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6)
기독교 선교적 관점에서 본 G2국가로서 중국에 관한 연구
세계 지도자 역할에 관하여
목 차
I. 서론
II. 중국의 역사적 배경 연구
III. G2국가로서 중국
1. G2국가를 성취한 중국민족
2. G2국가로서의 중국의 현실
3. 중국의 G2로서 역할과 한계성
IV. G2국가 중국민족의 세계관
V. 100년간 G1 국가의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청교도 정신
VI. 중국의 G2 역할과 수행 능력
VII. G2국가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
VIII. G2 중국의 기독교 선교와 역사적 교훈
IX. 결론
III. G2국가로서 중국
3. 중국의 G2로서 역할과 한계성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1978년에는 GDP 1.8%였는데, 2001년에는 11.5%, 2007년은 23%, 그리고 2010년에는 40%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이 앞으로 2020이면 중국의 GDP가 미국 GDP의 80% 수준에 도달하여, 중국이 미국의 GDP를 추월할 수 있다는 전망을 신흥경제 체제의 블루페이퍼(blue paper)라는 경제전문가 발표 했다. 중국경제에 대한 권위자로 손꼽히는 미국의 경제학자 배리 노턴(Barry Naughton)에 따르면, 중국은 청 왕조시대였던 1820년에 인구 3억8,100만명으로 당시 세계인구의 36%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GDP도 전세계의 3분의 1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능한 청 왕조는 서구의 발전하는 산업혁명과 기계문명과 과학발전에 동참하지 못하고 국력을 상실하여 국가와 국민을 지키지 못하여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후진국이라는 서러움과 수많은 고통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왜 중국의 청 나라는 서구에서 발전하는 문화를 배우지 않았을까? 그리고 산업의 발달된 문화를 혁명이라는 언어로 표현하여 산업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알 수 없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한계적인 인지능력보다도 인간이 철을 사용하여 만든 기계들이 방직공장의 방직기계나, 철을 사용하여 엔진을 개발하여 그 엔진의 힘으로 기관차를 만들고, 철을 사용하여 열차의 선로를 땅에 깔아서 선로를 이용하여 무거운 화물과 인간의 교통수단으로 빠른 속도로 장거리 여행을 갈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다에서는 오직 바람과 인간의 힘으로 노을 저어서 항해를 해야 했지만 엔진의 힘으로 철로 건조한 선박들을 더 멀리 더 빠르게 운행하기 시작한 것들이 기계문명의 발달과정을 우리는 산업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격적인 산업화와 이에 따른 도시문화의 발달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에는 모든 인구들이 농촌에 집중하여 농경문화에 의존하여 살아야 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서도 대부분의 인구가 시골에서 살았다. 그러나 인간이 철을 녹여 농기구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나무의 사용하기 보다는 석탄을 사용하여 많은 양의 철을 녹여서 모형을 만들어 기계들을 조립하여 방직기계들을 생산하고, 엔진들을 만들어 자동차, 기관차, 만들고 선박들을 건조하여 많은 생산품들을 더 멀리 운반하기 시작한 시대를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에서 초기 철도가 출현한 것은 1804년이며, 본격적으로 증기 기관차가 등장하여, 운송업무를 담당한 것은 1820년대였다. 그리고 1825년 10월에 스톡튼 달링튼 철도회사(The 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 소속 기관차가 처음으로 승객과 화물을 적재하고 철도 위를 32km 달렸다. 1830년에는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 개량한 증기기관차(로켓)이라는 이름의 기관을 개발하여 리버풀과 맨채스터 사이를 왕복함으로 영국 전역에 철도건설작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41년에는 약 2.400km의 철도가 전국적으로 건설되고 1860년대에는 13,000km가 건설되어, 19세기가 끝날 때에는 전국적으로 27,000km로 확장하였다. 철도를 이용한 저렴한 수송수단은 영국의 산업발전과 경제적으로 막대한 공헌을 하기 시작했다. 산업의 발달과정에서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수송, 통신정보와 교육, 과학산업과 공업적 기계산업의 발달로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 역할에 기초가 되었다.
