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모임에 홍길복 목사 “포스트모던이즘 이야기” · 곽승룡 신부 “성서의 인간관” 나눠 2022년 전반기 종강실시 [강의전문포함]
방학후 다음모임은 8월 4일, 제2시드니인문학교실은 6월 8일 · 22일 모임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2022년 5월 모임을 지난 5월 5일(목) 오후 7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를 강사로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포스트모던이즘 – Postmodernism – 이야기)’를 주제로, 19일(목)에는 곽승룡 주임신부 (시드니 대교구 한인 천주교회, 실버워터 성당)를 강사로 ‘성서의 인간관 : 나는 몸이고 영이다 – 가톨릭 인간관을 중심으로’란 주제로 온라인과 함께 LKS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에서 대면모임을 병행해 가졌다.

5월 5일 강사로 선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는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포스트모던이즘 – Postmodernism –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하며 서두에 “오늘의 화두인 <포스트모던이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이란 우리 개개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지지하든 반대하든, 우리의 호불호 (好不好)나, 우리의 찬반 (贊反)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우리 앞에 맞닥뜨려진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은 이미 피해 갈 수 없는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논의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와 우리 인문학 친구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은 사실 기껏해야 모던이즘의 영역에 속했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먼 중세기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들 딸들, 사위 며느리들, 손주와 증손주들은 이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좀처럼 말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않통한다는 것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세대와는 기껏해야 가정경제나 건강을 포함하는 일상적 생활 이야기나 나눌 뿐이지 우리가 인문학교실에서 나누는 이런 심도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지는 못하고 삽니다. 우리는 젊은 세대들과 더불어 허심탄회하게 진리와 사실, 신앙과 이성, 합리와 비합리, 역사와 현실, 아프리카의 빈곤과 선진국가의 책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언제 작정하고, 마음 먹고, 날 잡아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말이 잘 통할까요?) 미국에서 한 아버지와 아들이 거리에 나갔다가 초등학교 6학년 다니는 아들이 너무 큰 소리로 떠들기에 아버지가 주의를 주면서 말했답니다. ‘애야, 공공 장소에서는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면 않돼!’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는 지금 제가 나이가 어리다고해서 개인의 지유, 그것도 특히 중요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는 것입니까?’ MZ 세대가 대들지 않아서 그렇지 포스트모던이즘은 이미 우리네 기성세대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우리 앞에서 무섭게 퍼져가고 있습니다.”라며 ‘포스트모던이즘 (Postmodernism) – 그 문자적 의미’, ‘역사의 지각생 – 포스트모던이즘을 이해하는 어려움’, ‘포스트모던이즘 – 이전과 그 이전의 이야기’, ‘포스트모던이즘에 이르기 까지’, ‘포스트모던이즘이 등장하게 된 직접적 계기 – 68운동’, ‘포스트모던이즘의 경향성’, ‘포스트모던이즘의 몇 가지 특징들’,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색이 드러나는 몇 개의 분야들’,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색이 들어나는 사례들’, ‘대표적 학자들’, ‘한국어로 된 추천도서들’ 등의 순으로 강연했다.

5월 19일(목)에는 곽승룡 주임신부 (시드니 대교구 한인 천주교회, 실버워터 성당)를 강사로 ‘성서의 인간관 : 나는 몸이고 영이다 – 가톨릭 인간관을 중심으로’란 주제로 강연하며 서두에 ‘인간은 누구인가?’ 반문하며 “인간을 신학적으로 다루는 학문, 곧 신학적 인간학은 간단히 말하자면 첫째, 인간은 누구인가? 둘째 죄는 무엇인가? 셋째 은총을 받아서 구원된다는 의화에 관한 것입니다.”라며 ‘죄는 무엇이고 은총은 무엇인가요?’, ‘하느님을 닮은 남녀 인간의 존엄성’, ‘은총을 받는 인간’, ‘몸 신학’ 등을 언급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날처럼 영과 몸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풍조 아래서는 몸은 하나의 물질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몸은 하느님의 모상이 아닌 내 생각과 의지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합니다.”라며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의 가르침이 인간을 옥죄어 자유를 구속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다음의 성경 말씀처럼, 진리는 자유를 구속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임을 강조했다.
