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6-2)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탈북자 – 이웃을 환대하기
줄임글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오늘의 세계는 살벌하다. 이는 지구화가 본질적으로 전 지구를 하나의 ‘마을’이기보다는 하나의 ‘시장’으로 재편함으로써 무한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기업의 수요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하여 이른바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을 모토로 한 지구시장에서는 낯선 이방인이 결코 ‘이웃’으로 환대받지 못한다. 단지 시장에서 나와 더불어 겨루는 또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기에, 낯선 이방인의 출현은 언제나 갈등과 불안을 동반한다.
이 글은 우리 사회의 여러 이방인 중에서도 탈북자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에게 ‘이웃–되기’를 실천하기 위한 윤리적 자원을 모색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관찰은 모든 탈북자가 다 배제와 차별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탈북자 중에서도 북한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남한체제에 과잉 찬동하는 경우에는 얼마든지 ‘환대’를 받는데, 이러한 ‘조건부 환대’가 참으로 윤리적인가 하는 물음이 이 글의 주요 관심사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기독교윤리에서 ‘이웃 사랑’의 모범으로 종종 제시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철학적 윤리에 비추어 숙고한다. 이는 세속화 시대에도 기독교윤리가 여전히 인문학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음, 혹은 할 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사마리아인의 선함은 단순히 이웃의 범위를 확대했다는 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타자의 ‘타자성’을 훼손하거나 침범하지 않은 채로 도움을 베푼 점에 있음을 밝혀낸다. 결국 환대란 ‘무조건’일 때에만 아가페의 가능성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이 글의 제목은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수상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감독의 오래 전 영화에서 따왔다. 1987년에 만들어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감독은 이란 어린이의 순수한 동심을 그린다. 공포의 숙제 검사 시간, 네마자데가 공책에 숙제를 해오지 않아 호랑이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자, 짝꿍 아마드의 마음도 덩달아 아프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려던 아마드는 책가방을 열다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얼떨결에 네마자데의 공책까지 집어와 버린 것이다. 순간, 한번만 더 숙제를 안 해 오면 퇴학시키겠다는 선생님의 으름장이 떠올라, 아마드는 짝꿍의 공책을 집어 들고 쏜살같이 뛰어 나간다.
네마자데가 산다는 포시테 마을을 향해 물어물어 가지만, 네마자데를 아는 사람이 없다. 할 수 없이 자기 마을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을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네마자데에 대한 염려로 가득하다. 그때 우연히 만난 한 사내가 네마자데의 아버지란다. 아마드는 그를 뒤좇아 가면 틀림없이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종종걸음으로 달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네마자데의 아버지가 들어간 집에 친구가 없다! 아뿔싸, 그 마을에는 네마자데라는 이름이 개똥이만큼 흔했던 것이다. 벌써 날은 어두워지고, 아마드의 얼굴에도 어둠이 내린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터벅터벅 집에 돌아온 아마드는 결국 밤을 새워 친구의 숙제를 대신해 준다.
친구란 그런 것이다. 친구는 타자성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친구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친구가 울면 나도 운다. 하지만 통상 이해하기로 이웃은 그 정도까지 요구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저 곁을 내주기만 해도 된다.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그가 내 곁에 머무는 것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굳이 우정을 나누지 않더라도 관용의 미덕만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기어코 곁을 내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정 범주의 사람들이 나와 이웃해 살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내 삶의 반경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막는다. 그 범주에는 장애인 시설도 들어가고, 핵폐기물 처리장도 들어가고, 이슬람 할랄 단지도 들어가고, 하다못해 층간소음을 일으키는 개구쟁이 아이들도 들어간다. 사람살이라는 게 도저히 저 홀로 살 수 없고 더불어 살기 마련인데도, 아무나 이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며 이런저런 이유로 텃새를 부리고 몽니를 부린다. 지난 6월 영국이 ‘브렉시트’(Brexit)를 단행한 것도, 그리고 11월 미국 대선에서 ‘고립주의’를 표방한 트럼프(Donald Trump)가 당선된 것도 그런 마음이 지어낸 정치적 산물일 테다.
