 농담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사모님과 침대에서 부부생활을 할 때도 사도신경 부터 시작한데요’
한번은 제가 그 권사님을 따로 만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권사님 아무리 그래도 어떤 농담은 너무 하십니다’ 그러자 그 재담가 권사님은 좀 머뭇거리다가 약간 정색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어디 인생을 아시나요? 목사님은 성경 많이 아시고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니까 물론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들 보다 많이 아시겠지요. 그러나 어디 목사님이 이제까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머슴살이를 해 보셨나요? 식모살이를 해 보셨나요? 막말로 목사님이 언제 똥지게를 지어 보셨나요? 사장한테 따귀를 맞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목사님이 여자들의 한을 아시나요? 목사님이 애기 젖을 물려본 적이 있으신가요? 목사님은 인생을 몰라요! 평생 하나님 공부는 많이 하셔서 하나님은 잘 아시겠지만 인생체험은 별로 없으셔서 인생이란 무엇인지 모르실거예요! 신앙도 체험이라고 하시지만 인생도 체험이라고 생각해요.’
이젠 세월이 흘러, 그렇게도 농담과 빼있는 재담으로 저를 당황케도하고, 깨닫게도 해 주시던 그 권사님도 점점 연세를 더해 가시면서 예전의 생기발랄함을 많이 잃어가고 계십니다.
은퇴후 저는 뜻을 함께하는 분들 한 30여분과 함께 ‘시드니 인문학 교실’ 이란 것을 꾸려 수년째, 인생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럿듯 강연도하고 글도 쓰고 토론도하면서 인생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전 그제나 이제나 여전히 ‘인생에 대해선 뭣도 모르면서’ 꼼지락 거리고 있습니다. 예전엔 대놓고 ‘뭐 목사님이 인생을 아시나요?’ 하시던 권사님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참말을 해 주는 이 조차도 주변에서 한 두분씩 멀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저를 용서해 주시길 빌며…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49) _ 10월 13일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마그나 프에릴리타스 쿠아에 에스트 인 메
magna, 큰, 놀라운, 위대한, Magna Charta 대헌장
puerilitas, 원형 pueritia, puerilis, 유치함, 철없음, 오린애 같음
puae, 요구, 욕구, 욕망, 바램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마그나 프에릴리타스 쿠아에 에스트 인 메
내 안에는 엄청나게 유치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속에는 어린애 같은 욕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인간성 속에는 놀라운 유치찬란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내 속에는’ ‘저를 포함한 우리 인간성 안에는’ 위대한 성품, 고상한 성품, notabilis와 더불어, 유치하고 비루한 욕망, puerilitas quae도 함께 공존, coaeva, coaevus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침엔 고상했지만 저녁이 되면 부끄럽고, 어제는 선한 의지를 갖었지만 오늘은 악한 생각이 솟아나고, 30년 전엔 나도 아름다운 꿈을 지녔는데 지금은 그만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고상함 – 사랑, 희생, 나눔, 이해, 희망, 평화, 인내, 착한 마음, 성찰 등등은 점점 살아지고, 인간을 슬프게 만드는 유치찬란함 – 탐욕, 교만, 미움, 이기주의, 성공, 출세, 거짓, 위선, 사악함이 나날이 ‘내 속에서’ 자라고 확대되더니 이젠 거의 나를,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 저 분, 아니 저런 정치 지도자가, 저런 종교 지도자가, 저런 학자가, 저런 opinion leader 속에, 어쩜 저렇게도 유치하고 사악하고 거짓됨이 숨겨져 있었을까? 우린 깜짝, 깜짝 놀라곤 합니다. 아니 그 보다 더 놀랍고 부끄러운 것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자신이 들키고만 것입니다. ‘나 까지도’ 그이들과 똑같거나, 아님 그 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나은 것이란 하나도 없는 인간임이 노출되고 만 것입니다. ‘아 인간이란 처음부터 철없고 어리석고 유치한 존재로구나!’ 전 요즘 어린 손주들과 놀다가, 제 수준이 꼭 손주 수준이라는 걸 발견하곤 합니다. 내 속에는, in me, 참 놀라운 유치한 욕구, magna puerilitas quae가 있구나, est.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마그나 프에릴리타스 쿠아에 에스트 인 메
오늘도 우리 속에서, 내 안에서 이어지는 고상하고픈 욕구와 유치해 지려는 본능 사이에서, 인문학은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에 대해 성실해 지도록 우리에게 경고를 보냅니다.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내 속에는 엄청나게 유치찬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나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좋은 아침입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4) _ 10월 14일
