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65년 12월 18일, 미국 수정 헌법 제13조가 비준되면서 노예제도 폐지
노예 해방 선언 (奴隸 解放 宣言, Emancipation Proclamation)은 1863년 1월 1일에 미국의 노예 해방에 관하여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발표한 선언이다.
그 당시 북부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던 남부 여러 주 (州)의 노예를 즉시 전면적으로 해방한다는 내용으로, 남부의 군사 및 경제적 기초를 파괴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는 해석이 있는데, 노예 해방의 본질적 실현은 1865년 12월 18일에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가 비준됨으로써 이루어졌다.

○ ‘노예제도 폐지’ 전에 이뤄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
1862년 9월 22일, 링컨은 노예 해방과 관련된 내용의 예비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863년 1월 1일 이후부터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반란 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이다. 델라웨어, 켄터키, 메릴랜드, 미주리의 경계 4주 및 테네시, 버지니아, 루이지애나 등 북군이 점령한 여러 주의 노예는 대상 밖이었다. 이는 점차적이며 유상적인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링컨과 공화당내 보수파와 즉시 전면 해방과 노예주의 조기일소를 기도하는 진보파와의 타협적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전 세계에 북부의 명분을 표명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링컨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실제로 노예의 폐지를 공약으로서 매우 열렬하게 지지하지는 않았는데, 남부 등의 표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이 선언은 대부분의 북부인들에게는 명분없는 전쟁이었던 남북전쟁에 도덕적 명분을 부여하였다. 당시 많은 남부인들은 노예제도 찬성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고향을 지키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북부의 부당한 탄압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분위기였으나, 많은 북부인들에게는 전쟁에 대한 확실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이 선언으로 북부인들은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자 한 미국 독립 전쟁 때와 같은 전쟁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링컨의 선언으로 노예 해방 선언에서 제외된 몇몇 지역에서는 지방관의 선언에 의해 따로 노예가 해방되었다. 또한, 이는 남부가 노예를 부리는 것에 대한 북부 세력의 대외적인 비판으로, 전 미국인들이 노예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여, 1865년의 헌법 수정에 의해 결국 모든 노예 해방의 기초가 되었다. 예비 선언 다음의 실제 선언은 1863년 1월 1일에 이루어졌다.
남북전쟁 당시에는 이 선언에 해당되는 남부 지방이 독립하여 있었기 때문에 이 선언은 법적 강제력을 가지지 않아, 북부의 남부 재통일 이후에도 한동안 남부에서는 노예제도가 합법적으로 유지되었으므로 유명무실한 선언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이 선언은 남부의 노예 폐지에 즉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예비선언 2년 뒤의 1865년 12월 18일에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가 비준됨으로써 노예가 법적으로 폐지되는 데 일조하였다.

○ 미국의 노예제 폐지 역사
– 노예제 논쟁과 남북전쟁
미국에서는 국내 (주로 남부)에서 목화 농사 중심의 농업에 필요한 인력으로 흑인 노예들을 이용했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목화농사가 지역경제의 중심이라 노예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부에서는 1831년 흑인 내트 터너가 백인지주의 억압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내트 터너 봉기 이후 노예 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북부에서는 흑인들을 저임금 공장 노동자로 흡수하려는 자본가들에 의해 미 노예 제도 폐지 협회 (대표 윌리엄 개리슨)가 중심이 되어 노예 제도 폐지를 외치면서, 노예 제도 폐지 논쟁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북부와 농업 경제가 발전한 남부 간의 심각한 지역 감정으로 치달아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 미국 개신교의 논쟁
미국 개신교에서도 노예제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 논쟁이 일어나, 기독교 근본주의 전통의 남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노예제에 찬성하고, 진보적 신학전통을 가진 북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서를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상황적 해석을 함으로써 노예제에 반대하였다.
또한 19세기 미국교회에서 소수였지만, 퀘이커, 메노나이트 등의 소수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은 당신이 대접받으려는대로 이웃에게 대접하라는 황금률에 근거하여 노예제에 반대했다.

– 흑인 해방 그리고 그림자
초기의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은 대중적 지지 기반의 결여로 1837년 러브조이 암살 사건 등 탄압도 적지 않았으나 1852년 헤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대 인기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 결과 국회위원 시절에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난한 경력이 있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고 이에 반발한 남부 11개 주의 잇단 연방 탈퇴로 1861 ~ 1865년 남북 전쟁이 벌어졌다.
1863년 공포된 노예 해방 선언은 1865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발효되어, 미국 내의 흑인들은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자본가 (부르주아)들이 흑인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흡수하기 위해 노예해방을 주장한 북부에만 있었다.
남부에서는 과격 비밀 결사 단체 쿠 클럭스 클랜 (Ku Klux Klan; KKK) 등의 보수적인 남부잔당들이 흑인들을 탄압하였다.
그나마 북부의 흑인들도 신분은 해방되었으나, 상당수가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등 북부의 자본가들에게 종속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하는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지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 상인으로 종사하는 흑인들은 영업을 해서 번 만큼 가지는 벌어먹기로써 먹고 살던 사람들이라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 유럽에서의 노예제 반대운동
– 영국에서의 노예제 반대운동
15세기에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최초의 노예 무역을 시작한 이래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노예 시장화시켰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성공회 평신도이자 국회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가 감리교창시자이자 성공회 신부인 존 웨슬리 신부의 지지에 힘입어 노예 제도의 폐지를 추진함으로써 1807년 노예 무역이 폐지되었으며, 1833년에는 대영 제국 전체에서 노예 제도가 없어졌다.
– 유럽에서의 노예제 반대운동
노예 제도 반대 투쟁은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 향상, 주일학교 운동, 아동 노동 반대 등과 더불어 실천하던 기독교사상에 따른 사회개혁 중 하나였다.
기독교인들의 사회 개혁에 대한 열정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등장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사회 참여를 통해 드러내기보다는 개인에 한정지어서 이해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과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기존 질서가 아무런 변혁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종교적 보수주의인 탈 (脫) 정치, 사회적인 신앙을 갖게 되면서 침체되는듯 하였으나 교황 레오 13세가 노동자 헌장을 반포하면서 부흥의 조짐도 나타났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1840년대 ~ 1850년대에 거의 대부분 노예 제도를 없앴다.

– 유럽에 이은 미국의 반대운동과 노예제 폐지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 (1833년)할 즈음 미국에서도 노예제 폐지 운동이 시작됐다.
한동안 지지부진하던 폐지 움직임이 힘을 얻기 시작한 계기는 노예제 도입의 동기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것이었다. 상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 자유로운 신분의 노동자가 필요하게 된 반면, 면화 농업 중심의 남부에서는 농장에 거주하며 집중적으로 노동할 노예가 절실했다.
이 같은 갈등은 1861년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9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하고 1863년 1월1일 ‘노예 해방령’을 공포한다.
이후 남부의 흑인들이 대거 북부로 넘어오고 유럽 국가들은 남부동맹을 지원하려던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상당수 사가 (史家)들은 노예 해방령이 링컨의 정치·군사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예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인 1865년 12월 18일 “노예제는 미국 연방 및 미국 연방의 관할에 속하는 어떤 지역에서도 금지된다”는 내용의 수정헌법 13조가 의회를 통과했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공식 폐지된 것이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차별까지 함께 사라지지는 않았다.
1956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있기 전까지 흑인들은 버스에서 백인들의 옆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다.
투표 · 교육 · 고용 · 공공시설 이용 등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통과된 것은 64년의 일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