바야흐로 지구화 시대에 이런 현상은 낯설다. 모순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지구화란 말 그대로 지구 전체를 한 마을처럼 여기자는 뜻 아닌가. 그래서 일을 하거나 혼인을 하기 위해, 한 마디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드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지구화의 본뜻이 아니었나.
아닌가 보다. 지구화를 획책하고 촉진한 주체가 ‘기업’이라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는 듯싶다. 국내 수요에 만족하지 못한 기업의 탐욕이 더 넓은 시장을 요구하게 되면서 지구화가 시작되었다는 것, 이렇게 열린 새로운 시장 환경에서는 옛 시장이 지니고 있던 ‘정의’(justice)라든지 ‘자혜’(beneficence) 따위의 보편도덕이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지구화란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을 모토로 한 지구시장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겠다.
신자유주의에 편승하여 급물살을 탄 지구시장화이기에, 애초 지구화 시대가 열리면 유토피아(utopia)라도 도래할 듯이 목소리를 높이던 선동꾼들의 예측과는 달리, 지구 전체가 디스토피아(dystopia)를 향해 치닫는 느낌이다. 국경이 무색해지면서 나와 다른 인종의, 민족의, 종교의, 이념의 사람들이 내 삶터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자, 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인류 역사는 “칸막이를 허무는” 방향으로 움직여왔고, 또 움직여가고 있다지만,(박정신, 2013) 칸막이가 허물어지는 데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꼭 있다는 것 또한 역사의 사실이다. 이들의 두려움은 단순히 내 삶터에 성큼 발을 들여놓은 그 낯선 이들의 ‘다름’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낯선 이방인이 나와 더불어 누가 더 쓸모 있는지를 놓고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또 하나의 ‘상품’이기에 더욱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아니 적대감마저 드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야기되고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은 지구 전체를 하나의 ‘마을’은 커녕 ‘시장’으로 성형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원인이 있다 하겠다.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가 지상목표인 자본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면서, 혹은 타국에서 유입된 값싼 노동력에게 일감을 몰아주면서 자국의 원주민–노동자들을 소외시킨 것이 ‘브렉시트’와 ‘트럼피즘’(Trumpism)을 낳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조롱하듯, 만국의 자본가끼리 대동단결하는 사이에 만국의 노동자와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대결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아울러 이 대결은 비단 경제 혹은 계급의 맥락에서만 야기되지 않으며 인종ㆍ민족ㆍ종교ㆍ이념의 ‘다름’을 빌미로 총체적인 갈등 양상을 띤다는 것이 지구시장의 민낯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날 ‘이웃–되기’는 훨씬 더 어려운 숙제다. 이웃이 나와 비슷하기는커녕 달라도 너무 다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웃–되기’의 윤리학은 결국 나라고 하는 동일자가 낯선 타자로서의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모아진다. 이 글에서는 그 타자의 하나로 탈북자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부유하는 그들에게 ‘이웃–되기’를 실천하려면 어떤 윤리적 자원이 필요한지를 성서를 통해 규명해보고자 한다. 성서야말로 인문학적 지혜의 보고로서 오고 올 세대의 사람들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는 ‘오래된 미래’로 손색이 없다면, 성서로부터 윤리적 자원을 모색하는 일은 다문화ㆍ다종교 상황에서도 여전히 의미 있을 것이다.