Living Together – 함께 사는 삶

저희들이 살고 있는 호주는 흔히 다문화사회, Multicultural society 라고 합니다. 실제 시드니만 해도 세계 180여개나 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와 문화, 전통과 역사, 음식과 종교를 배경 삼아 서로 어울려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다른 동리와 마찬가지로 저희들이 살고 있는 마을 입구에도 “Many culture, One community” – 다양한 문화에 하나의 지역사회- 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초창기엔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통합하여 하나의 교단을 이룬 ‘호주연합교회’ – 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 – 도 통합 후 몇년만에 “호주연합교회는 다문화교회다” – 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 is the Multicultural Church – 라는 신학적 선언을 했습니다.
인문학의 궁극적 꿈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협력하고, 사랑하여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개성, 성격, 생각, 경험, 주의, 주장, 이념, 목표,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피차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보다 더 살기 좋은 공동체가 될 것 이라고 믿습니다.
아프리카 속담 중에 있는 말입니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 –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남긴 말입니다.
‘혼자 꾸는 꿈은 그냥 꿈에 지나지 않지만 같이 꾸는 꿈은 언젠가는 꼭 현실이 됩니다’
마더 테레사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당신은 내가 못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린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일본 속담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개의 화살은 쉽게 끊어지지만 10개의 화살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만유인력을 발견했던 존 뉴턴은 자신의 업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좀 더 멀리 보게 된 것은 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곰곰히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은 그 누군가가 우리를 도와주고 살펴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과 배우자, 자녀들과 이웃들, 친구들과 선생님이 계셔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낮고, 한 손으로는 박수를 칠수 없드시, 인생길은 혼자선 갈수가 없습니다. 지금 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사막과 정글과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우린 서로 길을 알려주고, 소식을 전해주며, 함께 손을 잡고,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가야, 죽음의 순간에서도 아름답게 인생 여행을 마무리 할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서로 함께 가고, 다같이 살려는 노력중 하나입니다. 누구는 빨리 가고, 누구는 묶어 두면 않됩니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혼밥, 혼술은 할 수 있어도, 그래도 그 밥과 그 술은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입니다. 세상만사, 한 발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다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동양과 서양, 진보와 보수, 이 종교와 저 종교, 서로 싸우거나 이기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서로 보충하고, 메워주면서 협력하고, 같이 가야할 인생과 역사의 동반자입니다. 작은 고을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들이 모여 대양을 만들어냅니다. America Furst는 절대 않됩니다. 세계는 운동 시합이 아닙니다. 우리는 Australia First, Korea First 할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탈 때만, You first, me last 할 것이 아닙니다. 세계는 ‘공생 공사’ ‘일심동체’로 엮여져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Global이라고 합니다.
여당은 야당을, 야당은 여당을, 진보는 보수를, 보수는 진보를,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고 안아주고 함께 가야합니다. ‘피차 물고 싸우면 다같이 멸망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모두 그게 그 것입니다. 하늘에서 보면 벤쯔나 현대는 구별이 않되고, 지구는 그저 둥굴게 보일 뿐입니다.
