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10월 26일, 정유재란 :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 일대 명량 해전 (鳴梁海戰; 명량 대첩, 鳴梁大捷)에서 대승
명량 해전 (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 (선조 30) 음력 9월 16일 (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300여 척을 격퇴한 해전이었다.

○ 경과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10월 16일(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퇴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해상의 적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본진을 옮긴 이튿날인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새벽 3~4시 경 어란진에서 출병한 일본 수군 130여 척이 7~8시 경 순조 (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중형 군선인 관선 (세키부네) 130여 척으로 진영을 짜고 10여척씩 대열을 맞추며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이순신은 보고를 받고 즉시 닻을 올리고 울돌목으로 향했다. 이미 적선의 선봉대열이 통과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순신 상선의 즉각적 포격으로 세키부네 3-4척이 격침되며 전투가 시작되자, 빽빽히 명량을 채운 적의 기세에 밀려 조선 수군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하며 약 40분 가량을 버텼고, 적의 진격이 소강상태가 되자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과 거제현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매우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고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격전의 와중에 이순신의 대포와 화공에 맞아 안위의 배를 둘러쌌던 적장선을 포함한 3척의 적선이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포격으로 바다에 빠졌는데 이 광경을 보고있었던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 (俊沙)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 (馬多時, 구루시마로 추정)다”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물긷는 병사 김돌손을 시켜 즉시 마다시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곧바로 토막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일본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정오 즈음이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 (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 (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에 1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까지 합세하여 10여 척의 전선이 모두 모인 조선 수군은 당파를 거듭했고, 일본 수군은 조류의 역조 (逆潮)와 조선 수군의 당파로 인해 전혀 반격할 수 없었으며, 또한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도도 다카토라는 부상을 당했다.
군감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총 사령관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부터, 일본 본대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30여 척의 대함대를 10여 척으로 추격하는 형세 되었고 일본 수군은 유시 (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
○ 승리의 요인
주요 승리 요인으로는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다.
또한, 판옥선을 앞세우고 그 뒤에는 백성들이 피난하고자 타던 배를 열지어 늘어놓아 더 많은 배가 있는 것 처럼 위장전술을 폈다.
전투의 전개 과정은 아직 학계에서 연구 중에 있으며 조선 수군의 전술적 우위는 아래와 같다.

- 당파전술과 함포전술
조선 수군에게 함포전은 백병전 중심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효과적이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다.
오늘날 다연장포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전, 박격포에 해당할 비격진천뢰, 대형 로켓 병기라 할 만한 대장군전 등의 신무기를 사용하였다.
일본 수군 역시 함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수군에 비해 사용이 서툴렀으며 일본 수군의 함포 적재량이 조선 수군에 비해 열세였다.
조선 수군은 백병전에 불리하므로 함포전으로 일본 전선의 근접을 저지했으며 또한 조선 수군은 함포전 뿐만 아니라 판옥선이 적선보다 견고한 점을 활용하여 일본의 전선과 충돌하여 부서뜨리는 당파전술 (충각전술)도 구사했다.
- 판옥선과 왜선의 비교
일본 수군의 전선은 뱃머리가 뾰족한 첨저선으로 아타케부네 (安宅船) 등이 있다. 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을 바닥에 깔고 그것을 뼈대로 외판을 붙여나가는 (V자형 바닥) 첨저선과 달리,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고 뱃머리가 뭉툭하며, 크기는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조금 크다. 평저선은 첨저선 보다 배가 물에 잠기는 지점인 흘수선이 낮으며, 물에 깊게 잠기지 않으므로 전선을 회전시키는 선회기동에서 물 속의 저항을 덜 받는다. 하지만 평평한 바닥이 물 표면에 닿는 면적은 넓어서 배의 직진 능력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암초가 많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우리나라 바다에서 사용이 적합했는데,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판옥선이 뒤집힐 위험이 없었다.
또한 물과 닿는 면적이 넓어 화포를 발사할 때의 반동 흡수가 용이하다. 판옥선에서 사용한 나무못은 물을 먹으면서 팽창하여 결합부위를 견고하게 했으며, 판자로는 소나무를 사용했다. 소나무 판자는 일본 수군의 삼나무나 전나무 판자 보다 단단하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쇠못을 사용했는데, 쇠못은 바닷물에 녹이 슬어 전선의 결합부위가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판옥선의 판옥 구조는 높이가 높아서 화포의 사거리를 늘리고, 노꾼과 사부를 튼튼한 판옥으로 보호하여 전투에 안정적으로 임하도록 한다.
또한 내부가 넓어 노 한 자루당 4~6명의 노꾼이 커다란 노를 저었으며 작은 노를 젓는 일본 수군보다 효율적이다. 판옥선의 돛은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세로돛을 사용했으며 일본 수군은 역풍에 무용지물인 가로돛을 사용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순풍이 불어올 경우에 판옥선보다 조금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 결과
유시 (酉時, 오후 5시 ~ 7시) 무렵, 전투는 끝났다.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130여 척 중 30여 척 (31~33)이 격침되었고, 왜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약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반면, 조선군의 전선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다만, 순천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 하였고, 안위의 전함의 격군 일고여덟명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통해 조선군 전사자 수를 대충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이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9월 25일 (음력 8월 15일), 9월 29일 (음력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이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나라군과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