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선진국과 선진국민이 되려면 / SKY를 떠난 젊은이들 / 알 수 없는 홍길복과 이해되는 파우 카살스 / 나이가 더해지면서 깨닫게 되는 것 (2) / 생각하기와 생각대로 살아가기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06) _ 2021년 2월 15일
“선진국과 선진국민이 되려면”
최근 코로나 팬데믹이 계속되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한인사회의 원로 언론학자이며 실무 언론인 출신이신 김삼오 박사께서 인문학적 교양서적 한권을 출판하셨습니다. 책 제목은 “선진국이 되겠다면 선진 매너와 에티켓부터 배워야” 입니다.
이 책은 Prologue와 후기를 제외하면 모두 25개의 실제적 삶과 연계된 실용적 문화와 생활철학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이나 의식구조를 지닌채 서방과 영미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한국인들의 매너와 에티켓이 주요 화두입니다. 필자는 진정한 선진화는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을 넘어서 “자유민주의 가치”라는 바탕 위에서서, 그동안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녀왔던 습관화된 우리의 매너와 에티케을 반성하고 새롭게 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일러줍니다.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고, 일상화 되어 있는, 각종 권위의식, 차별의식, 서열의식, 집단주의, 지역감정, 연줄의식, 출세주의, 배타주의, 지적억압, 체면문화, 지나친 감정표현, 보편적 가치와 상식 무시하기, 불공정한 사회풍조와 그 시스템 등을 실제적 예를 들어가며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잡기장은 이 책 가운데 처음 10개의 글 중에서 옮겨와 다듬어 본 것들입니다.

* 그간 우리의 국제화와 선진화란 1인당 국민소득과 생산시설이나 생산량 같은 경제와 물량지표를 잣대로 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그에 걸맞게 사람도 사회도 국제화되고 선진화 되어야한다.
* 아무리 거창한 과업도 가까운 데서 출발해야한다. 매너와 에티켓이다. 영어 에티켓의 우리말은 예의일 테고, 매너는 그 보다 범위가 넓은 구성원들의 행위양식이다.
* 갑질은 나쁜 매너이고 애써서 보낸 편지에 답장 조차하지 않고 묵살해 버리는 것은 나쁜 에티켓이다. 이런 것은 인권존중 사상의 부재와 그 의식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는 선진 서방국가들이 일찍 자리매김한 자유민주주의다.
* 강한 직위의식과 뿌리 깊은 관존민비사상, 명함을 헤프게 돌리는 사회, 서민주의 사회의식의 상실, 권위주의, 여전히 관운 운운하는 사회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넓고 깊게 남아있다.
* 나이나 직위나 성별에 차이를 두지 않고 그냥 그대로 이름을 부를수 있는 퍼스트 네임 (first name) 호칭 사회가 되어야한다. 회장님, 총장님, 장군님, 부장님, 과장님, 선생님, 원장님, 사모님, 목사님, 신부님 이라고 하면서 ‘님’자를 붙이는 사회풍조가 살아지고 그냥 아저씨, 아줌마로 불러도 스스럼없이 통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제나 올까?
* 나이를 가지고 대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않된다. ‘젊은 놈’은 꼭 먼저 인사를 해야하고 나이 많은 사람은 늘 인사를 받은 후에 답례를 해야 하는가?
* 집단주의적 습성을 어서 털어버려야 한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수많은 집단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많은 종친회, 동창회, 향우회를 비롯하여 Korean이란 접두어를 붙인 단체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인다. 경우에 따라 이런 것들은 일종의 패거리문화를 만들기도 하고 끼리 끼리로 인한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회식문화도 털어 버려야할 것 중 하나이다. ‘호주는 심심한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난 지옥’이라는 농담 같은 말은 어서 살아져야 한다.
* 냄비근성도 마찬가지다. ‘빨리 빨리’는 결코 자랑이 아니다. 실적을 위해 밀어붙이면 인권이 망가지게 된다. 사실 서방사회의 기다릴 줄 아는 사회분위기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없으니 기다릴 수가 없고 ‘빨리 빨리’를 외치게 된다. 이런 것은 다 군대식 능률주의가 낳은 산물이다.