강연후 Questions, Comments & Sharing 시간에는 각각의 주제로 토론하며 생각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특별히 전반기를 종강하며 홍길복 목사는 ‘시드니인문학교실’ 제 1기를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우리 교실에서 부족한 사람이 맡았던 서양철학사를 중심한 인문학교실은 오늘로써 제 1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2017년 이후 지난 5년 반 동안 제가 진행해온 부분은 사실 누구든지 조금만 미리 준비하시면 다 하실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실력도, 능력도 부족했던 제가 조금 앞에 나섰다고 해서 아는 척했거나 잘난 척한 것이 있었다면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늙어가며 점점 아둔해지는 사람에게 그래도 글을 읽고, 써보며,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인문학 친구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날 우리가 이런 작은 모임이나마 함께 해 올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땅 시드니에 ‘이런 식으로나마 생각을 나누며 자신을 성찰하는 이들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여기어 함께 해 주신 여러분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이번 38회로 일단 한걸음 머물러 서서 숨을 고르려고 합니다. 희망 사항입니다만 앞으로 혹시 능력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도철학과 중국철학 그리고 한국철학을 비롯한 동양의 인문학에서 만나는 날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거듭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한편 제2 시드니인문학교실은 5월 11일과 25일(수) 스트라스필드소재 Carrington Ave Uniting Church (13 Carrington Ave Strathfield)에서 모임을 가졌다. 매달 2, 4주째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모임을 갖는 제2시드니인문학교실의 6월 모임은 6월 8일과 22일 열린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2월부터 5월까지, 8월부터 11월까지 1년 8달, 매달 첫째와 셋째 목요일 저녁 7시부터 함께 자리(1년에 모두 16번 모임)합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며 초청했다. 제2 인문학교실은 둘째와 넷째 수요일 오전 10시 모인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5월 모임으로 전반기를 종강하며 다음모임은 8월 4일 (목) 오후 7시 대면과 온라인을 병행해 열린다.
– 시드니인문학교실 방학 및 8월 모임 안내
.방학: 2022년 6 ~ 7월 방학
.후반기 개강: 8월 4일 (목) 오후 7~9시
.장소: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
(대면과 온라인 병행해 모임)
.문의: 아래와 같음
주경식 (0401 017 989, drjks709@hotmail.com)
임운규 (0425 050 013, woon153@daum.net)
– 제2 시드니인문학교실 수요 주간모임 안내
.매월 2, 4주째 수요일 오전 10시 15분
.일시: 6월 8일, 22일 (수) 오전 10:15 ~ 12시
.장소: Carrington Ave Uniting Church (13 Carrington Ave Strathfield)
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19일 강의 전문]
성서의 인간관 : 나는 몸이고 영이다 (가톨릭 인간관을 중심으로)
1.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을 신학적으로 다루는 학문, 곧 신학적 인간학은 간단히 말하자면 첫째, 인간은 누구인가? 둘째 죄는 무엇인가? 셋째 은총을 받아서 구원된다는 의화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라는 것은 성경이나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며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인간의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셨지만 그 하느님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닮는다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는 몫입니다. 곧 하느님의 닮음을 유지하며 성장하고 보존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내주는 과제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학생 스스로 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선물 받았지만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사랑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닮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의 우리 기원의 단일성 안에서 물질적인 육체와 영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진 만인 공통 본성의 단일성을 이룹니다. 곧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진 인간의 인격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전체적인 인간을 원하신 것입니다. 영혼이라는 단어는 성경 안에서 종종 인간의 생명이나 인격의 인격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또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 그리고 특별히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그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의 모습의 존엄성에 참여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이 영혼에 의해 생명을 받는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인간의 육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성전이 되는 것은 인간의 전체 인격 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일체성은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심오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인간의 살아 있는 육체일 수 있는 것은 영혼의 덕분 입니다. 인간 안의 정신과 물질은 결합된 두 개의 본성이 아니라, 그 둘의 결합으로 하나의 유일한 본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영혼은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불멸한다는 것을 교회는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죽음으로 인해 육체와 분리되어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며, 종말 때 부활한 육체와 새로이 결합될 것입니다. 영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책상이 나무로 만들어지는데 책상의 형태는 나무로 채워집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형체는 영혼입니다. 이 말은 보이는 것은 육체 이지만 그 육체를 채우는 것은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본성인 인간성은 육의 살이 썩어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혼과 마음은 성경에서 동의어로 쓰입니다.