19세기 유럽의 대륙에서 기계문명을 개발하여 모든 산업분야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 국가적 국력과 군사력의 현대화로 군사력이 성장할 때, 아시아대륙에서 종주국 행세를 하는 중국대륙은 무엇 때문에 잠만 자고 있어야 했을까? 선조들의 나태함은 다음 세대를 살아갈 후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남길 수 있을까? 현명하지 못했던 선조들을 사라지고 없을지라도 후손들에게 눈물의 서러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곳이다. 지나간 역사는 영원히 다시 올 수 없기에 아무리 생각하며 원망을 하여본들 아무도 대답하여 줄 영혼은 없다.
1792년 9월 영국의 조지 3세의 명으로 산업발전에서 생산된 생산품들을 중국에 수출하는 기회를 가지기 위하여 런던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무장군인 62명과 호위 선박 두 척을 거느리고 중국에 도착한 그들은 청 황제 건륭제(乾隆帝)가 영국의 산업과 기술발달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망원경과 시계, 기압계, 스프링 서스펜션이 장착된 마차, 공기총 등을 선물로 가져왔다. 조지 매카트니(George McCartney)가 대표로 700명에 달하는 대표단에는 외교관, 상인, 군인, 과학자, 화가, 정원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카트니는 노련한 외교관으로 민간교류나 국가간 외교교류의 물꼬를 트기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당시 영국정부는 중국의 시장개방을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노력은 언제나 거절되었고, 중국은 산업발전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영국 무역대표단의 선박들은 중국 남부해안의 포르투갈 점유지인 마카오에서 건륭제가 보낸 대리인과의 협상이 넉 달을 기다린 끝에 베이징에 도착할 수 있었다.
1793년 9월 영국을 출발한지 일년 만에 건륭제와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매카트는 영국이 베이징에 외교대표부를 설치하고 영국의 상인이 광저우에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줄 것을 건의했다. 또 새로운 항구를 개방하고 공정한 관세를 부과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매카트니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쇄국정책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것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련한 영국 외교관의 설득에도 전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건륭제는 매카트니에게 직접 해답을 주지않고 중국은 외국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중국 나라이기에 외국과 무역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내용의 칙서를 조지 3세에게 전해 주었다. 칙서의 문장은 이러하다.
“우리는 너희가 보낸 신 발명품에 대하여 가치를 느끼지 못하며 너희가 만든 제품이 필요하지도 않다. 따라서 베이징에 너희 사절을 두는 것은 천조(天朝)가 정한 규정과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너희의 이익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산업발전에 많은 성공을하여 경제발전을 하게 된 영국으로서는 여든한살이나 되는 노년의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외교사절단에 대하여 거절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매카트니의 의견 보고서에는 “미래의 중국에 대하여 철저하게 비관적이며, 중국이 해안지역부터 흔들릴 운명이라고 보았고, 또한 중국의 황제가 영국의 통상 요구를 거절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는 인간의 지성이 발전하는 것을 황제의 권력으로 저지하려는 시도는 헛된 일이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매카트니의 의견으로는 이미 유럽 대륙에서 산업혁명뿐만, 아니라 영국의 명예혁명, 유럽의 문예혁명 등으로 구시대가 끝나고 새시대가 열리고 있는 르네상스시대의 유럽문명과 아직도 몇 천년의 역사에 안주하려는 구시대의 문화를 답습하려는 건륭제의 어리석음을 보고하였다.” 매카트니는 이미 유럽의 신세대 문명과 아시아의 구세대 문명의 시간적 간격의 차이와 생각적 사고의 이질감을 체감하였다.