우린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협력의 대상입니다. 개인도, 국가도, 정치도, 종교도 모두 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공동 운명체’ 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구호 활동을 하던 한 서양 선교사가 길을 가다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놀고 있는 아이들 10여명을 보고 이리 말했습니다. “얘들아, 우리 달리기 시합 한번 하자. 1등 하는 아이에는 내가 이 커다란 과자 상자를 상으로 줄께” 그리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곤 ‘출발!’ 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아이들은 한명도 뛰지 않고 그냥 그대로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물었습니다. “아니, 왜 그러니? 왜 뛰질 않는 거니?” 그러자 한 아이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1등한 친구만 상을 받으면 나머지 9명은 어떻게 하라구요? 우린 그런 게임 않해요!”
지금 우리는 잘못된 서구적 사고 방식, 자본주의의 모순, 끝없는 경쟁적 교육, 이기적 논리, 성공만이 내 인생의 목표라는 그릇된 생각에 포로가 되어 그걸 교육이요, 신앙이요, 선교요,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목표인양 ‘갈라치기’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보다 더 아픈 것, 더 쓰라리고 위험한 것이 무엇인질 그 코로나의 한 가운데서도 깨닫지 못하는 게 저와 우리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Living Together !
함께 가고,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해 지는 세상을 위해 마음 쓰시는 인문학 친구들에게…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50) _ 10월 15일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쿠이스 쿠스토디에트 이프소스 쿠스토데스
quis, 원형 qui, 어느, 누가, 어떤
qustodiet, custodes, 원형은 custodio, 지키다, 감시하다, 감독하다, 경비하다, 경계하다, 수위, 경비, 감시자, 보초.
ipsos, 원형은 ipse, 자신, 자체, 정확히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쿠이스 쿠스토디에트 이프소스 쿠스토데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감독자는 누가 감독할 것인가?’
우리가 사는 사회조직은 층층이 감시, 감독, 경비 체제가 갗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 모든 조직 체계에서 가장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가 감독하고 감시할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학생은 선생이 감독하고, 선생은 교장이 감독하고, 교장은 문교부가, 문교부는 감사원이 감독한다면, 감사원은 누가 감사한다는 말인가? 물론 오늘의 정부나 각종 사회 조직은 피차, 상호 견제하는 여러가지 장치들을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도와 조직에는 헛점들이 있게 마련이고, 또 인간이란 교묘하게 이런 헛점들을 이용하여 피해가곤 합니다.
저희도 지난해 올림피아를 방문해 보았습니다만,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는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와 이들을 응원하는 관객들과 멀리 언덕 위에서 이들 선수들과 관객들을 동시에 내려다 보는 철학자들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회학자들은, 사회가, 언론이, 타인들의 눈이 늘 ‘나’를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문학자들은 내 양심이, 나 자신이 ‘나’를 늘 들여다 본다고 말합니다.
종교인들은 하늘이, 하느님이, 신께서 늘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살피신다고 말합니다.
사회와 언론과 인간들이 하든, 내 양심과 내 인격이 하든, 아니면 하느님께서 하시던, 그도 아니면 이 셋이 합동작전으로 하던, 하여튼 인간과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엔 반드시 감시하고, 감독하고, 경계해야 할 그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성품을 지닌 존재이며,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은 단지 정치-경제 조직만이 아니라 양심과 영혼을 다루는 종교조직 까지도 약한 취약성을 지닌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제일 감시, 감독, 견제를 덜 받고, 않받고 있는 곳이 각종 시민운동 단체들과 종교단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한다고하는 그들을 감독한단 말인가? 정말 우리 사회는 인권과 정의, 평등과 선한 일을 외치는 조직이나 그런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누가 나서서 감독하고 견제할 것인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종교단체나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사찰이나 교회의 포교, 선교, 설법, 설교, 재정, 인사를 감시 감독하여 빗나가지 않토록 견제할 수 있을까요? 동시에 이런 조직들은 많은 경우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스스로, 자체적으로 감시, 감독한다고 합니다만, 사실 그런 행태에 공신력이 있을까요? 자기들 끼리 적당히 짜고, 봐주면서 넘어가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AI 나 Google 을 포함한 각종 인터넷과 컴퓨터가 사람이나 조직이나 규정 보다 훨씬 더 감시, 감독 기능이 우월하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이런 정보를 다루는 기기 자체를 최종적으로 다루는 것 자체역시 사람이기에 믿을수 없기는 매 마찬가지라고들 하십니다.
