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5)
기독교 선교적 관점에서 본 G2국가로서 중국에 관한 연구
세계 지도자 역할에 관하여
목 차
I. 서론
II. 중국의 역사적 배경 연구
III. G2국가로서 중국
1. G2국가를 성취한 중국민족
2. G2국가로서의 중국의 현실
3. 중국의 G2로서 역할과 한계성
IV. G2국가 중국민족의 세계관
V. 100년간 G1 국가의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청교도 정신
VI. 중국의 G2 역할과 수행 능력
VII. G2국가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
VIII. G2 중국의 기독교 선교와 역사적 교훈
IX. 결론
III. G2국가로서 중국
1. G2국가를 성취한 중국민족
1949년 중국의 국민당 장개석 정부는 전쟁과 내전으로 폐허에 가까운 중국 국토와 가난하고 와해된 경제와 5억의 국민을 버리고 외화와 금화, 은화, 그리고 값진 역사적 중국의 국보급 문화제를 모두 가지고 중국 대륙에서 대만섬으로 도피했다. 1948년 중국의 민심은 장개석 국민당에서 돌아섰다는 점이다. 국민당 군대가 패배한 원인인 무기나 탄약이 부족해서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모택동 군대가 공격할 필요도 없이 부패한 군대는 스스로 무너진 전투가 중국의 국공 내전이다. 이미 민심은 모택동 공산당의 손안에서 조종되고 있었다. 그리고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군부는 고위직에서 말단 공무원들까지 부정부패는 만연되어 있고, 정부의 기강도 해이해져서 무능한 정부였다. 중앙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지시사항이나 명령은 하달되지도 않았다. 국민당은 국가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는데도 개선할 힘이 없으며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지도력마저 상실하여 장개석 국민당은 스스로 국민과 국가를 포기하고 중국 대륙을 떠나야 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인 국민당이 남기고 간 국가는 온통 산업이 붕괴된 경제는 참혹한 상태였다. 공업 분야는 아직 수공업 단계로서 체계적이지 않았고 생산품도 생산되지 않아 부족한 실정이었다. 물가는 폭등하고 물가는 안정되지 않아 생활고는 심각한 실정이었다. 몇 개월 만에 물가억제와 재정과 경제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모택동 공산당이 집권하자 서구의 사람들은 중국의 사회주의 통치능력을 의심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국민당이 버리고 간 잔재를 수습하고 공산주의 레닌 사상의 노동계급으로 성과를 거두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더구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진 경제 속에서 모택동 사상을 추종했던 30년의 기간 동안 지친 중국의 국민들은 2,000만명 이상의 중국 국민들이 아사자로 굶주리며 죽어 갔던 파탄의 경제와 실패한 농업경제의 경험과 교훈을 현실로 체험한 중국 국민들이다. 지루했던 공산주의 정치운동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5억의 중국 인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76년 4월 4일 제1차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에서 군중들의 플랜카드에는 모택동 주석을 비판하는 내용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군중들은 군인들에 의하여 진압되었고 천안문 사건의 책임을 물어 모택동 주석은 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 등소평을 숙청하여 모든 관직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1976년 9월 9일 모택동 주석이 사망하자, 등소평은 1977년 다시 복권되어 당 부주석, 총 참모장, 부총리, 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다시 실권자가 되었다.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중국의 역사적 시장경제 자본주의 개혁 개방정책이 채택되었다. 첫째는 농촌 인민자본주의적 농업개혁으로 중국공산당 인민공사가 관리하고 소유했던 모든 농지를 인민들에게 책임생산제로 각 개인에게 나눠 주어 개인 단위로 농사를 하게 하여 생산성을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둘째는 칼 마르크스 레닌주의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평등의 원칙을 수정하여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서 능력 위주의 경제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였다. 중국은 사회주의 노선의 경제원리로서는 5억의 인민을 먹어 살리기에 실패하였기에 시작한 개혁개방이 오늘의 G2를 있게 한 계기가 되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추구한 등소평이 있었다. 그는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근공검학(勤工儉學) 유학 계획에 의하여 1919년 16세 때 프랑스로 유학을 하였다. 그는 파리의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3년 동안 일하면서 유학 공부를 하였다. 그는 나중에 회고하면서 프랑스의 유학시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배웠다고 그는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독점이론이 아니라 공산주의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등소평은 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중국 공산당의 실권자로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주장하기를, 모택동이 건국한 중국공산주의 사상의 30년은 가난한 국가가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들과 굶주리는 중국 인민들에게 더 이상 돌려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며 오직 살길은 자본주의 경제의 개혁개방의 선택이라고 공산당 지도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등소평 자신은 언제나 중국공산당 핵심에서 숙청되기도 여러 번 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중국대륙의 개혁개방을 성취시켰다. 등소평은 개혁개방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월 29일 중국정부의 최고위 정치지도자가 국빈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은 중국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 후 중국은 서방 세계로부터 자본주의 투자자본과 노동집약적 생산공장을 유치하여, 지금 중국경제는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생산성과 기술이 성장하여 생산 대국의 지위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아시아의 지역을 연결하는 시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하여 G2국가를 성취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2001년에는 WTO(World Trade Organization)의 회원 가입을 완수하였다.
