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예술가 (조각가) 양지 ( 梁志 또는 良志, ?~?)
양지 (梁志 또는 良志, ? ~ ?)는 신라 선덕여왕 시대 불교 진흥 사업에 활약했던 승려이자 건축가, 불교 예술가로, 본관은 제주이다. 분황사, 서장사, 사천왕사,영묘사, 법림사를 창건했으며, 시서화에 능했으며, 불상과 불화 제작의 장인이었다.
불상 조각과 글씨에 뛰어난 예술가로 영묘사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및 경내 전각과 탑의 기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중, 법림사의 주불 삼존상과 좌우 금강신상 등을 만들었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고 한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것은 문무왕 때의 일이므로 선덕여왕 사후 문무왕 시절까지 신라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천왕사지 소조 조각과 시기와 양식이 매우 비슷한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와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또한 그의 작품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 출신지에 대해

양지의 조각이라고 알려진 작품들은 전부 당시 신라 양식하고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이전의 도상보다 상당히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는 양지의 출신지가 서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양지의 작품들은 서역양식 보다는 양지가 활동하던 시기의 당나라 불교조각과 더 양식적으로 유사하여 양지가 단순히 당 유학을 다녀온 신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꽃피는 불교 문화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 서라벌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 오면서 풍요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으며,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주민들이 방아찧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불렀다고 한다.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슬프구나.
서럽구나, 우리들은!
공덕 닦으러 오라.”
삼국유사에 따르면 양지는 불상 제작 작업을 하면서 선정 (禪定)에 들었을 때처럼 잡념없는 상태로 작업에 몰두하면서, 시주가 필요할 때는 자신의 석장 (지팡이) 끝에 포대를 걸어 두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서 시주하는 집으로 가서 소리를 내고 그 집에서 쌀이나 돈을 포대에 담아두면 석장이 다시 알아서 양지에게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때문에 양지가 살았던 곳을 석장사 (錫杖寺)라고 불렀다고. 석장사는 조선 시대까지도 존재하였다고 한다.
– 삼국유사의 ‘양지’에 대한 언급
‘삼국유사’는 양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길 데 없었다. 또 필찰을 잘하여 영묘사의 장륙삼존(丈六三尊)과 천왕상과 기와와 천왕사탑(天王寺塔) 및 팔부신장(八部神將)과 법립사의 주불삼존과 좌우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의 편액을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불상 3천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두고 예했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 입정(入定)하여 삼매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았는데 온 성안의 남자와 여자들이 진흙을 다투어 운반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그는 모든 기예에 능통하였고 명필가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조각가로서 가장 저명하였다.
그가 가장 즐겨하던 기법은 흙으로 빚어 만드는 소조(塑造)였다. 그가 만든 불상들은 어느 것이나 소상(塑像)들이었던 점은 그의 작품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단독 작품으로 그의 것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작품은 그가 살았던 석장사에서 출토된 불상전(佛像塼)과 팔부신장이다. 이들은 삼천불(三千佛)이 조각된 전탑(塼塔)의 일부임에 틀림없는 것 같고 그 양식도 바로 통일을 전후한 시대의 것이다. 또 하나는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출토된 신장(神將)들인데, 이것은 천왕사탑 밑의 팔부신장을 그가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서 그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이다. 사천왕사의 신장상들은 흔히 사천왕상(四天王像)으로 알고 있지만 ‘삼국유사’에 적힌 대로 팔부신장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현재로서는 그의 작품으로 확실한 것은 이들밖에 알 수 없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그의 작품기법과 양식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정묘하고 치밀한 수법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있으며, 특히 근육표면 같은 것은 완벽할 정도로 묘사하여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신기(神技)를 흠모한 장안의 선남선녀들이 다투어 흙을 나르려고 했던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과연 그는 고대의 예술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의 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가 한국 문화사에 끼친 업적은 절대무비한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