2. ‘먼저 온 미래’로서 탈북자의 현주소
지난 11월 11일로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수가 3만 명을 넘어섰다. 국내 입국 탈북자는 1962년 6월 최초 귀순자를 시작으로 냉전 시대에 주춤하다가 2006년 2월에 1만 명, 2010년 11월에 2만 명을 돌파했다. 초기에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북한을 떠나 남한행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통일부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 수료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1년 이전까지만 해도 66.7퍼센트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북한을 탈출했다고 답했던 것이 2010-2013년에는 40.1퍼센트로 낮아졌다가 급기야 2014-2016년에는 12.1퍼센트로 급격히 줄었다. 경제적 어려움 말고도 ‘자유에 대한 동경’,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 ‘가족 상봉’ 등의 동기가 더욱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특이한 점은 과거에는 탈북자의 성별이 주로 남성이었으나, 2002년을 기점으로 여성이 남성을 추월하기 시작하여, 급기야 2016년 10월 말 기준 71퍼센트에 육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 작업은 또 하나의 정교한 논의과정을 필요로 하므로, 여기서는 다만 그렇게 이 땅에 온 수많은 여성 탈북자들이 어떠한 삶을 꾸리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한다.
이들의 연령대가 주로 20-30대에 포진해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도구로 혼인비율만한 것도 없을 테다. 2014년 기준 기혼 탈북여성의 혼인상대를 보면, 45.2퍼센트가 북한 출신, 28.3퍼센트가 중국 출신, 25.6퍼센트가 남한 출신으로 나타나 있다.
사람들이 내 남편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게 됐어요.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탈북한 여자랑 결혼을 했겠느냐는 거죠. 제가 차라리 베트남이나 필리핀 출신이었으면 남편이 이런 소리를 덜 들었을까요.
2004년 탈북해 2009년 한국 남성과 혼인한 한 여성의 말에서 그녀들의 사회적 좌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혼인 ‘시장’에서 탈북여성은 동남아여성보다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탈북자에 대한 ‘타자화’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자 동시에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서 이웃으로 받아들여지기는 동남아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타자화란 타자에게 나(동일자)의 상상에서 비롯된 열등한 속성들을 주입시켜 그를 고정된 객체로 물화(物化)시키는 전략에 다름 아니기에 그 자체가 폭력이다.(사이드, 2000) 그럼에도 이러한 인식론적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동남아노동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 예컨대 무조건 ‘돈 벌러 온 기계’로만 보는 획일화된 시선이 그 보기다. 탈북자들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하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자유를 찾아왔건만, 따뜻하게 환대하기는커녕 그들의 탈북을 ‘위장망명’이나 심하게는 ‘위장간첩’ 쯤으로 호도한다. 탈북자들을 향해 ‘돈 벌기 위해 가족까지 버린 파렴치한’ 내지 ‘국민의 세금을 갉아먹는 도둑’이라고 매도하는 시선도 많다.
아오지 탄광마을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갔다가 다시 한국에 온 최 금희의 수기를 보면, 그러한 우리 사회의 타자화된 시선이 여과 없이 폭로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탈북한 사람들이 인천공항으로 들어온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자리에서 밥을 먹던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탈북자들은 왜 온대? 여기도 굶는 사람이 많은데. 그리고 쟤네들 우리 세금 받잖아?”
왠지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몇 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최금희, 2007: 213)
물론 환대받는 탈북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통일시대를 준비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건 종편채널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는 탈북자들은 연예인 뺨치는 외모로 인기를 끌기도 한다. 그러나 박수는 그들이 북한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남한체제에 과잉 찬동할 때뿐이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관용’하는 범위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자신의 고유성을 포기한 채 이곳의 질서에 순순히 항복하는 경우로 제한된다. 강 희진의 『유령』은 그렇게 우리 사회의 입맛에 맞추어 소비되던 탈북청년 ‘하림’이 더 이상 탈북자를 ‘연기’하지 않기로 선언하는 대목을 용케 포착해낸다.
오늘 아침에 방송국에서 또 전화가 왔다. 이젠 연기할 생각이 없으니 연락을 말아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갈 곳은 방송국이 아니라 리니지 세계다. 이번에 그 속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강희진, 2011: 325)
하림은 현실세계 대신에 가상세계를 선택한다. 그곳에서는 적어도 ‘게임 폐인’끼리의 연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록 환상일망정, 그나마 그런 연대라도 있어야 현실의 적대를 견딜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류 보선의 관찰은 지극히 정확하다.