* 기분 (Kibun)과 눈치 (Nunchi)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 민족이라고 한다. 우리는 눈치를 잘 봐야 성공하고 출세한다고 한다. 이걸 극복해내지 않으면 우린 선진국, 선진국민 – 아직 한참 멀고멀다고 하겠다.
* 우리 사회는 ‘무엇을 아느냐’ 보다는 ‘누구를 아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 ‘언제 결혼 할 거냐?’, ‘애는 언제 낳을 거냐?’ 이런 걸 물어보는 것도 상대방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거나 성희롱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우린 아무리 친해도 호주사람들에게는 물을 수 없는 것들을 별로 친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쉽게 물어보곤 한다.
* 영어에서는 상대방이 그 누구이든 ‘you’ –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인들 사이에선 그게 않된다. 이것도 서열의식과 권위주의, 계급의식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 ‘Ladies and gentlemen’을 우리는 ‘신사 숙녀 여러분’이라고 순서를 바꾸어서 번역한다. 이런 것도 다 그 밑바닥에는 남녀 차별의식이 있다는 표시가 된다.
* 군사부일체 사상은 어서 극복해내야 할 권위주의의 잔재이다. 교수와 학생 사이의 지적억압이나 목사와 교인 사이의 종교적 상하의식도 어서 끝을 내야한다. 우리도 ‘스승의 날’이 없는 사회, 목사도 편안하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수 있을까?
(추천도서: 선진국이 되려면 선진 매너와 에티켓부터 배워야, 김삼오 지음, 바른북스, 2020)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07) _ 2월 16일
“SKY를 떠난 젊은이들”
몇주전 자칭 호주를 대표하는 신문이라고 하는 ‘××일보’에는 한국에서 가장 일류라고 하는 S대학교 동창회 호주지부 이야기를 지면 전체를 할애하여 아주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그 대학 출신들이 호주에는 얼마나 되고, 또 그들이 한인회장 등 여러 단체에서 얼마나 크게 활동해 왔는지를 알리는 홍보성 기사였습니다. 꼭 한 대학의 동창회지 같은 내용을 그렇게 까지 크게 편집하여 실은 신문사의 의도와 속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공공성을 지닌 매스 미디어가 이런 식으로 신문을 편집, 제작하고, 무료로 배포하는 행위는 우리 사회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차별의식과 학벌주의를 부추길수 있는 위험성과 역기능이 있다고 봅니다.
혼자서 그런 씁쓸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10여년 전, 대학과 학벌주의에 대한 반항과 거부 운동에 앞장섰던 몇몇 젊은이들 생각이 나서 구글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 김예슬씨는 2010년 3월, 고려대학교 3학년 때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나는 오늘 이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나는 오늘 이런 대학을 거부한다.”는 제목하에 대학은 물음도 없고 대답도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고 부르짖으며 자신은 이제 스스로 이런 대학을 버림으로 진정한 큰 배움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후 그는 반핵운동을 비롯하여 노동자 인권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에 몸담아 오다가 지금은 국내외 나눔운동을 펼치는 “나눔문화” 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유윤종 (필명은 공현)씨는 2011년 10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에 재학 중 대학이 학벌주의 온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비판하고, 소위 일류대학이 어떻게 모든 한국의 청소년들을 한줄로 줄세워 왔던 지를 통열하게 비판하며 스스로 자퇴를 선언했습니다. 그 후 그이는 오늘 까지 꾸준히 대학입시 폐지운동을 이어 오면서 대학이 청소년들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현실과 투쟁해 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여호와의 증인 교인이 아닌데도 오직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다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을 일으키며 1년 4개월이나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 장혜영씨는 같은 2011년 11월 불과 졸업을 3개월 앞두고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말에 자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4년 내내 장학생으로 공부해 왔습니다.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 붙였던 그의 “공개 이별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이 대학의 교훈에 따라 진리가 나를 자유케 했습니다. 나는 진리를 따라 학교를 떠나 학교 보다 더 참된 진리를 찿아갑니다’ 그 후 그는 장애인 동생의 자립 다큐멘타리인 ‘어른이 되면’을 만들면서 한국사회에서의 장애인 인권운동을 이어오다가 최근엔 정의당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 그 당의 대표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널리 알려졌습니다. 최연소 국회의원 장혜영씨는 말합니다. “정치란 끝없이 슬퍼하며 동시에 분노하면서도, 내일을 생각하며 살아갈 힘을 남겨두는 일입니다.”
