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발달 영역과 성경이야기(4)
사회성 발달과 성경이야기
우리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심한 감기 몸살로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아픔을 인지할 나이가 아니어서 누워있는 엄마 위에서 점프하면서 놀고 있었다. 아이가 너무 자기 생각만하는 것 같아서 아이에게 엄마가 얼마나 아픈지 설명해주기 시작하였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아이의 사고를 돕기 위해 “엄마가 많이 아프면 죽을 수 있어”, “죽는 것은 네 옆에 엄마가 없는거야”, “엄마가 없으면 밥해주는 사람이 없어 네가 배가 고파”, “빨래를 못해서 더러운 옷을 입어야 해” 등등을 이야기 하였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아이는 “엄마 죽지마” 하고 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엄마가 죽는게 싫어?” “왜 싫어?” 하고 물어보자 “밥은 누가 줘?” “누가 나랑 놀아줘?” 하면서 계속 울었다. 아이에게 충격을 준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울지마. 엄마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면 새엄마가 오면 되” 라고 말하자 아이는 “예뻐? 그럼 죽어도 되” 하고 다시 뛰어 놀았다.
우리 아이가 폐륜아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지극히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0-2세 아이들은 자신과 타인이 다른 개체임을 인식은 하지만 타인의 감정이나 아픔을 헤아릴 수 없다. 3-6세가 되면 친구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같은 공간 안에는 있지만 따로 노는 병행놀이를 하다가, 점차 협동놀이로 바뀌게 되면서 자신의 것을 양보하거나 자신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7세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동체에서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데 이 때 기질적으로 예민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을 모르면 왕따를 당하거나 왕따를 시키는 극단적 사회성 결핍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 사회성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사회성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맺는 능력을 말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신 어르신들은 이 사회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실 것이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결코 일의 무게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무게이다. 아무리 똑똑한 아이도 사회성이 결핍되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드신 것처럼 인간은 관계를 맺어가도록 창조되어졌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질 때 사회성 또한 오염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크러지자,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자연계에 대해서도, 사랑해야 할 인간관계에서도 탓과 균열들이 생겼다. 아담과 하와 이후 나오는 첫번째 사건인 가인과 아벨에서도 타인에 대해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 가인의 파괴된 사회성의 결말을 보게 된다.
사회성은 나 혼자 똑똑하고 건강해서만은 안되는 종합 선물셋트이다. 사람의 타고난 기질이 다 틀린데 어떤 부모를 만나는지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기질에 맞는 친구, 선생님, 멘토, 배우자 등 만남의 복이 중요하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어도 일일이 아이의 만남까지 디자인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가 누구를 만나든 건강하게 반응하는 삶의 기본적인 태도를 가르쳐 줄 수는 있다.
아이는 최초의 타인인 부모를 통해 자신에 대한 태도와 타인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것들을 배워가기 시작한다. 이 때 아이는 양육자를 통해 기본적인 신뢰감과 안정감을 느껴야 한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 옆에 꼭 있어줘야 하는 시기가 말을 못하는 0-3세까지 보다는 공부를 봐주는 학령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학령기 전에 아이가 배우는 삶에 대한 기본 태도는 나중에 고액 과외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이다. 엄마하고 애착 형성이 잘된 아이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을 형성하게 되고, 그 든든한 연결고리를 바탕으로 사회성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엄마와의 관계가 약하고 불안하면 아이는 그 쪽에 신경 쓰느라 일정한 연령이 되어도 주변으로 자신의 사회성을 뻗어갈 수 없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면은 어린아이 같아서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을 생각하지 못하고 관계도 잘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것은 학력이나 경제적인 것과 상관없다. 어릴 적 특히 3세전 부모의 양육태도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의 사회성을 위한 첫 번째는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관적인 양육자의 정서교감이다.
두 번째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일관성있게 가르치는 것이다. 아이들은 타인을 인식하고 배려하는 것을 배우면서 점차 자신을 조절하는 법들을 익히게 된다. 이 시기는 권위형성의 시기이다. 공동체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조절하는 법들을 배워야 한다. 이 때 부모님들의 일관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사실 주일 예배를 빠지고 골프치러 간다고 구원을 못받는 것도 아니고 문제될 것도 없다. 그러나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안해도 되는 거라면 그런 부모님을 통해 아이들이 예배의 소중함을 배우기 어렵다. 극장 안에서도 통화를 하거나 떠들면 안되는 기본적인 규칙들이 있는데 예배 시간에 떠들거나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사랑과 용납이란 이름으로 묵인하다면 아이들에게 바른 사회성과 자기 조절능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해야 할 것들을 해 내고, 자신을 조절하는 것들을 부모의 모델링이나 직접적인 훈련을 통해 배워야 한다.
아이들에게 자신과 타인을 대할 때 기본적인 신뢰감들과 자기 조절하는 것들을 가르쳤다면 그 다음 우리는 아이가 만날 사람들과 공동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만남이 그 사람의 기질 못지않게 사회성 형성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와 아주버님 그리고 남편의 죽음 후 시어머니를 따라 한번도 와보지 않은 베들레헴으로 오게 된 이방여인 룻. 그녀는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 아침부터 밭에 나가 이삭을 줍게 된다. 그런데 마침 그녀가 들어가게 된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고 그렇게 많은 밭을 가진 보아스가 마침 점심 먹으러 들린 밭이 룻이 일하고 있는 밭이었다. 이 모든 만남을 사람이 계산해서 할 수 있을까? 룻기를 보면 룻이 처한 가정사는 딱하지만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가 원만한 인간관계와 사회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룻기에는 서로를 향한 엄청난 축복의 말들이 나온다.
나오미는 홀로된 자부들에게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주려 하였다(룻 1:8, 9). 보아스가 밭으로 왔을 때 일꾼들이 보아스에게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축복한다(룻 2:4). 룻을 만난 보아스는 룻에게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하며 축복의 말을 한다. 밭에서 돌아온 룻의 이야기를 들은 나오미는 “그가 여호와께 복을 받기를 원한다”라고 보아스를 축복한다(룻 2:20). 타작마당에서 룻을 만난 보아스는 룻에게 “여호와가 네게 복 주기를 원한다”고 또 말한다(룻3:10). 그리고 마침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게 되었을 때 백성과 장로들과 증인들이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 4:11)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 말대로 룻의 이름은 마태복음 1장 5절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다. 룻기 4장 14절에 보면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유명해 지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하는데 이 아이가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다. 서로를 위한 축복과 배려, 베들레헴 공동체의 건강한 사회성이 가족의 죽음으로 ‘마라’가 된 나오미와 룻의 삶을 살렸다.
사도바울의 훌륭한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그 부부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고 함께 교회를 섬기고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다. 로마에 살던 그들이 고린도에 오게 된 것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 로마에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로마의 그 많은 영토 중 브리스길라 부부는 마침 고린도에 가게 되었고 마침 그 타임에 바울이 그곳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건강히 자라도록 맛있는 음식도 주어야 하고, 바른 사회성을 갖도록 일관적인 양육태도로 안정감과 신뢰감을 키워줘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우리 모든 시간의 주관자 되시는 ‘마침, 그 때’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예쁜 새엄마’는 할 수 없는 아이의 최초의 타인이며 애착자인 ‘사랑하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우명옥 전도사(시드니한인장로교회 어린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