그는 황제 알현을 하기 전 6주 전부터 중국측은 황제에 대한 예를 표하는 예절로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을 머리를 땅바닥에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는 삼배구고구(三拜九叩頭)를 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모자를 벗고 황제에게 다가가 무릎을 굻은 다음 황제의 손에다 입맞춤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나중에는 그러면 중국의 고위 관리가 조지 3세의 초상화 앞에서 삼배구고두를 먼저 행하지 않으면, 자신도 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은 1,500여년에 이어져 온 관습으로 외국 사신이 조공을 황제에게 바치는 전통을 지키고자 했지만 매카트니는 영국과 중국의 외교적으로 서로 동등한 위치를 요구했기에 황제 알현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로서 두 시대와 두 문명은 아무런 합의점을 인격적 지성으로 찾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힘에 의한 경쟁의 방법만을 예상한 채 철수 했다. 그러나 이미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으로 판매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829년 중국정부는 아편판매를 금지했고, 영국은 아편전쟁이라는 무력적 충돌에서 승리하여 매카트니가 원했던 그 이상으로 5개 항구를 개항하고 홍콩의 할양과 배상금으로 지불함으로 중국민족에게 굴욕의 세기가 시작하게 된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 굴욕의 세기가 왜 찾아왔는지 고찰해 보기 전에 왜 청나라는 국가적인 저력과 발전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는지 원인을 알아야 한다. 북방민족 여진민족(만주족)이 세운 청(淸) 나라(1616-1912)가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중국 지배계층의 한족들이 만주족의 문화와 풍습을 수용하는 정책을 거부하면서 수많은 국가의 인재와 엘리트들을 학살과 탄압 정책으로 인하여 청 나라 초기에는 만주족의 지도층의 관리들이 한족이라는 이유로 많은 한족의 인재들을 학살함으로 인하여 중국의 인구가 급감하면서 국가적 인재의 공백과 함께 국가의 발전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중국 대륙이 소수 만주족에게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적인 평가에서 정의한다면 만주족도 함께 중국대륙과 함께 통일되었던 역사적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청 나라의 강희제(재위 1661-1722)와 건륭제(재위 1736-1796)시대에는 몽골과 티베트, 이리계곡, 신장지역을 합병하고, 아무르 분지(헤이루 강변)을 융합하여 광대한 중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대륙의 중국을 통일하여 역사적으로 가장 넓고 광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서 중국도 세계의 일부로서 세계와 함께 더불어 발전하는 21세기 중국의 리더로서 시진핑 정부는 G2국가라는 소임을 충실히 이행할 때 세계의 리더로서 인정받을 것이다. 인류 역사속에 수많은 영웅들 이 힘과 무력으로 세계를 장악하려 힘을 저축하여도 힘의 원리는 전쟁이라는 힘의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 힘의 근원은 경제라는 돈의 능력에서 상대를 지배할 수 있다. 21세기의 지배자는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화폐전쟁이라는 보이지 않은 화폐 전쟁에서 달러를 조금이라도 보유하기 위하여 화폐전쟁을 치르고 있다. 달러 보유액이 바닥이 나면 국가는 보도가 난다. 승리하기 위하여 세계는 두뇌를 찾고 있다. 국가는 전술 군인 장군보다는 경제 전문가을 국가는 필요를 하는 시대이다. 2차 대전 이전까지는 국방장관의 서열이 먼저이었으나, 지금은 경제장관의 임무와 책임이 국민의 생활에서 직접적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의 국민 역시 서구의 유럽에서 일어나는 왕정의 속박된 제도에 도전하는 시대적 요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왕정이 무너져 내려야 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에서 중화민국을 건설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중국 대륙을 수 천년간 통치한 전제 군주 제도가 사라지고 넓은 중국 대륙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한 민주공화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천년 중국 역사에서 한 번도 민주주의 자유를 누려볼 수 있는 시대를 중국 민족은 가져보지 못했다. 진정한 민주주의 공화국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누려보지 중국 국민들에게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수 천년을 언제나 부족함이 없는 농업국 백성의 수많은 국민들은 황제가 바뀌어도 묵묵히 중국의 대륙을 지켜온 국민들이었다. 