때때로 영혼은 정신과 구별되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1테살 5,23) 주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흠 없이 지켜지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구분이 영혼을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870년 제 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DS 657). 심령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그 창조 때부터 자신의 초자연적인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인간의 영혼은 은총에 의해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들어 올려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영적인 전통은 또한 성경에서 마음속 (예례 31,33)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마음에 대해서도 강조합니다. 이 마음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것을 결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갈라 5,17) 육은 영을 거스르는 욕망들을 가지며, 영께서는 육을 거스르는 욕망들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육의 행실 (갈라 5,19-21)과 성령의 열매 (갈라 5, 22-24)를 말씀합니다.
2. 죄는 무엇이고 은총은 무엇인가요?
그러면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는데,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나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죄 그리고 타락 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으로 인간을 사랑스럽게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면서 모습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 욕심, 타락이 죄가 되는데, 하지만 우리는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고 의화 곧 의롭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이 죄인데, 하느님은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은총으로 의롭게 해 주십니다. 이 은총론이 바오로 사도의 의화론 (칭의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내용이 섞여 엉망이 되고 종교가 사업이 될 수 있으며, 신앙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종교는 매우 위험합니다. 종교심은 중요 하지만 성경을 토대로 한 역사 안에서 발전된 예수님의 뜻과 이천년 동안의 체계된 교리는 교회를 교회답게 그리고 우리를 사람답게 합니다.
우리는 은총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고 들어보기도 합니다. 개신교는 은혜라고 하는 은총은 종교 용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성당, 예수님, 하느님 보다 은총을 더 많이 사용하는데 잘못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요즘 교회에서 은총이 약화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은총만을 강조하는 교회에 대한 불신 때문인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 안에서 연대를 통하여 하나의 힘을 받습니다. 연대성 을 강조하며 은총을 거부하는 이유는 교회가 은총만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개인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함을 은총이라고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는 은총을 자아도취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은총을 받은 교회 구성원 들 사이에서 체계적이지 않게 만연하는 비상식적인 모습이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참으로 교회생활이 은총답게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보다는 사회에서 은총의 모습들이 NGO 활동, 생태 환경 운동 등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봅니다. 성당에 청년들 중에 냉담하고 있지만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무조건 교회의 책임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인간의 힘을 모아서 세상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아야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부분들이 우리의 힘으로는 모이는 것이 약하니까 하느님의 은총을 구한다는 느낌이 젊은이들은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성당은 멀리해도 사회적인 봉사활동과 생태환경운동은 열심히 참여하게 되는 것인데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 교회가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은총은 연민의 정이나 위로와 혜택이라는 생각은 끊어야 하고 복을 받겠다고 성당에 오는 것보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주님의 복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카뮈는 “인간은 은총의 나라 대신에 정의의 나라를 세우는 본래적인 희망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회의 의식 있는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세상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예를 들어 1, 2차 세계 대전과 이슬람 문제 등이 단순히 세속화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영향을 지적했습니다. 은총은 절대적으로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관계하지 않으면서 은총만을 받겠다는 것은 이기심일 뿐입니다. 은총으로 사회가 더 합리적이고 이웃사랑으로 나아가야 하며,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함축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아울러서 은총과 함께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고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는 완전사회이고, 교회가 중심이며 성스럽고 세상과 구별되어 떨어진 개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은 개혁이 빨리 이루어졌는데, 교황님들의 솔선수범으로 구조상의 어려움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대를 읽어내시는 훌륭한 교황님이 계시면 회개하는 힘을 발휘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교황님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모든 세계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황님을 좋아하는 이유도 권위가 없으시고 순수하시며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고 직접 먼 곳까지 찾아가 만나시는 그 모습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교황님의 행보만으로도 우리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3. 