정말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의사의 건강은 누가 돌봐주고, 설교자에게는 누가 설교해주고, 감사원장은 누가 감사하고, 대통령에게는 누가 참말을 해 줄 것인가?
다시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나를 감시하는 감시자는 누구인가? 나에겐 감시자, 감독자가 있기는 한가?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저 부터 다시 저를 들여다보는 아침입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5) _ 10월 16일
“인문학적 해석 연습”
먼저 잘 알려진 이야기 하나를 예문으로 올립니다.
세실은 자기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께 물었습니다.
“신부님, 기도하다가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신부님이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인데, 담배를 물고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지요!”
얼마 후 세실의 친구 모리스가 신부님께 물었습니다.
“신부님,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도를 드렸는데 괜찮을까요?”
신부님이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없다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기도는 드릴수 있네”
똑같은 질문 같은데 무엇이 다른가요?
순서만 바꿔서 물어본 것인데 대답이 달리 나온 이유는 왜 그럴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부족한 사람의 인문학적 해석의 연습 중 하나입니다.
1) 우선 이 이야기에서 ‘기도와 담배’는 글자대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대표성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여기에서 기도란, 성스럽고, 바람직하고, 아름답고, 우리가 하고 싶어하고, 또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를 상징하고 대표합니다. 반대로, 담배란 세속적 욕망으로써, 바람직스럽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끊어버려야 할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3)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늘 섞이어 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삶의 태도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우린 그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이걸 했더가 저걸 하고, 저걸 했다가 또 이걸하곤 합니다.
4) 완전한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인과 속인이란 처음부터 구별되어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몰라서 그렇지 알고나면 모든 인간은 ‘거기서 거기’ 입니다. 어쩜 성인이란, 기도는 앞에서 하고 담배는 뒤에서 피우는 사람이고, 속인과 범인은 담배는 앞에서 피우고 기도는 뒤에서 드리는 사람이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50보, 100보 입니다.
5) 인생살이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 중 첫째는 상황판단을 잘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기도를 드릴 때인가, 아니면 담배를 피울 때인가를 잘 판단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기도할 시간에 담배를 피우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때인데 기도를 드릴려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말과 행위는 상황에 적합할 때는 선하다, 잘했다는 말을 듣지만, 상황에 적절하지 못하게 되면 악하다, 나쁘다라는 비난을 피치 못하게 됩니다. 24시간, 365일 계속해서 기도만 드리거나, 계속해서 담배만 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둘은 피차, 끊었다 이어지는 행동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지금과 여기’입니다. 상황을 판단하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 Here and Now가 중요합니다.
6) 둘째는 삶의 ‘우선순위’ 즉 인생과 행위의 Priority를 결정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이것 역시 앞서 말한 상황판단과 연계된 행위입니다. 상황을 판단했으면,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정하는 것입니다. 기도인가? 담배인가? 먼저 할일 먼저하고, 나중 할일 나중 할줄 아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7) 보통 우리들이 자신에 대해서나 타인이나 공동체 속에서 일을 그르치게 되는 원인은, 상황판단을 잘못하고,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정함으로 생겨나게 됩니다. 기도할 때인가, 담배를 피울 때인가? 기도를 먼저 할까, 담배를 먼저 필까? 우리 개인의 삶과 공동체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은 “지금이 어느 때, 어느 순간, 어떤 자리” 인지를 모르고 “먼저 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루고, 후에 해도 될 일을 지금 함으로” 일의 우선순위를 뒤섞어 놓는 데서 발생한다고 봅니다.
8) 위의 해석은 가능한 짧게 풀어본 유치한 저의 해석입니다. 이 아침 인문학 친구 여러분들도 나름 세실과 모리스와 신부님의 기도와 담배 이야길 제각기 한번 해석해 보시지요. 이런 것도 인문학적 해석연습 중 하나가 될테니까요.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좋은 주말되시길 빌며…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