한국 사회는 이들을 타자성을 지닌 타자로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타락한 질서에 이미 순종하는 신체가 되었을 때에만, 다시 말해 그들의 모든 타자성을 양기하고 이곳의 존재들과 그야말로 동질화되었을 때만 수용한다.(류보선, 2015: 229)
이러한 조건부 수용이 진정한 환대일 리 없다. 아니 데리다(Jacques Derrida)에 따르면, 이웃–되기의 최소한의 윤리적 마지노선처럼 보이는 관용조차 조건부 환대에 지나지 않는다.(데리다, 2004: 89; 보라도리, 2004: 234 참고) 부푼 기대를 안고 이곳에 온 많은 탈북자들이 ‘조선족’으로 자기를 위장하거나 아니면 다시 ‘탈남’을 선택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한국사회의 자살률이 부동의 1위인 것은 꽤 오랜 현상이다. 그 중에서도 탈북자 자살률이 한국인의 자살률보다 세 배나 높게 나타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리 사회가 탈북자, 그 중에서도 탈북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의 양상을 밀도 높게 추적한 문학작품으로 『찔레꽃』만한 것이 드물다.(정도상, 2008)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을 찾아 국경을 두 번 넘어 이곳에 온 ‘충심’이라는 탈북여성이다. 중국이나 그 밖의 제3국을 택하는 탈북자들과 달리 한국행을 택하는 탈북자들은, 지금은 비록 분단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이 되었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한 민족’으로 묶여 있었던 공동의 기억 혹은 역사에 터해 따뜻한 환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이곳에 온 경우가 많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하다시피 그처럼 순진한 기대는 얼마 못 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이 맞닥뜨린 한국 사회란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잔인하게 신자유주의 시장질서가 횡포를 부리는 ‘헬조선’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자혜의 보편도덕이 거세된 이곳에서,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팔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이 시장지옥에서 충심은 마침내 자신의 육체를, 성을 팔기에 이른다.
마음에도 없는 행위를 몸으로 겪어내는 동안 모멸감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오만한 세상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수모를 견디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나는 모텔의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를 보며 마음을 몸 밖으로 온전히 내보냈다. 야광으로 만들어진 별자리는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였다. 휴대폰 속에서 울먹이던 엄마의 목소리가 별자리 속에서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윗글, 203)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은 북한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것처럼 남한에서도 여전히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자기만 생각했다면 자살로 끝낼 수도 있으련만, 충심은 북에 두고 온 어머니 생각에 이런 선택, 곧 자살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선택한다. 어머니를 다시 만날 때까지, 어머니를 이곳에 모셔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돈을 벌 때까지, 충심은 ‘마음을 몸 밖으로 온전히 내보’내는 일을 수없이 반복할 테다. 사람이 상품으로 치환된 도착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길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탈북자라는 타자, 우리 안에 조건부로 끼어 있는 그 “이방인–이웃”(류보선, 2015)이 결코 환대받지 못하는 ‘사물’에 지나지 않는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이렇게 된 데는 남한 사회의 주류 정서가, 이 사회에 몸담고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서로를 환대하는 인간다운 삶과 거리가 먼, 다만 서로를 이용가치ㆍ교환가치로만 보는 사물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탈북자의 문제는 곧 우리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느냐, 아니 추구하느냐가 탈북자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우리 각자가 누구의,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고유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신의 타자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되고 환대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장받을 때, 비로소 자기의 고유한 삶을 활기차게 꾸려나가는 법이다. 인간다운 삶은 그러한 기반에서 꽃핀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웃–되기의 윤리는 단순히 곁을 내주는 관용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휴머니즘이 종교와 대화해야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3. 사마리아인의 이웃–되기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종교다. 기독교 윤리학자 폴 램지(Paul Ramsey)는 사랑을 “기독교 윤리학의 태고 사상”이며 “근본 개념”이라고 말한 바 있다.