하느님을 닮은 남녀 인간의 존엄성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남녀로 창조 되었으며, 둘이지만 한 몸으로서, 인간은 본래 낙원에 살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몸 신학’ 이야기 출발점입니다. 사람은 낙원에 살도록 초대받았는데,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이 죄라고 고백합니다. 곧 낙원에 초대받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욕심으로 드러났는데 그것이 타락입니다. 죄의 실체는 인간의 속성 안에 원죄의 속성이 있고, 외적으로 짓는 죄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좋은 것만 아니라 나쁜 생각들로 선하게 만든 존재인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며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이고, 세상은 도덕적 이성을 갖춘 지식인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했으며,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며 인간은 본래 악하므로 국가 사회는 행위 규범인 예로 절제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마, 귀신, 마귀를 만든 적이 없으시고, 본래 하나의 하느님, 인간, 천사를 창조하셨는데, 하느님을 제외한 인간의 죄와 천사가 마귀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회복만 하면 되고 우리를 회복하게 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시고 그것을 ‘의화’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죽음의 그늘 아래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오직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 인간은 창조 되었고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으며, 이처럼 인생의 시작과 마침은 내 뜻이 아니지만 과정은 내 뜻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큰 차원은 부르심으로 온 것이고 자녀들의 신앙도 본인의 자유라고 외면하지 마시고,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격’이라는 말은 없지만 이는 예수님께서는 ‘목숨’ (psyche)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인간은 인격이라는 품위를 지니며, 이는 자신을 인식하고 자제할 수 있으며,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주고, 다른 인격과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창조주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로 부르시는 은총을 받았으며, 신앙과 사랑의 응답을 드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받은 당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상대방에게 강요가 아닌 ‘초대’라는 표현을 하며 must, should를 지양하고 신앙 안에서 자연스럽게 초대하며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784년 조선의 유학자들인 남인신서파의 권철신, 이벽 등은 유교의 가치가 경직되고 희망이 없으며 파벌이 생기자 그들은 스스로 서학을 찾아내고, 읽으면서 천주교의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뤄진 하나의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진 인간의 인격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고 하느님은 전체적인 인간 곧 전인격을 원하십니다. 영혼은 성경에서 인간의 생명이나 인간의 인격 전체를 의미하고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이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바로 영적 근원을 가리키며, 육체는 하느님 모습의 존엄성에 참여합니다. 인간의 몸은 영(Spirit)의 옷을 입은 육체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면 얼굴에 드러나고 몸을 꼬집으면 아프다고 느끼는 육체를 지니고 있는데 그런 육체 외에 마음, 생각, 감각, 미움도 다 영혼의 식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평등과 차이로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 창조 되었습니다. 인격에서 완전히 동등하지만 존재의 특성에서 창조주의 지혜와 선을 반영하는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기를 하느님은 원하셨습니다. 본디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이고, 두 존재의 결합입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창세 2.18) 그들은 ‘반쪽’이나 ‘불완전’이 아닌 서로 인격적 일치 안에서 각자 상대를 위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평등하지만 차이가 있는데, 그러나 차별이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런 차별을 하는 것은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녀의 평등은 획일이 아니며, 남자와 여자로서의 차이가 있는 것이고, 차이가 차별일 때는 평등하지 않은 것이므로, 차이가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평등입니다. 존재의 특성상 남편은 책임감을 가지고 아내의 말을 들어주려 하는데, 보통 아내들이 “당신은 어쩌면 설거지를 한 번도 안 도와줘?”하는 말에 남편들은 “엊그제 했거든!” 하면서 횟수로 정확하게 말합니다. 사실 아내들은 남편에게 함께 집안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인데, 남편의 논리적인 대답으로 부부싸움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리고 운전을 할 때도 남편은 도통 아내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길을 고집하다가 엉뚱한 길에 들어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면서 잠시차를 세워 아내는 길을 물어보고, 남편은 운전을 하면 될 일인데, 서로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집을 피우고 계속 운전하다가 즐거운 여행길에 차 안에서 다투며 도착장소까지 가는 경우도 생깁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는 서로의 다른 점이 좋아서 만났는데 결혼 후에는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화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녀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이고, 서로를 지배하거나 종속하면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이 성경 이전 시대부터 시작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입니다. 