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이해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은 일반적으로 모더니즘 후의(라틴어 post: 뒤, 후) 서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운동을 일컫는다. 모더니즘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이다. 2차 세계대전 및 여성운동, 학생운동, 흑인민권운동과 구조주의 이후 일어난 해체현상의 영향을 받았다. 키워드로는 데리다가 주장한 해체(deconstruction, 탈구축)인데 탈중심적 다원적(多元的) 사고, 탈이성적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으로 1960년대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데리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등이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용어 자체가 역사학적 구분에서의 근현대에 스쳐간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학자, 지식인, 역사가 사이에서 그 정의를 두고 극한 논쟁이 일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던적 생각이 철학, 예술, 비판 이론, 문학, 건축, 디자인, 마케팅/비즈니스, 역사해석,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분되는 용어로 사용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한 시기의 사회·문화의 접변 현상만을 가리킨다.
○ 개관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대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수많은 모더니즘의 주요 개념으로부터 반발과 차용을 통해 모더니즘을 확장하거나 대체시킨 사조로 본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리성, 객관성, 진보와 같은 이상에 많은 의미를 두었다. 이것들 이외에도 19세기 후반에의 실증주의와 실재주의 운동이나 계몽사상에 뿌리를 둔 여타 사상들을 중시하였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러한 이상들이 전반에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던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은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이 특수한 경제·사회적 상황의 결과로써 도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특수한 경제·사회적 상황’이란 후기자본주의와 방송 매체의 성장 등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상황들이 당시 사회를 새로운 역사적 시기로 진입하게 하였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가와 저술가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모더니즘의 확장일 뿐이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나 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전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은 우리 시대의 경제적·기술적인 상황들이 소통과 의미의 항구적이고 객관적인 것, 즉 실체(이데아)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소통과 제조, 교통의 혁신에서 비롯된 세계화는 분립된 근대적 삶이나 문화적 다원론, 상호 연결되어 정치, 소통, 지식생산 등의 집중화된 중심을 잃고 상호 연결된 세계 사회의 한 원동력으로 종종 언급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와 같이 분립(分立)된 사회가 필연적으로 거짓에 대한 반작용으로서나 혹은 대서사(혹은 큰 이야기 meta-narrative)와 헤게모니(hegemony)의 단일화와 같이 포스트-모던으로 표현되는 응답/인식을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단일화’란 전통적 장르, 구조와 문체의 틀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범주를 전복시킨 것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 영향
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예술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주의(Realism)와 모더니즘의 반발 작용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두 영역에서 서로 추구했던 점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의 반발 작용이었다.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실제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당히 비슷한 개념이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多樣性)을 강조하였으며, 이성을 중시하며 등장한 모더니즘이 추구한 정치적 해방과 철학적 사변도 하나의 이야기(거대 서사 혹은 큰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했다. 또한, 칸트가 순수 이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했던 이념의 실현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치철학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술에 끼친 영향도 컸다. 예를 들어, 미술, 음악의 대중화와 미술에서 등장한 팝아트와 비디오아트, 음악에서 등장한 랩과 같은 장르의 발생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장르는 기존의 예술과는 매우 다르게 개성이 넘치고 자율적이며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에서는 장르의 벽이 느슨해지고 전지적 시점보다는 다른 시점을 채택함으로써 현실감을 증대시키고 독자의 상상력을 중시하게 된다. 소설 따위의 마지막에 약간의 여운을 남겨두고 독자를 생각하게끔 하는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작가 위주의 문학에서 벗어나 독자가 능동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 특징
해체주의와 상대주의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서술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대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에 인식론의 거장이었던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철학적 특징이기도 하다.