(Ramsey, 1950: 39)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역시 “구약의 전체 메시지가 신의 거룩성에 귀의한다면, 신약의 모든 내용은 신의 사랑에 귀의한다.”(Brunner, 1950: chap. 14-15; 김철영, 1995: 132-133에서 다시 따옴)고 하면서,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윤리적 행위의 규범이라고 못을 박았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아가페’(agape)로 특징 지워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신약성서 저자들이 예수에게 체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때 고대 헬라인들에게 익숙한 ‘사랑’ 단어들, 곧 ‘에로스’(eros, 이성 간의 사랑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 간의 사랑)나 ‘필리아’(philia, 친구 간의 우정), 또는 ‘스토르게’(storge, 가족 간의 애정)보다도,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던 ‘아가페’(agape,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에 주목했다는 점이다.(루이스, 2000)
사실상 신약성서에는 에로스와 스트로게는 온 데 간 데 없고, 필리아와 아가페만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필리아는 당시 헬라 문학에서 사랑을 표현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용어이지만, 신약성서에서는 기이하게도 명사로서의 ‘필리아’(philia, 벗)가 쓰인 곳이 오직 한 군데뿐이다. 그밖에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형제 사랑)처럼 연결된 복합어로 쓰이거나, 아니면 동사 ‘필레오’(phileo)가 약 24회 정도 나타나서 좀 더 눈에 띄는 정도다. 하지만 ‘필레오’조차 요한복음 외에는 특별히 선호된 곳이 없다는 발견에 이르면, 역시 필리아는 신약성서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여러 종류의 ‘사랑’ 단어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이 취급되던 아가페가 글자 그대로 기독교에 ‘입양’됨으로써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접을 받게 된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이 아닌가? 마이클 하퍼(Michael Harper)의 비유처럼 “그것은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 같다.”(하퍼, 1989: 69) 만약 신약성서 기자들이 시대적 유행에 민감했다면, 그리고 그 추세에 편승하려 했다면, 에로스만한 단어가 없었을 것이다. 에로스는 플라톤 철학에서 이미 단순한 성적 사랑을 넘어 진리에 대한 사랑, 곧 종교적 사랑으로 승화된 터였기 때문이다.(플라톤, 2011: 210d-e) 그랬더라, 기독교는 헬라인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고, 개종자도 더 빨리,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대중의 시야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아가페를 취하여 ‘그리스도 사건’을 표현하는 위대한 단어로 승격시켰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아가페에 담아 전달하고자 했던 사랑의 내용은 무엇일까. 왈도 비치(Waldo Beach)와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이렇게 말한다.
초대 교인에게 있어서 아가페란 이웃의 행복에 대한 열정적이고 사심 없는 무조건적인 관심을 의미했고 희생적인 보살핌과 후원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이해되었듯이, 사랑은 좋아한다는 정서적인 감정이나 낭만적인 매력도 아니고 사랑의 보답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지적인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으로서, 그리고 선택받은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방으로서의 이웃에 대한 헌신에로 자신의 의지를 향하게 하는 내적인 것이 사랑이다.(비치ㆍ니버, 1993: 52)
그러하기에 신약성서 누가복음 10장 30-35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각별하다. 단적으로 말해 이 이야기는 이웃의 범주에 대한 유대 율법학자의 물음에 예수가 응답 형식으로 내놓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almost) 죽게 된 채로’ 내버려졌다. 옷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분과 정체를 짐작할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이윽고 제사장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는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두 번째로 나타난 레위인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이들의 행동은 과연 정당한가? 그 여부는, 우선 그 벌거벗은 사람이 확실한 이웃의 범주에 포함되는가에 달렸고, 그 다음으로는 ‘거의’ 죽게 되었다는 애매한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렸다.(스캇, 2006) 이웃인지 아닌지 정체가 불분명할 때는 이웃으로 대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유대인의 보편적인 윤리의식이므로,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은 일단 정당화되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거의’ 죽은 상태를 ‘이미’(already) 죽은 상태로 간주한다면, 이들 종교 엘리트들의 행동은 지극히 합법적이 된다. 레위기 율법에 의하면 주검을 만지는 행위는 부정을 타는 일이어서 금기시 되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거의 죽은 상태를 죽음이 임박한 상태로 간주한다면, 그들은 그를 도왔어야 옳다.
