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발달 영역과 성경이야기(2)
정서 발달과 성경이야기
우리 큰 아이는 어렸을 때 유독 아침잠이 많아서 아침마다 아이를 깨워서 유치원 보내기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억지로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때 우리 아이가 ‘다간’이라는 만화영화를 유독 좋아하였다. 어느 날 아이가 하도 안일어나서 아이 귀에 대고 이야기하였다. “다간 일어나! 나쁜 사람들이 쳐들어 왔어. 빨리 일어나 지구를 지켜야지!” 그러자 그렇게 못 일어나던 아이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다. 5살 밖에 안되었어도 자신이 일어나야 세상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지구보다 무거운 눈꺼플을 들고 일어난 것이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일으켜 세우게 했을까? 잠을 물리칠 수 있는 자기 동기화와 목표를 위해 자신을 조절하는 힘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이것은 아이의 신체파트도 아니고 인지파트도 아니다.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조절하는 것은 모두 정서와 관련이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직립보행과 같은 신체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감정’이란 부분을 갖고 태어난다. 물론 아이들의 감정은 성인이 느끼는 것처럼 세분화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불쾌감, 기쁨, 안정감 같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세분화되고 조절능력도 생기게 된다. 감정이 신체발달처럼 키가 몇 센치 자라고, 몸무게가 몇 킬로인지 그런 가시적인 측정은 힘들지만 안보인다고 없거나 덜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이들의 정서는 마치 그릇과도 같아서 다른 것을 담아 낼 수도 있고 깨지기도 쉽다. 그래서 감정부분이 손상되면 신체, 인지, 언어, 사회성 등이 담아지지 않고 흘러 내리게 된다.
실제로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의하면 뇌에서 정서를 담당하는 부분은 편도체인데 이런 정서의 신경회로는 인지는 물론 주의집중, 의사결정, 기억력, 자기동기화 등 뇌의 다른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무너지는 정서적 위기를 경험하면 신체에 아무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손을 놓아 버리게 된다. 우리 몸을 움직일 힘이 있어도 움직이기 싫고, 사리분별 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도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은 것이 정서가 아파서인 경우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서 파트는 다른 영역에 비해 더욱 주관적이라 똑같은 환경이라도 어떤 사람은 이겨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큰 상처나 아픔으로 다가 올 수 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은 감기가 와도 이겨내지만 면역력이 약하면 병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정서지능이 건강한 어린이는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켜낼 뿐 아니라 환경이나 남의 탓을 하지 않는다. 그런 정서적으로 튼튼한 어린이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성경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정서를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인간들의 정서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 부분을 치유하시는지 엿볼 수 있다.
지금으로 하면 한국의 강남, 부촌에서 세무 쪽의 일을 하는 삭개오, 그는 부자였고 돈이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대신 멸시를 받는 사람이었다. 여리고 마을사람 어느 누구도 ‘의롭다’라는 뜻을 가진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삭개오는 자신이 지나가거나 돌아설 때 사람들의 경멸과 함께 수군대는 비아냥을 들으며 그의 감정은 신체적인 키가 작음이라는 외면 보다 더 찌그러지고 상처가 나 있었다. 그런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첫 만남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가장 필요하고, 그가 가장 듣고 싶은 말,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움을 받았을 때 삭개오의 정서는 이미 치유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에 있는 38년 된 병자가 나온다. 예수님은 그를 보자 그의 병이 오래된 줄을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그냥 고쳐주시지 않고 질문을 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병자는 “네”라는 대답 대신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는지 장황하게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의 굳어진 몸 뿐 아니라 수많은 시간 동안 새치기를 당할 때마다 생긴 분함과 원망으로 굳어진 그의 정서를 치유해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실 때 어떤 경우에는 그냥 말씀으로만 고치기도 하시지만 어떤 경우에는 손을 대기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이 손에 더 있어서일까?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손을 대지 않아도 충분히 고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환자에게 손을 대시는 것일까? 이스라엘에서 병은 단순히 육체적인 질환의 의미보다 부정하거나 죄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사람은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아픔 외에 사회적인 냉대로 인한 감정의 상처를 갖게 된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터치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손길은 커녕 눈길도 닿을 수 없었던 그들의 상한 정서를 향한 손내밈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질병 외에 감정의 상함에도 관심이 많으시고 고쳐주길 원하시는 분이시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보고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신다. 예수님은 그 아이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서 물으셨을까?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가 귀신 들림으로 어떤 위험함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하고 말한다. 예수님은 금방 고쳐주실 수 있으심에도 아버지와 계속 말씀을 이어가신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사를 보면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던 아버지가 소리를 지른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예수님은 아이의 귀신 들린 것 뿐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귀신들린 아들을 보며 믿음도 희망도 없어진 아버지의 내면도 함께 고쳐 주신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능력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의 상처가 난 내면을 못 볼 때가 많다. 하지만 감기에 걸리면 열도 나고 기침도 나는 것처럼 정서가 아프면 나타나는 행동들이 있다. 관심을 받고 싶어서 부모나 교사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나쁜 것인지를 알면서도 부적응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을 지적을 받아 고쳐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은 자신이 용납되고 사랑받는다고 느껴질 때 고쳐진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이 더욱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감정을 헤아려주는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또한 예수님으로 인해 그런 용납과 수용의 경험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아이들, 이들의 상한 감정을 세우는 일은 지구를 지키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이유는 5살 아이도 지키고 싶은 지구가 있는 것처럼 우리도 지키고 싶은 다음세대가 있기 때문이다.
우명옥 전도사(시드니한인장로교회 어린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