주체는 개별적인 특징이나 독창성이 아닌 상대적인 차이로서 존재한다고 보기에 존재를 지목하는 방식이 잘 쓰이지 않는다. 그 외에도 하이픈(-)을 이용한 글쓰기가 난무하는 등 문법 자체도 근대적인 권위로 보고 파괴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욕망, 탈주, 차연(差延), 이미지 해체, 타자성 등의 단어가 전매특허. 그래서 처음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서적을 접하는 사람들은 심히 당황하고는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질문하고 반발하는 행위 그 자체를 의의로 삼기도 한다. ‘삼는다’가 아니라 이렇게 서술하는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하나의 성격이나 방법론을 특징으로 갖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 이론에 대한 반박은 철학의 전반적 특징이며 포스트모더니즘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긴 하다. 어쨌든 근대적 주체(cogito)의 존재, 인과율 등 인간이 의심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의문을 던지려는 시도는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과 탈구조주의 (post-structuralism)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구조주의에 대한 후속개념으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대항마로 출발하였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후기 구조주의를 차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탈구조주의이며 후기 구조주의인)는 호환되는 개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때문에 후기 구조주의 자체는 구조주의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계승 혹은 보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구조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였으나 반발하여 후기 구조주의자가 된 미셸 푸코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반발이면서 계승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특히 후기 구조주의의 몰락에는 마르크스의 몰락이 전제가 된다. 요컨데 마르크스 → 구조주의 → 후기 구조주의는 운명 공동체였던 셈이다.
그러나 2010년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침체에 빠져들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서유럽과 한국 학계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것에 비하면 몰락이라고까지 할 만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아예 사장된 것은 아니고 여전히 인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발표되는 논문의 양질은 충격적으로 줄었다. 이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 이후에 나타난 변화이다. 현실의 문제가 커지다보니 포스트모더니즘처럼 다소 형이상학적인 분야보다는 현실의 문제와 연관된 학문의 수요가 커진 것이다. 이처럼 사회문제가 점차 심각해지는 모습을 두고 반PC주의자들은 사회갈등의 근원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있다고 주장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보기엔 포스트모더니즘의 쇠락을 불러일으킨 현실의 사회문제 역시 거대 서사 담론, 즉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거대 서사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항했던 또다른 거대 서사인 공산주의가 결국 개인과 인격의 말살을 불러온, 처참한 모더니즘의 실패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 같은 문화 충돌 현상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패가 아닌, 오히려 모더니즘의 실패로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실패한 것은 결국 포스트모더니즘도 하나의 거대 담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극단적 상대주의, 단순한 반달리즘, 모든게 OK 등,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오해’되는 수많은 것들은 오히려 그것을 ‘덜 해체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적은 글은 역설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이지 않다는 특징이자 한계가 있다. 쉽게 얘기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어쩌고 저쩌고’를 얘기하는 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적이지 않다. 하나의 철학적 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분류할 수는 있지만, 철학적 관점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즉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스스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무산시킨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 포함시킬 수 있는 유명한 사상가들로는 장 보드리야르, 지그문트 바우만등 (사회학),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철학), 질 들뢰즈 (철학), 펠릭스 가타리 (정신분석학), 자크 데리다 (철학), 롤랑 바르트 (문학이론, 기호학) 등을 들 수 있다. 주로 프랑스인들이 많은 이유는 세계대전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고, 프랑스에서 강하게 일었던 68혁명의 영향 때문이다. 68혁명 이전까지 후기구조주의가 특히 프랑스 위주로 입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 기성 권력이나 사회구조, 이성중심 사고관에 회의를 품은 것이 직접적인 발생원인이라 보는 것이 옮을 듯하다. 영미권에서는 프레드릭 제임슨(문학)이나 데이비드 하비 (사회지리학) 등이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평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에 일정부분 동의하면서 대안적 담론 자체를 차단하는 지나친 상대주의에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테리 이글턴 등의 강경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인식의 틀 자체에도 비판적이다.
대학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을 직접 소개하는 강의는 흔치 않으며, 문화철학 내지는 현대 프랑스 철학과 같은 명칭을 통해 소개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궁금하다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들뢰즈와 가타리가 공저한 <천 개의 고원>, <안티 오이디푸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대하여> 등을 추천한다. 한국내 저자가 쓴 포스트모더니즘 개론서로는,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해석학과 문화철학을 전공한 신국원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저 저술들을 읽기 전 보르헤스의 환상소설 단편집인 <픽션들>을 읽어본다면 그나마 철학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에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80년대 후반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현이 푸코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조금씩 알려졌으며 90년대부터는 김성기, 이진경 등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현재는 주로 ‘연구공간 수유+너머’주소를 비롯한 대안적 학술공간이나 문학이론 쪽에서 연구되며 제도권에서는 이미 기존 체계에 상당부분 흡수되거나 유행이 지나 관심도가 떨어진 상황. 사회과학이나 문화이론에서 푸코나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미 교과서적인 의미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특히 현대 사회학과 정치학에서 푸코의 비중은 대단히 크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라 순화되어 주류로 편입된 부분이 많다. 다만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은 주로 마르크스주의를 버리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택한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현재도 정통 좌파 이론가들은 국내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놈 촘스키, 앨런 소칼, 리처드 도킨스, 에릭 홉스봄 등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들로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 발전론에 비판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역사 발전론 또한 거대담론의 일종이며 극복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역사의 종언>의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포스트 모던과 후기 구조주의가 이미 죽었다고 평가한다. 역사의 종언의 주된 내용은, 자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의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압승을 얻어 버렸으니 앞으로 인류 역사는 현대 자유 자본주의에서 변하지 않고, 때문에 역사의 변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자본주의나 자유민주주의도 완벽한 체제라 할 수 없으며 역사의 종언 테제는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후쿠야마는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자신의 논리를 번복하는 논문을 냈지만 저 전제는 두고두고 비평되고 있다.