친절한 도우미처럼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고, 그런 관계가 되지 않으면 서로를 지배하고 압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혼인을 통해서 그들이 “한 몸” (창세 2.24)을 이루게 하심으로써 인간 생명을 전달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녀는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땅을 다스릴(창세 1.28)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명이란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정복의 권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지혜 11.24) 창조주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는 다른 피조물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토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이 맡겨주신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남녀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은 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영혼, 정신,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둘이서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하느님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래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자연세상을 위한 다스림을 인간 중심으로 살면서 부터 우리가 사는 지구는 아프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 맡기신 세상을 위한 다스림은 세상을 책임지는 목자처럼 다른 피조물들인 동물과 자연을 돌보아야 합니다. 낙원의 인간은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놓여있는 인간이고 원초적인 거룩함의 은총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간의 조화는 첫 부부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조화가 원초적인 의로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롭다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책임지는 것인데, 이처럼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여 있는 동안은 죽음도 고통도 없습니다.
4. 은총을 받는 인간
이제 은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왜 다루지 않나 하시겠지만, 우리는 흔히 “사는 게 죄다”라고 말하지요. 우리는 항상 은총과 은혜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지내며 또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기위해 영혼을 이야기도 합니다. 중세 때와 지금의 정신 의학에서도 일치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육신은 썩지만 영혼은 썩지 않는다고 말하며,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신앙고백이며 이론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식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육체 외의 인간 전부를 말하고 있는 데, 대화에서 “저 사람은 영혼 없이 말을 하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영혼은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으며, 생각을 하는 것이므로 이 모든 정신세계의 움직임이 영혼의 덕분입니다.
영혼은 영어로 Soul이고 라틴어로 아니마 (Anima)라고 하며, 성모님도 기도하실 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영혼은 내 몸 전체이고, 영혼은 인간의 모든 것입니다. 나의 의지를 온전히 채워야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의지 없이 몸만 따라가는 것은 영혼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문을 읽으면서 기도할 때는 집중하고 조심하면서 기도를 하지만, 그 후에 기도문을 외우고 익숙해지면 생각과 기도가 따로 분리되면서 주위에 일어나는 상황까지 참견하면서 기도를 하게 되는 습관화가 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지가 온전히 채워져야 인식 행위가 인격화 되는 것이고, 인간의 체계는 고도로 정밀하게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이는 이론적인 설명이 아니고 동물학자의 연구와 비교실험에서도 나타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며, 그래서 동물은 기본적인 감정만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인간의 독특하고 유일한 모든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신앙생활도 자신의 영혼을 잘 알아차리고 돌보기 위함이므로, 타인의 영혼에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의 영혼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종교심이 많은 신자들은 평소에도 ‘은총을 받는다.’ 라고 쉽게 듣고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은총의 직접적인 체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 안에서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릇된 종교에서 사용하는 은총의 체험들을 조심하시고 상식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대상이나 실재성과 얽혀서 나타나는 모습은 하느님의 체험이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다가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하는 체험은 어떤 소리는 들었지만 그것이 하느님 체험이라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심리적인 상태에서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 등으로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기 때문에 의사에게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것을 방치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00년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오해받는 일이 많이 벌어졌고,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은 종말론으로 많은 오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정확한 사실을 신자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의 방식을 하느님의 방식으로 착각하는 오류가 생기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을 오직 그분께서 직접 계시하는 그 방식을 따라야만 체험이 가능하고, 하느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방식으로는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뜻대로 주재하지 않으시고, 은총 중에 은총인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유는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은총이며 이것은 방임이 아니고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은총은 이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은총은 하느님의 안배, 하느님의 역사하심,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계획은 세우셨지만, 그 계획으로 인간을 옥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획은 우리를 살리려고 하시는 것이기에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당신 계획도 변경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를 꼼작 못하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세우신 계획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론과 운명론은 가톨릭 사상이 아닙니다.