물론 이들 외, 다른 대학에서도, 뜻있고, 사려 깊고, 용기있고, 고뇌하던 젊은이들이 많이 대학 거부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학벌주의와 집단주의에 항거하며 작은 몸짓이라도 해온 ‘내일의 희망들’ 입니다. 사실 이들의 마음 밑바탕에 자리한 보편적 인권, 진정한 자유, 아름다운 나눔의 실천들은 지금도 우리 마음을 잔잔하게 두드립니다.
뿌리 갚은 서열문화와 사농공상 같은 차별적 전통이 주도권을 잡아온 우리네 한국사회에서는 어디에 가서 산들, 이를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비교적 호주 같이 서민적 평등주의 (Egalitarian Society)를 어느 정도는 보여주고 있는 사회에 와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도, 그 대학, S대학 출신들은 우리 사회의 지성적 엘리트가 많은 학교이니까, 더 기대하게도 되고, 좀 더 깊이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서 써본 것입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08) _ 2월 17일
“알 수 없는 홍길복과 이해되는 파우 카살스”

며칠 전 지인들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 한분은, 아들 둘에, 며느리 둘이 모두가 의사여서, 그들이 각기 매월 1000불씩, 월 4000불을 부모들에게 주고 있는데, 자신은 아들 둘이 다 변호사이고, 또 아직 미혼이어서 각기 월 500불씩 밖에는 않준다는 농담섞인 이야기였습니다.
겉으로는 그냥 듣고 별 반응을 않했습니다만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되었습니다. 역사상 헌신적인 자기희생을 해 온 여러 의료인들과 사회봉사자들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우리네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와 가정교육에 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머리는 복잡하고 마음은 씁쓸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왜 ‘아 그거 참 잘되었군요!’, ‘그 젊은이들은 참 효심이 깊네요’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왜 어른답게, 혹은 목사답게 반응하지 못하고 어딘가 개운치 않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다가 저는 제 심리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상한 열등감’이나, ‘그릇된 우월감’ 같은 무의식적 자아와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해도, 제가 잘 알고 있는 지인이 성공해서 돈 잘 벌고 잘 사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인가? 나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는 사람은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파하고 동정하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는 겉과 속이 다르게 폄하하거나, 무시하고, 깔보는 심보를 지닌 사람은 아닌가? 인간 홍길복의 숨겨진 모습이 노출되는 장면 같아서 많이 서글퍼졌습니다.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그저 평범한 한 인간으로써, 제가 제 마음을 들여다보아도, 참 한심하고, 부끄럽다 못해 자신의 악한 모습이 들어나는 듯하여 섬짓 놀라게 됩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악을 도모하거나 악행을 하는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선한 의지가 결핍된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저의 시각은, 인간의 본성을 자꾸만 부정적 측면에서 바라보며, 인간을 비이성적, 비합리적, 이기적, 탐욕적, 자기중심적 존재로만 해석하려는 저의 치우친 인간관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참 알 수 없네요.