중국 경제가 어떻게 개혁개방 시장경제를 시작한지 30년 만에 중국의 경제를 G2라는 경제수준으로 세계 최고의 경제국가로 회복시킬 수 있었을까? 세계는 지난 30여 년간 중국의 눈부신 경제적 성장과 그 성과를 경이롭게 지켜보았다. 중국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더 이상 사회주의 폐쇄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국가로 보고 있다. 중국이 한국식 경제발전의 성장모델이 아시아의 개발도상 국가들에게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중국식 경제성장 모델이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이 G2을 성취할 수 있게 한 것은 1978년 칼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사회주의 경제원리를 포기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사회주의식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와 병행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성공하여 G2국가를 성취하였다.
2. G2 국가로서 중국의 현실
중국이 세계경제1위의 국가가 될 수도 있다고 예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예측에 불과하다. 우선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이미 미국을 앞서고 있다.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2011년 3월 말로 3조 달러를 넘어선 3조447억 달러라고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2011년 4월 14일 발표했다. 15년 전인 1996년에는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어섰지만 2009년 6월에 2조 달러를 넘어서고 2년도 안된 2011년 3월에 3조 447억 달러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중국사회 과학원은 2020년에는 중국의 GDP가 미국의 GDP를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하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1978년에는 GDP는 1.8%에 불과했으나, 2001년에 11.5%로 늘어났고 2007년에는 23.7%였으며, 2010년에는 약 40% 수준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앞으로 연평균 7-8%의 경제성장을 할 경우 2020년이면 중국 GDP가 미국GDP의 80% 수준이 될 것이며 드디어 추월의 전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1978년 등소평 주석 주도의 개혁개방이 시행되기 전 1976년 9월 9일 모택동 주석이 사망하기 전까지 중국경제는 세계적으로 최대 빈민국가로서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던 참담한 과거가 있다. 2,000만명 이상(다른 도서에는 3,800만여 명의 아사자로 기록됨) 국가가 가난하여 식량을 구입하지 못하고, 국가의 지도자들이 무능하여 국토에서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먹지 못해 백성들에게 죽음을 주어야 했던 국가가 중국이라는 나라였다. 그리고 등소평 주석 자신도 모택동 공산당 국가 주석에게 숙청되어 공장의 기계공의 노동자로 몇년 동안 숨을 죽이며 때를 기다렸던 그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모택동 주석 사망후 복권되어 73세의 나이에 1981년 중화인민 공화국 주석으로 추대되어 개혁개방이라는 혁명적 과업으로 미개발 도상국가라는 제3세계의 경제로 고통받던 중국 국민들에게 G2라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금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등소평 주석이다. 자유는 공짜로 가질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없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의 정부를 말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광복 70년의 세월 동안 수 없는 민주화 투쟁과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민주주의를 배워 왔지만, 아직도 미숙한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 필자가 살아가는 이곳 호주의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 풍토에서 비교하여 본다면 아직도 한국의 정치윤리는 참다운 민주주의 성숙해야 한다. 중국정부의 행정부(국무원)는 공산당 일당 체제가 관리하고 있다.
공산당 주석이 국가와 행정부를 통치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에는 군인들의 명칭을 중국인민 해방군이라 명칭하고 있다. 국방부의 독립된 군인의 제도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내에서 통솔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통솔권은 당 주석의 권한에 있다. 그리고 중국의 정치는 중국 공산당의 이념으로 당의 주석이 관장한다. 그러나 경제체제는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하여 공산당이 통제하고 관리한다. 정치와 경제가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다. 권한이 집중된 곳에는 권력과 함께 부정과 부패가 기생하여 함께 자라간다. 중국의 국가공무원의 부정과 부패는 국가를 좀먹는 기생충으로 곳곳에 둥지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G2국가라는 경제적 성장과 함께 필수적 여건으로 자라왔다. 공산주의 주체적 사상은 이념적 무장이다. 공산주의의 최종적 목적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서 유토피아 지상 낙원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 지상 낙원은 어디에도 건설된 곳이 아직 없다. 그리고 지구상에서는 영원히 건설될 수도 없는 허구이다. 1867년 칼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그는 공산주의 자본론 1권을 출판하면서 생산, 교환, 분배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이 과정들의 현 상태를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하여 가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50년이 지난 현재까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인류에게 평화와 안정은 성취한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역사가 교훈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G2국가인 중국은 중국인민 공화국의 건국이념과 중국 공산당의 통치이념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 주석의 공산주의 사상이념으로 1949년 천안문 광장에서 선포하며 시작한 중국대륙 국가이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에서 숙청되고 실각하여 기계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숨을 죽이며 살아남았던 등소평 주석은 모택동 주석의 사망과 함께 복권되었던 등소평 주석은 1978년 중국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끝없는 계급투쟁으로 국가와 인민이 가난하여 굶주림보다는 경제발전이 우선이라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새로운 시장경제 자본주의 개혁개방정책 사상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처절하게 가난했던 중국 인민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건설한 최첨단 생산공장에서 저렴한 급료를 받으며 30년을 세계인들이 사용하는 모든 생활필수품들을 저렴하게 공급하며 서구사회 자본주의 자본가들의 욕심들을 채워주면서 열심히 노력하였던 결과가 오늘의 G2국가로 경제가 성장한 중국이다. 3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13억이라는 중국인민들과 국가지도자들의 노력으로 경제대국의 중국을 건설하여 놓았다. 그러나 비록 중국의 국가가 G2라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섭리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역사 속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경륜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고 있기에 중국이 G2의 나라로 등극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강호생 선교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박사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