주목할 부분은 예수가 이런 정황을 시시콜콜 논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기는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기에, 때로는 동기보다도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이쯤에서 등장한 세 번째 인물, 그는 필경 구원자 역할을 할 것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므로, 의례히 일반 유대인쯤 되겠거니 지레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청중의 이러한 기대를 외면한 채, 능청스럽게도 사마리아인을 내세운다. 유대인의 눈에 단순 외국인만도 못한, 600년 이상의 증오와 반목이 앙금처럼 쌓여 ‘개ㆍ돼지’만도 못하게 취급해 온 사마리아인이 구원자라니!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자마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이웃의 범주를 넘어 타자성에 대한 깊은 윤리적 숙고로 우리를 초대한다. 유대인에게 이웃–되기의 윤리는 철저히 동일성에 근거했다면, 사마리아인의 경우에는 타자의 타자성을 훼손하거나 침범하지 않은 채로 기꺼이 이웃–되기를 실천했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이 대목에서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통찰이 유익하다고 본다. 그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경험이 있는 레비나스의 지혜에는 우리가 경청해야 할 무언가가 충분히 들어 있다.
그는 우선 칸트(Immanuel Kant) 이후 신이 더 이상 인간의 이성에 의해 그 존재가 확증될 수 없는 순수이념에 머물게 된 상황을 애석해한다. 어쩌면 인류의 비극은 거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근대 이후 철학과 신학 사이에 높이 쳐진 칸막이를 해체하고자 하는 그는, 칸트가 제안한 바, 인간의 도덕적 실천에 대한 궁극적 보상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신을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신은 ‘타인’의 고통스러운 얼굴 속에서 타인의 생명과 복지, 안녕을 위해 ‘나’(동일자)의 무한한 책임을 요청하는 무한자로 나타난다. 이때의 타인은 ‘가난한 자ㆍ나그네ㆍ과부ㆍ고아’의 얼굴, 곧 아무런 보호막 없이 죽음에 노출된 헐벗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무한자 이념은 칸트의 선험적 이념처럼 이성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깥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이념”으로서 “나의 주도권과 무관하게 나에게 일종의 계시로 주어진다.”(강영안, 2005: 256)
그리하여 그의 윤리는 “봄”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된다.(Levinas, 1961: ⅻ, ⅹⅶ, 51; 강영안, 2005: 227) 사람은 모름지기 타인의 얼굴을 보고, 거기에 담겨있는 신의 흔적을 찾아, 그 신이 나에게 내린 긴박한 윤리적 명령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곧 내가 타인의 얼굴을 보고 나의 책임을 떠올리는 그 때가 타인이 이웃이 되는 순간이다.(김동훈, 2013: 272 참고) 레비나스에게 신은 오로지 타인의 얼굴에 나타난 흔적으로서만 자기를 계시한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타인에게 ‘인질’이 되어 이웃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실천에 헌신할 때뿐이다.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적 윤리는 신학적 윤리와 조우한다. ‘죽이지 말라, 살리라.’는 신의 윤리적 명령은 오직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만 나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타인은 동일성에 터한, 그리하여 자기 복제에 다름 아닌 친구나 연인이 물론 아니다. 오히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하듯이 나와 ‘얼굴을 마주하는’ ‘너’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3자로 나타나는 이웃이다. 이렇게 레비나스의 이웃은 ‘얼굴을 마주하는’ 대화적 관계에서 야기될 수 있는 인식론적 폭력을 철저히 배제하고, 나와 다르다는 사실, 그 엄연한 타자성을 끝까지 보유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의 옆에 제3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이웃의 범위가 온 인류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레비나스, 2010: 281 참고) 이렇게 확장된 이웃사랑이야말로 ‘욕망이 결여된 사랑’으로서, 진정한 사랑, 곧 아가페의 가능성을 담보한다.