그러나 청 나라 말기의 무능했던 국가의 지도자들은 나라와 국민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고 한 세기동안 산업형명과 앞선 기술문명에게 억압당해야 했던 중국의 상처였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 공산혁명은 부패했던 관료주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떠나버리고 중국공산당 인민공화국을 건립했으나 가난했던 인민 공화국은 농업경제의 인민공사 제도에 성공하지 못하고 중국 인민들은 굶주림과 아사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1978년 칼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공산주의 자본론을 수정하여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론의 원리인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 자본론을 중국 공산당의 기본 경제노선으로 채택하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제안되었고, 그 이후 시작된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중국 역사에서는 중국 공산당 사회주의 체제의 경제개혁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2008년 12월 19일 후진타오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개혁개방 30주년(1978년 12월 18일-22일 개최된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 법안 채택함) 기념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은 1978년 12월 시작한 개혁개방 정책을 혁명의 반열로 규정하고 있다. “1911년 신해혁명” “1949년 공산주의 혁명”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중국의 3대 혁명으로 규정한다. 후진타오 총서기는 이날 개혁개방 30주년 연설 중에서 “신해혁명”은 수 천년간 통치한 전제 군주제도를 타도했고,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관료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확립했으며, 개혁개방이라는 새롭고 위대한 “개혁개방 혁명”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길로 이끌어 중화민족 부흥발전의 앞날을 개척했다고 규정했다. 중국공산당은 성공한 개혁개방 경제정책을 하나의 혁명으로 추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진타오 총서기는 이날 대회에서 앞으로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2021년까지는 더욱 높은 수준의 국가를 건설하고, 중국인민 공화국 100주년 2049년에는 모두가 조화롭게 잘사는 부강한 사회의 일류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연설했다. 중국정부의 지도부는 개혁개방 정책을 하나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개혁정신으로 국가정책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 정책은 1949년 이후 중국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황폐해진 농촌 경제체제를 살려야 했다. 새로운 농업정책들을 공표하여 가감한 농업정책개혁으로 인민공사와 협동농장 경영의 농지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농경지들을 가족단위로 분양하면서 농촌의 경제는 자립으로 해결되어 농업 능률이 상승되어 갔다. 그리고 도시의 공업지역에서는 자유진영국가들의 서방세계로부터 투자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1980년부터 광둥성, 선쩐, 푸젠성의 아모이 및 하이난성 등 5곳을 경제특구로 지정하여 산업시설들을 건설하고 1984년부터 상하이, 다롄, 진화도, 텐진, 칭다오, 연운황, 난통, 닝보, 언저우, 푸저우, 광저우, 전장, 베이하이 등 연안도시에서는 경제기술 개발산업 등을 유치하여 외국인의 자본을 투자했다. 1985년 이후에는 장강 삼각주, 주강 삼각주, 산동반도, 라오동 반도, 허베이성, 광시 좡족 자치구 등을 경제개발 지구로 설정하여 개발했다.
1990년 개혁 개방 이후에는 상하이의 푸둥 신지구 개발과 장강의 연안도시 개방에 한층 더 진행했다. 1992년 이후에는 49곳의 국가급 경제기술 개발지구와 53개소의 하이테크 기술산업 개발구로 설정하여 중국전체 국토가 전 방위개발과 다차원 종류의 개발로 중국의 전 국토가 세계의 생산품을 가공 생산하는 세계의 공장들이 중국에 집결하는 현상으로 발전했다.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하던 중국의 국민 총생산은 세계의 1%에 불과했고 대외 총 수출입량은 206억4천만 달러로 세계무역 총액의 8%에 못 미쳤다, 같은 해(1978년) 중국 1인당 GDP 127달러, 미국 1인당 GDP 9,865달러로 76배였다. 서독은 81배, 일본은 66배, 당시 중국은 세계 190여 국가중에서 콩고 민주공화국과 비슷한 경제수준의 전형적인 빈곤한 국가였다. 그러나 1978-2008년 30년 간 중국의 GDP는 연평균 성장률이 9.8%로 2009년에는 1인당 중국의 GDP가 3천여 달러로 성장했다. 중국의 총인구 중에서 2억여 명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고, 중국은 세계의 1위의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2010년 말, 중국은 경제 규모면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경제 규모에서 2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계는 중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Time지는 중국의 성장을 “새 왕조의 시작”으로 빗대고 있다. 