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대한민국의 아동 문학가 이원수 (李元壽, 1912 ~ 1981)의 ‘고향의 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자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애국가보다 많이 불린다는 노래 <고향의 봄>은 이원수가 14세 때 지은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다.
마산에서 소년회 활동을 하던 이원수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방정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잡지 <어린이>지에 원고를 보냈고, 그 다음해인 1926년 <어린이>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향의 봄>의 배경이 된 곳은 경남 창원이다. 이원수는 <월간소년> 1980년 10월호에 ‘자전회고록-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곳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고 술회했다.

- 작사가 이원수 (1911 ~ 1981)
이원수 (1911 ~ 1981) 호는 동원 (冬原), 동시작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로 활약했다.
이원수는 191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마산상고를 졸업하였다.
12세부터 <어린이>와 <신소년>같은 잡지를 즐겨 읽었으며, 1925년 방정환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아동문학에 뜻을 두었다.
1926년 ‘고향의 봄’이 <어린이>지 4월호에 실리면서 이후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글이 실리게 된다. 1949년 사랑과 자유의 나라를 그린 장편 동화 <숲 속 나라>를 발표하였고 이후 치열한 작가 의식으로 역사의 현장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작품으로 형상화하기에 이른다. 6·25 때문에 일어난 처참한 불행을 다루는가 하면 민주와 자유와 정의를 이루고자 한 4·19 정신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1960년부터는 6·25나 시대정신보다는 부모애, 형제애, 우정, 자기희생 등의 사랑을 주제로 한 동화를 주로 썼다. 자신이 겪은 일상의 일부터 가족, 이웃, 사회, 민족에 이르기까지 세상일을 냉철한 현실관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에는 늘 사랑이 있었다. 우리나라 아동문학에서 불모지였던 장편 동화와 소년 소설의 장르를 개척하고 아동문학 이론을 확립함으로써 아동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대표 작품으로는 장편동화 <숲 속 나라>, <잔디숲 속의 이쁜이>, 소년소설 <오월의 노래>, <민들레의 노래>, <메아리 소년>, <해와 같이 별과 같이>, 단편동화 <꼬마옥이>, <불새의 춤>, <호수 속의 오두막집> 등이 있다.
동화와 소년소설 모두 200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으로는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너를 부른다>가 있다.

○ 동요 ‘고향의 봄’
‘고향의 봄’은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동요이다.
1927~1929년경 일제강점기 때에 만들어졌다.
가사는 이원수의 초기 동요작품으로 월간 아동문학지 <어린이>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홍난파가 작곡하여 그의 작곡집 <조선동요100곡집>에 수록하였다.
4분의 4박자로 된 내림나장조의 곡이며, 보통빠르기로 부른다. 두도막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감이 넘쳐 흐르는 노래로 현재, 합창곡으로도 편곡되어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노래는 일제 식민지 시절 경술국치 이전의 조선을 그리워하며 조국을 떠나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잘 표현했다. 식민지 치하에서도 한민족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지식인의 심정이 잘 표현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원래 1925년에 이원수가 자기 고향을 그리며 쓴 것을 나중에 소파 방정환이 1907년에 창간한 잡지 어린이 35호 1926년 발행판에 시 문학 문예 공모전에서 당선되어 실린 것을 보고 산토끼를 작사·작곡 한 이일래가 맨 처음 작곡하였지만, 마산 지역에서만 불리다가 홍난파가 발견하고 다시 작곡을 하여 대중들이 즐겨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999년에 이를 기리기 위한 고향의 봄 창작동요제가 개최되고 있다.
이원수와 홍난파는 둘다 친일파로 분류된다. – 여기서 말하는 소위 ‘친일파’라는 것은 일정 (일제)시대에, 일제의 영향으로 조선에서 국가나 민족에 반역 (叛逆)하는 행위를 하거나 (일본의 편에 서던, 서지 않던 간에) 일제 (일본)에 잇권이나 이로움을 주거나 돕는 행위를 하는 자들을 통칭하여 일컫는다. 그러한 ‘친일’ 행위들을 하는 주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위보장및 금전적 이득을 포함한 여러 이득을 취할수 있기 때문이다.

- 작곡가 홍난파 (1898 ∼ 1941)
홍난파 (1898 ∼ 1941) 홍난파의 본명은 영후 (永厚)로 1898년 4월 경기도 수원군 (현 남양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났으나 7세 때 서울로 이사했다.
1912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1913년부터 3년 동안 음악학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다님으로써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1세가 되던 1918년에 일본 ‘도쿄음악학교’ (흔히 ‘우에노’로 줄여 말하는 학교)로 유학하였지만 그 다음해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지하고 귀국하여 음악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쳐나간다.
1926년에는 사립인 도쿄 고등 음악학원에 편입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고, 1931년 7월에는 미국 시카고 셔우드 (Sherwood)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성악우회 주간 (1919),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악회 (硏樂會) 창설 (1922) 및 운영,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1931), 이화여전 음악강사 (1933), 난파 트리오 조직 (1933) 및 활동,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경성방송 관현악단 조직 및 지휘 (1936), 경성 음악전문학교 교수 (1938) 등을 역임하면서 조선 악단 전면에 우뚝 솟았다.
대표작으로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등 민족적 정서가 담긴 노래와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가 있다.
작품집으로는 <조선 동요 100곡집>, <바이올린 독주곡> 등이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가, 음악 평론가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역할을 하여, 한국 양악사 (韓國洋樂史)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