5. 몸 신학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결혼과 이혼을 화두로 삼는 ‘몸 신학’을 풀어나가십니다. 2 천 년 전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이지만, 현대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회가 복잡해지고 여권이 신장되면서 질문 자체가 보다 복잡해지고 세분화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 사회는 혼인과 성(性)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시대착오적이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보는 시선이 많아졌습니다. 교황님은 이런 시선을 ‘편협한 시각’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 님이 말씀하신 ‘한 처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 세 교황은 ‘한 처음’을 신학, 형이상학, 인간학의 관점에서 분석하십니다. 왜 ‘몸신학’인가? 종교개혁 이후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논조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불변의 명제로 주장할 때부터 근대 이성주의가 시작되어 모든 것은 객관적인 존재보다는 주관적인 경험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사람들이 우리 ‘몸’이 하느님을 닮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객관적인 존재)라는 가톨릭의 정통 가르침보다는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로 보기 시작하면 서부터 인간에게 위기가 닥치기 시작했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함께 사람들이 몸과 영을 분리해서 생각하면서, 몸과 영혼을 일치가 아닌 대립으로 보는 이원론이 득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영’을 중시하는 천사주의는 몸이나 성을 죄악에 빠지게 하는 온상으로 생각하여 단죄하려는 잘못을 범하게 하였고, ‘육’을 중시하는 애니멀리즘은 몸을 지나치게 숭배하거나 성(性)에 과도하게 열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혼돈과 위기를 맞이해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몸’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의미와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추기경 시절부터 시작해서 정리하였는데, 교황이 된 이후에는 ‘수요 일반 알현’ 시간을 (1979년 9월 5일 ~ 1984년 11월 29일) 이용해서 일반신자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교육하였습니다. 우선,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생각하신 원초적 인간은 다음에 나오는 창세기의 성경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원초적인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닮고 그분의 숨으로 생명이 된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몸’ 그 자체로 ‘성사 이전의 성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징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 성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물질 그 자체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생명체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다름을 보여 주어 하나의 인격체임을 깨닫게 만들기도 했지만, 하와가 없을 때의 인간은 ‘원고독 (原孤獨)’ 속에 있던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와를 창조했을 때의 아담의 부르짖음은 처음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의 출현(性의 상이성)과 함께 이 둘이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말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 (자기 증여 <自己 贈與>를 통한 일치)은 하나의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한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행위로써, 이는 사랑의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결국 자녀라는 제3자가 탄생하는데, 이는 마치 성부-성자로 이어지는 상이성, 성부-성자의 사랑의 자기 증여 (일치 또는 한 몸), 이를 통해 성령으로 이어지는 삼위일체적 혼인의 신비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초적인 인간을 원순수 (原純粹)라고 하는데, 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성경 말씀에서 가져온 용어입니다. 인간의 몸은 하느님에 대한 연구 (신학)와 인간에 대한 연구 (인간학)를 이어주는 연결점이고,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신 순간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이 세상에 머물렀을 뿐만이 아니라, 이제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어 우리와 일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성경 말씀은, 육화하신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느님을 떠나 우리한테 오셨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자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떠났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을 선물로 주셨으며 (자기증여), 당신 자신이 머리 (신랑)가 되어 교회 (아내)와 결합하심으로써 ‘한 몸’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묵상하게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가 하느님의 ‘혼인적 신비’ 안에서 살 때에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처럼 영과 몸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풍조 아래서는 몸은 하나의 물질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몸은 하느님의 모상이 아닌 내 생각과 의지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교황님은 예수님의 이 성경 말씀을 혼인적 신비에 대한 결정적인 말씀이라고 얘기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의 가르침이 인간을 옥죄어 자유를 구속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다음의 성경 말씀처럼, 진리는 자유를 구속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 한인성당 주임 신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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