그러다가 파우 카살스 생각이 났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 첼리스트 파우 카살스 (Pau Casals, 스페인어로는 Pablo Casals, 1876 ~ 1973)는 작은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에게서 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고 합니다. “어쩌다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우쭐거리지 말아라. 네가 지닌 재능은 본래 네 것도 아니고 너 혼자 이루어낸 것도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너에게 주어진 재능이 그 무엇이든 그걸 어디에다, 어떻게 쓸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카살스를 위대한 첼리스트로 키워내고 후원했던 데 모르피 백작은 이렇게 말해주곤 했습니다. “온전한 예술이란 인간과 이 세상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예술가도 위대한 과학자도 될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면서 그는 어린 카살스에게 첼로만이 아니라 문학과 철학, 역사와 인문학, 수학과 미술도 함께, 균형있게 가르쳤습니다. 훗날 카살스는 세계적 첼리스트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음악이나 예술적 재능이나 그 어떤 기능도 이 인간을 섬기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09) _ 2월 18일
“나이가 더해지면서 깨닫게 되는 것” (2)
우리가 지난날 살아온 삶과, 살아가고 있는 오늘과, 그리고 살아가야 할 내일이란, 거의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보람과 좌절, 그리고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있습니다. 간혹 행복하기만하거나, 아님 불행하기만한 인생처럼 보여지는 사람도 있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꼼꼼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아무리 행복하기만한 인생처럼 보여도 언젠가 불행했던 때가 있었고, 아무리 슬프게만 살아온 사람처럼 보여도, 어느 땐가는 기뻤던 순간도 있게 마련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란, 오직 한가지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크고 작은 행과 불행들이 마치 날줄과 씨줄처럼 엮어져서 만들어 집니다.
그것은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와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와 역사란 늘 성취와 실패, 전쟁과 평화, 자유와 억압, 평등과 차별, 그리고 진보와 퇴행을 반복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리하면서 흘러갈 것입니다.
공동체와 역사 이야기는 잠간 접어두고 우리 개인이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해 봅니다. 나이가 조금씩 더해지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남은 인생을 가다듬을 때가 조금씩 더해집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행복했던 순간이란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이거나, 다른 이들이 베풀어준 은덕으로 그리되었던 것임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때의 아픈 역사란, 거의가 다 내 욕심이 지나쳐서 만들어졌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뻤던 순간은 가족과 친구들이 만들어준 선물이었고, 슬픔의 순간들은 거의가 나의 잘못이 빚어낸 실수들이었습니다. 그 때의 보람은 사랑하는 이들과 좋은 이웃들이 준 축복이었고, 한 때의 좌절은 때와 자리를 분별치 못하고 설쳐댄 내 어리석음이 낳은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그 때 이루어 놓은 작은 일조차,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은 누구나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운이 좋아서 내 이름이 난 것뿐이고, 그 때 내가 넘어진 것은 순전히 내 미숙한 인간성과 생각이 짧고 미숙해서 생겨났던 것이 이제는 선명하게 보여집니다.
나이가 더해지고 나니, 이제는, 조금씩, 행복과 불행이 하나로 보여지고, 기쁨과 슬픔도 손바닥의 양면 같고, 보람과 좌절, 성공과 실패도 모두 다 그게 그것처럼, 비슷한 것임을 깨우치게 됩니다.
철이 드는 것입니다. 죽을 때가 조금씩 가까워오는 거지요. 그래서 모든 지난 일들은 그냥 감사로 받아드리며, 오늘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되뇌이게 됩니다.
이제 와서야 마침내 저는, 넘어졌던 때, 슬프고 아팠던 순간, 실패하고 부끄러웠던 그 시절 조차도,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나 봅니다.
나이가 더해지고 있는데도 아직 고마움과 되돌아봄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아직도 많이, 아주 많이 젊다는 확실한 증거일 겁니다. 그러니 서두루지 마십시요.