4. 나가는 말
우리에게 해체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데리다(Jacques Derrida) 역시 이방인에 대한 ‘무조건’ 환대를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과 다른 동물 종의 차이는 “동물은 단지 자기와 같은 종류에 대해서만”(데리다, 2004: 49) 환대를 베푸는 반면, 인간은 동류를 초월하여 폭넓은 환대를 실천할 수 있다는 데 기인한다. 이 때의 환대는 거듭 강조하거니와, ‘무조건’이어야 한다. 타인이 우리의 규칙을, 우리 삶의 문화적 문법을 준수할 때에만, 오직 그런 한에서만 우리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준다는 식의 관용, 곧 조건부 환대는 타인의 필요보다도 주인(혹은 주체 혹은 토박이 원주민)의 필요에 복무하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주인이 자기 삶의 영역을 찾아온 타인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 따위의 필요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지만, 이웃–되기의 윤리가 그저 관용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관용은, 그것을 베푸는 시혜자 입장에서는 권력 행사요, 수혜자 입장에서는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데리다의 이웃–되기의 윤리는 주인의 입장에서 타인을 ‘초대’하는 형식의 환대가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주인을 ‘방문’하는 형식의 환대에 방점을 찍는다. 방문의 주도권은 철저히 타인에게 있다. 주인으로서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자기를 찾아오는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수동적인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러한 ‘방문의 환대’는 “나를 타자로부터 보호해주는 면역을 제거”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는 위협이 될 수 있다.”(보라도리, 2004: 234) 그럼에도 데리다가 방문의 환대를 옹호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익숙한 것ㆍ유사한 것ㆍ동일한 것만 환대한다면, 이러한 환대는 주인의 동일성을 고착시킬 뿐, 어떠한 변화도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구미정, 2012: 84)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거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치 이방인ㆍ타인이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환대하라는 데리다의 말은 그 울림이 자못 크다. 주인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주–객의 접속을 통해 실제로 “인질이 되는 것은 주인, 초대하는 자, 초대하는 주인”(데리다, 2004: 135)이라는 데리다의 지적은 레비나스의 목소리와 겹친다. 레비나스는 주인이 “타인의 얼굴에 볼모로 잡혀 있다.”(레비나스, 1981: 158)는 유명한 명제로써 타인에 대한 주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에게서 얼굴은 사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물은 “바라보지도 않고 호소하지도 않고 스스로 표현하지도” 않지만,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한다.”(레비나스, 1996: 135)
우리 가운데 탈북자들의 ‘얼굴’이 있다. 우리와 ‘다른’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자란 탓에 우리가 몸담고 사는 체제, 곧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사물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방인으로, 곧 우리의 동일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바디우, 2001: 55) 그런 사건을 일으킬 잠재력이 다분한 타인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들의 얼굴은 우리에게 단순히 참아줄 것, 견뎌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요구라면 비굴한 순응에 다름 아니다. 자유를 찾아, 더 나은 삶을 찾아 이곳에 온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우리 안에 ‘강도 만난 자’로 탈북자가 있다. 그 얼굴을 피하여 지나가면 우리는 소중한 기회를 잃을 것이다. 낯선 타인의 얼굴에서 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의 방문을 무조건 환대함으로써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 곧 우리 사회가 정의와 자혜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그러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려면, 적어도 ‘먼저 온 미래’인 그들이 지금 여기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보듬어야 한다. 그들은 다른 곳을 마다하고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이웃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온 갸륵한 친구이기에.
구미정 교수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 계명대·대구대·연세대·CBS TV 성서학당에서 강의 / 문화학술계간지 <이제 여기 그너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