세계의 언론들도 지난 30년간 중국 공산당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세계 경제사에서 유례없는 기적을 이루었는지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소련은 무너져가는 사회주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개방개혁정책을 시행하고 공산당 일당체제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이 개방개혁은 소련의 스탈린의 강력한 통치에서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민족운동과 유혈충돌들이 수면위로 올라와 정치적 불안한 정국으로 변하여 갔다. 1991년 8월 보수파 정치인들과 소련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고르바초프의 정권은 1991년 12월 25일 소련연방은 폐지되고 15개국들이 독립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강대국 구소련이 왜 국가경제가 어려워졌는지는 공식적 통계는 없지만, 미·소 냉전 체제에서 핵개발과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들 수 있다. 마지막 미·소, 군축회담을 하긴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진 이후였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등소평은 이웃나라 소련연방의 붕괴의 소식을 접하면서 소련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경제적 위기에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의 경제는 1970년대부터 완연히 하락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1973년에 전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 이후 소련의 경제성장은 1970-1975년 연평균 국민소득은 3.2%였고, 1976-1980년은 1.0% 하락했고, 1981-1986년은 0.6%에 불과하자 공산주의 소련은 인민의 경제를 살리지 못하여 인민들이 가난하고 국가가 경제적 능력을 살리지 못하면, 국가의 권력으로 국가와 민족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련의 연방체제는 해체되어 갔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경제를 살리지 못하고 가난한 국가로서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의 경영이 불가능하여 가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보면서 중국은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이제 30여년 만에 G2로서 경제적 능력을 성취한 중국이다. 그러나 중국의 일당 정치체제는 국가와 민족들을 통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국가 주석의 권한은 인민해방군의 통수권과 국민의 안녕과 질서와 치안을 감당하는 권한과 정치적 일당체제 중국 공산당의 서기직인 총수와 국가행정부의 권한을 함께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사회주의 중국국가가 건제할 수 있는 이유이다.
중국 역사 속에서 중국의 국민들이 해외에 유학생으로 또는 해외의 자산 투자와 관광여행을 하는 시대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중국인들은 세계를 누비고 있다. 이것이 국력의 힘이며 국가의 저력이다. 이것이 G2의 국가 중국의 오늘의 모습이다. 과연 중국이 G1 미국를 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여러 경제학들의 견해에서 중국의 경제성장은 특히 14억에 가까운 국민들의 내수 경제소비의 위력 등을 평가하면서 중국 인구가 미국 인구의 네 배라는 측면에서 내수 소비경제 규모가 미국보다 네 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2007년 말 상하이와 홍콩의 증권거래소에서 급등하고 있다. 시장 가치로 보면 세계적 기준의 10대 기업 중 중국 기업이 다섯으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인은 중국의 G2 국가로서 부상하게 된 것은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1세기 동안 잃어버렸던 과거의 국제적 지위를 되찾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중국은 인류문명의 발생지였던 고대문명 속에서 내재된 우월성 대한 정체성을 하나의 대륙 안에서 수천 년을 살아왔다면, 이제 중국은 세계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이어받은 산업혁명의 유산과 유럽으로부터 가지고 왔던 문화와 문명으로부터 성장한 미국은 중국보다 1세기 먼저 발달한 문명 속에 성장한 미국 G1 나라이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미국의 첨단 과학기술과 자유주의 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미국에서 어학이나 기술연수나 전공학위 취득을 위해 미국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수학중인 유학생 숫자가 사상 최대인 113만2,587명(2015년 2월 기준)을 집계하고 있다.