기다리시면 누구나 반드시 그 때가 옵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110) _ 2월 19일
“생각하기와 생각대로 살아가기”
(십자가묵상과 십자가지기)

기독교에서는 엇그제 수요일 (17일)을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이라 부르며, 그날부터 시작하여 40일 동안을 “사순절” (Lent)이라는 절기로 지킵니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그 분을 따라 고난, 사랑, 희생, 죽음의 길을 걷도록 깨우치게 하려는데 뜻이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그렇긴 하지만, 이 사순절 기간을 상징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게 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에는 자기희생과 포기, 아낌없는 이웃 사랑과 신에 대한 절대적 순종, 참되고 영원한 생명과 인류의 위대한 희망의 빛 등이 상징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 십자가는 하나의 장식물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십자가 첨탑을 높이 세우고, 십자가 성호를 긋고, 금으로 만든 십자가 목거리를 목에 걸고, 이곳 저곳에 데코레이션 십자가를 꾸며대기 시작한 이후, 기독교는 십자가를 종교적 장식품으로 만들고, 기껏해야 그 십자가를 머리로 생각만 할 뿐이지, 실제 몸으로 지고 가는 것은 져버린 종교가 되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십자가는 이미 조롱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장기적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그 때, 그 대통령은 십자가를 진다고 했고, 오늘날도 온갖 비리와 불의 속에 던져진 자들이 십자가를지고 골고다로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하기야 히틀러의 군인들도 그들의 군장 속에는 십자가를 그려넣고 전장에 나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였고, 전투에 나갈 때마다 군종목사의 기도를 받고 전쟁에 나갔으니까 더 이상, 십자가가 무슨 희생과 포기, 사랑과 고난, 죽음과 생명의 상징이랄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의 역사, 의미, 형태, 종류 등등 참 공부 많이 했습니다.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와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나 됩니다. 그리스형 십자가, 라틴형 십자가, 정교회 십자가, 카이로 십자가, 예루살렘 십자가, 교황 십자가, 기사단 십자가를 거쳐 국제 적십자와 각국의 국기 속에 들어있는 십자가들은 세어보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라는 책은 송병구목사가 collection 한 168개의 다양한 십자가 모음집입니다. 어깨나무 십자가, 디아스포라 십자가, 태양 십자가, 지구본 십자가, 무지개 십자가, 야자수 십자가, 쟁기 십자가, 하트 십자가, 팽이 십자가, 우주 십자가, 오메가 십자가, 뿌리 십자가, 바퀴 십자가, 아픔 십자가, 나침판 십자가, 치료 십자가, 수의 십자가, 지팡이 십자가, 발자국 십자가, 퍼즐 십자가, 인터넷 십자가, 스펙트럼 십자가, 프리즘 십자가, 독수리 십자가, 비둘기 십자가, 어린양 십자가, 포도나무 십자가, 물고기 십자가, 다이아몬드 십자가, 지구촌 십자가 등등, 정말 별의 별 십자가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참 많이, 자주 생각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를 선물로 주고 받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찬송가를 부르고 눈물을 흘립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격해서 울컥하기도 하고, 십자가 영화나 음악이나 미술작품이나 십자가 시나 설교를 들으면서 감격해서 울기도하고 부둥켜 안기도하고 통곡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며 몸을 뒤척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까지 입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린 십자가를 지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를 공부하고, 십자가를 묵상하고 명상하며, 감격하는 것 까지가 우리의 한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인문학과 철학에서는 인간을 늘 “생각하는 존재” – 호모 사피엔스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칸트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양심과 상식에 따르는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을 빗어냈고,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습니다.
저를 오해하는 분들 중에는 저를 생각하는 것, 사유하는 것만 강조라는 관념론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생각합니까?”
“생각의 결과, 생각한 다음엔 무얼 하자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유, 생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려는 지향점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삶입니다. 행동이요, 행위요, 실천입니다.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연구합니다.
모든 생각은 할일이 없어서, 그냥 심심하니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를 생각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생각의 결과에 따라 살아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기”와 “살아가기”는 연속성을 지닌 하나의 행위입니다.
둘 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십자가를 공부도하고 묵상도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지고 살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기껏 십자가를 책으로 공부만 해온 사람입니다. 생각 따로, 삶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 고민 따로, 실천 따로, 그렇게 살아온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선생님은 지금까지 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눈물 흘리시며 감격만 해 오신 분은 아니십니까?
남은 숙제가 보이네요. 이제 우리 함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생각하기”와 “살아가기”를 하나 되게 하는 일이 인문학의 과제니까요.
(참고서적: 십자가, 송병구 지음, KMC, 2005)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