역사 발전론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일정한 경향이 존재한다고 해석한다는 점에선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역사를 하부구조와 갈등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후쿠야마의 주장과 달리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가 ‘역사의 종언’을 맞았다고 보지 않으며, 사회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갈등은 계속될 것이라 본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도 모든 사상은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토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수명이 끝난 사상, 혹은 보편타당하게 영원히 존재할 사상은 없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를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이 비합리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정리하여, 하나의 사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전망은 밝아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에 대한 안티로서 존재하므로, 모든 것이 존재하는 한 완전히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철학일지도 모른다. 자연과학과 달리 사회과학, 인문학은 명확한 진리에 도달하기 어려우며, 그의 존재 역시 의심스러운 것은 차치하고, 결국 나왔던 말들이 계속 반복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라져도 다시 새롭게 비슷한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도 소피스트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는 모더니즘이 대표하는 이성이 좀 더 시대를 이끌어 나가고, 이성이 도구로 변질된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반박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사상으로 모더니즘 이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무시한, 일종의 시대착오로 비판받는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Criticism of postmodernism)은 다양한 지적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의미하고 몽매주의를 양산시킨다는 것, 과학의 엄밀성을 침해한다는 것, 실질적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 등이 있다.
– 막연성 비판
철학자 노엄 촘스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분석과 경험에 기초한 실증적 지식에 기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학문이라고 비판했다. 촘스키는 왜 다른 분야의 학자들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스트 지식인들은 대답하지 못하냐고 힐문했다.
“자기네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과 “철학”의 경이로움을 들먹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네들의 이론의 원리가 뭐고, 기반하고 있는 증거가 무엇이며, 그것이 명백한 것인지 아닌지 설명해 보라고. 물리학, 수학, 생물학, 언어학 등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오히려 행복해 합니다. 이런 질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당한 요구입니다. 만약 그들이 여러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데이비드 흄의 충고를 따르시면 됩니다. 그 이론과 철학이라는 것을 불 속에 집어던져 버리십시오.” – 노엄 촘스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동물행동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장자크 루소 퐁퐁의 낭만주의의 연장선에 있으며, 특히 해체주의의 경우 무한 소급의 문제에 빠진다고 비판했다. 만일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제가 옳다면, 독자는 그 결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가 의도한 결론인지 확신할 수 없다. 역으로, 만일 독자가 파악한 것이 철학자의 의도와 동일하다면 그 논증을 고려해야 할지가 불분명해진다는 것이다.
– 도덕적 상대주의 비판
일각에서는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덕적 상대주의와 같은 뜻이며, 일탈 행동을 조장한다고 의심한다. 대학생선교회 국제지도자 조시 맥도웰과 밥 호스테틀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어떠한 객관적 감각으로도 진실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밝혀지기보다 만들어진다는 믿음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관”…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진실이란 “특정 문화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문화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과 의사소통을 하려는 그 어떠한 시스템이나 진술은 모두 권력 놀음으로 치부되며, 다른 문화를 지배하기 위한 수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사회주의적 측면에서 비판
앨릭스 캘리니코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68 혁명에 실망한 당시 혁명가 세대의 생각이 반영되었으며, 전문직·경영직 중산층에 흡수된 왕년의 혁명가들이 뒤섞여 있는 사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적 좌절과 사회 이동에 따른 특정 징후로 이해해야지, 그 자체로 가치있는 중요한 지적·문화적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보드리야르, 리요타르 등 저명한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을 공격했다. 캘리니코스와 마찬가지로 사회노동당 당원인 미술사학자 존 몰리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부르주아 역사학자들이 읊조린 갖가지 설득의 노래만 주야장천 따라 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의 문학평론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또는 포스트구조주의)이 자본화와 세계화 문제의 거대담론과 엮이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라고 주장하며 공격했다. 제임슨의 주장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런 거대담론과 엮이지 않음으로써 포스트모던 철학은 지배와 착취의 관계가 팽배한 사회의 공모자로 전락한다. 미국 국제사회주의조직의 선두적 구성원인 셰리 울프는 2009년 저작 《성생활과 사회주의》 (Sexuality and Socialism)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동성애자 해방운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 가치를 묵살했다. 슬로베니아의 비판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가 주체성을 해체함으로써 주체마저 사라져 사회적 저항의 구심점이 사라졌다고 비판했다.