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2월 25일 국토안보부 자료를 인용해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 유학생의 숫자가 지난해보다 14% 증가했고, 2010년보다는 거의 50% 증가하고 2005년 보다는 거의 85%가 증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내 유학생이 증가하는 결정적 이유는 아시아 지역 출신중에 특히 중국 유학생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아시아 지역 출신 유학생이 전체의 3분의 2로855,807명(75.6%)를 차지하는데 출신 국가별로는 중국이 331,371명(29.3%)로서 제일 많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내 유학생 중 10명중에 3명은 중국 유학생이라는 것이다. 비 영리단체인 국제교육연구소(IIE)에 따르면, 2009년까지는 미국 내 유학생 순위가 인도가 1위였으나 2010년부터 중국의 유학생이 1위라는 것이다. 2위는 인도, 3위는 한국이다. 인도와 한국은 변함없이 매년 같은 숫자이었지만 중국의 학생이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연구에도 중국의 경제성장에 따라 중국 내에서 부유층의 증가와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가 2010년 일본의 경제를 추월하여 중국이 G2의 세계 경제의 주역이라는 위치에서 중국의 국내경제도 윤택하여 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의 많은 젊음의 인재들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교육에 영향을 받게 되면 중국의 정치적 개혁개방에도 점차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최첨단 과학기술과 교육제도의 교육적 영향을 받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중국의 국가 발전에 공헌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대학들의 재정적 어려움에 유학생들이 지불하는 등록금 역시 미국 대학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가 지난 몇년 동안에는 연방정부의 대학들과 주정부의 주립대학들이 주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이 점차로 줄고 있기에 외국의 유학생들을 유치하는 경향이다. 콜로라도 대학의 경우 외국인 학생은 연간 등록금이 3만523달러를 지불해야 하지만 같은 주의 미국 학생은 1만971달러만 내기에 학교측에서 본다면 외국 학생이 등록금을 많이 지불한다는 것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연구에 의하면 학교측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많이 모집하면서, 대학의 학생모집 정원관계로 인하여 미국의 국내 학생들에게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진다는 것에 미국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불만을 하기도 하는 실정이다. 미시간 주립대에서는 최근 9년 사이에 중국인 학생이 8배나 증가해 현재 약 4,000명에 이르면서 이에 불만을 품고 중국 학생들의 고급승용차를 훼손하는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은 전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부유한 집안의 학생들은 고급 승용차를 사용하는 경향이 많아지면서 현지 검소한 미국가정의 학생들의 경우에서는 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국가적 국력은 그 국민의 교육수준과 생활문화와도 연관될 수밖에 없다. 중국의 학생이 등록금으로 연간 3만523불을 지불하면서 외국의 학위를 위하여 학업을 하는 것은 분명히 내일의 중국 국가의 자산이며 희망이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중국이 G1의 국가로서 국가적 자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977년부터 등소평은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당 간부 중심으로 입학하던 대학입학 제도를 폐지하고, 11년 만에 경쟁실력으로 입학하는 대학입시 시험제도를 부활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는 교육제도를 실시했다. 개혁개방과 함께 중국은 기초 교육 강화를 위해 9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대학까지도 학비를 면제하는 정책으로 1억명의 대학과정과 수 억명의 젊은이들에게 기술학교 교육의 기회를 주어 오늘 중국의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의 동력을 가능하게 했다.
14억 중국인구 중에서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등 9개 최고 명문대에서 매년 입학하여 수학하는 학생만 2만7천여 명 이상이다. 한국사회의 경우 수재들은 의대나 법대를 지망하지만, 중국사회에서는 수재인 경우 공대를 지망한다. 한국의 인구 5천만에서 매년 한국의 수재들 중에 천명이 공대를 지망한다면 이웃나라 중국에서 2만 명이 공대를 지망한다면, 다음세대 한국 기업은 이웃 중국에 경쟁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비록 중국대륙이 국공 내전으로부터 부패하고 가난한 국토를 물려받은 중국이 공산혁명, 문화혁명으로 국토와 국가가 침체하고 있었지만, 이제 중국은 1978년 시장자유경제로 전환하여 30년 만에 G2국가라는 세계적 경제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이제 기술대국으로 굴기(屈起)하여 G1를 추격하고 있다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강호생 선교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박사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