산디니스타 정권하의 니카라과에서 강의를 한 전력이 있을 정도로 학계 내 학좌파였던 뉴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앨런 소칼은 학자의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또 정치적인 입장에서 사상누각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가 중도나 우파 세력에 의해 공격받아 자신을 포함해 정통 좌파 진영에까지 피해가 돌아올 것을 우려했다. 그는 “지적 해체주의 따위가 어떻게 노동계급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힐난했다. 그리고 소칼은 후술할 소칼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 과학의 측면에서 비판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며, 자신의 이론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과학자들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실재가 없으며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아무런 유익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학에 대해 무지했을 뿐 아니라 파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과학적 진리를 일종의 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과학은 여러 앎의 방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구미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다. 그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과학 용어를 잘못된 의미로 갖다 붙여 사용하며 자신들의 ‘철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자 과학자들은 단단히 화가 났다.
《고등 미신》의 출판과 뒤이은 소칼 사건, 그리고 그에 따른 과학 전쟁의 와중에 과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과학 지식 오용과 그 사상의 막연성, 몽매주의에 대해 포화를 퍼부었다. 《이기적 유전자》를 비롯한 많은 대중과학서를 집필해 명성을 날리고 있던 리처드 도킨스는 최고급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에 게재한 〈발가벗겨진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disrobed”)이라는 글에서 날 선 독설을 가했다. 도킨스는 “발기 기관은 의미 작용의 루트-1에 해당하며 … 발기 기관이 복원시키는 향유의 -1에 해당하는 것”이라며 용어의 오용과 몽매주의를 동시에 저지르는 글을 쓴 포스트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을 보고 “이 글을 쓴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굳이 수학 전문가의 의견을 들이댈 필요도 없다”고 단언했으며, “질량-에너지 동등성 공식 E=mc2이 빛의 속도에 ‘특권을 주기’ 때문에 성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 여성주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이에, “남성의 음경이 딱딱하게 발기하기 때문에 고체역학은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의 음순에서는 생리혈과 질액이 나오기 때문에 유체역학은 여성중심적이므로 고체역학이 유체역학보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쓴 이리가레이에 해설가 캐서린 헤일스의 주장 역시 터무니없을 뿐이라고 잘라 말하고, 혼돈 이론을 갖다붙여 “가속 운동이 선형성에 종지부를 고하고 가속 운동에서 생겨난 난류가 역사를 그 종착점으로 비껴나가게 한다”고 한 보드리야르의 글은 “점입가경의 넌센스”라고 촌평했다.
이외에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상대성 이론과 상대주의를 혼동한 것,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양자론, 혼돈 이론 등을 오남용한 것이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과학 용어와 사이비 과학을 혼재하면서 이해할 수 없게 문장을 어렵게 쓰는 몽매주의적 태도와, 맥락 없는 용어의 남용 등이 모조리 비판 대상이 되었다. 앨런 소칼은 《지적 사기》 (Intellectual Impostures)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번지르르한 말의 베니어판을 걷어내면 무엇이 남아 있을지 자못 의심스럽다”고 기술했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최종 이론의 꿈》 (Dreams of A Final Theory)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선형적’이라는 말은 무조건 안 좋은 것이며, ‘비선형적’이라는 말만 갖다 붙이면 되는 줄 안다”고 비판했다. 도킨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말장난에 불과하다면, 적어도 장난이 재미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들의 저술은 그렇게 놀랄 만큼 지겨운가?”라고 힐난했다. 이런 평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비판적인 과학자들의 입장과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