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 (亂中日記, 1592 ~ 98년 사이 7년간)
난중일기 (亂中日記)는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이순신 (李舜臣)이 임진왜란 7년 (1592 ~ 1598년) 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 (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Imjin jangcho [Drafts of the Imjin War Reports] and Letters by Yi Sun-sin)
.문화제 유형: 대한민국의 국보
.종목: 국보 제76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합 9책
.시대: 조선시대
.소유: 대한민국 정부,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중
.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길 48 (염치읍, 현충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영어명: Nanjung Ilgi –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등록 구분: 기록유산
.지역: 아시아 · 태평양
.지정: 2013년 (37차 정부간위원회)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개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한산도, 명량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란의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끌어, 사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무공 (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던 여해 (汝諧)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 (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 (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해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일기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조선 정조 19년 (1795년)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에서 처음 붙여졌다. 원래 제목은 연도별로 ‘임진일기’ (壬辰日記), ‘계사일기’ (癸巳日記) 등으로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난중일기의 판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친필 원본은 초서로 되어 있으며, ‘이충무공전서’ 편찬과 함께 원본 일기의 초서를 정자 (正字)로 탈서 (脫草)한 전서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편집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 (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전서본과 친필본을 합본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하였다.
7년 간의 전쟁 동안 출정한 낱, 이순신 본인이 항명죄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있던 시기에는 일기를 쓰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나,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내용은 시취 (時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 · 친척과의 왕래 교섭, 사가 (私家)의 일, 수군 (水軍)의 통제에 관한 비책 (秘策), 충성과 강개의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식구와 관련된 내용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간의 갈등문제를 비롯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 (史料)이다.
○ 내용
– 두 개의 정유일기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이 있었던 해인 정유년 (1597년)의 일기는 두 개의 사본이 존재한다. 모두 이순신 본인이 쓴 것으로 정유년 4월 1일부터 10월 28일까지 쓴 제5책 (전 27매)와 정유년 8월 5일부터 이듬해 무술년 1월 4일까지의 일을 기록한 제6책 (전 20매)의 사본이다. 정유년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가 중복되어 있는데 양자를 비교하면 제5책에서 간지의 착오가, 제6책에서 기사의 상세한 확충이 확인된다. 김경수는 이에 대해 이순신이 처음 쓴 정유년 일기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시간의 여유를 틈타 이순신이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쓴 것으로 추정하였다. 명량해전을 치르던 날인 9월 16일의 일기는 난중일기 분량 가운데서도 가장 긴 분량의 일기이기도 하다.
– 왜장 마다시 (馬多時)
‘정유일기’ (丁酉日記) 후권 (後券) 음력 9월 16일자에 기록된 명량 해전의 날, 12척의 배를 이끌고 울돌목에서 300여 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와 맞닥뜨려 적선의 31척을 부수고 일본 함대를 격퇴하는 전승을 거둔 이순신에게 항왜 준사 (俊沙)가 바다에 떠다니던 왜장의 시체를 가리켜 “저기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은 놈, 안골진 (安骨鎭)의 적장 마다시라는 자입니다.”라고 보고했고, 이순신은 사부 김돌손 (金乭孫)을 시켜 마다시를 갈쿠리로 건져올려 재차 준사에게 확인시킨 뒤, 마다시의 시체를 토막내어 적 앞에 보임으로써 적의 기세를 꺾었다고 적고 있다.
안골포에서 항복한 항왜인 준사가 알아보고 이순신에게 가리켰다는 왜장 마다시에 대해서는, 정유재란 당시 구루시마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했으나 울돌목에서 전사한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라고 알려져 왔으나, ‘양국임진실기’ (両国壬辰実記)의 찬자 야마자키 히사나가 (山崎尚長)는 각주에서 아와지 섬을 중심으로 활약한 또 다른 수군 세력인 간 씨(菅氏)의 간 헤이에몬 (菅平右衛門)의 자제 가운데 마타시로 (又四郎)라는 통칭으로 불렸던 간 마사카게 (菅正陰)를 마다시로 거론하고 있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울돌목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도 서로 같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징비록’을 일역하기도 한 재일 사학자인 박종명(朴鐘鳴)도 이 설을 지지하였다. 일본측 자료로 명량 해전 당시 일본 수군 장수의 한 명이었던 도도 다카토라의 행장 기록인 ‘고산공실록’ (高山公実録)에는 “선봉에 섰던 배들이 적선에 당해 부서진 것이 몹시 많았다. 그 와중에 구루시마 이즈모노도노 (来島出雲殿)도 전사 (討死)하였다.”고 적고 있다.
–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가
이순신은 일기 속에서 자신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남기고 있다.
.권율
선조 27년 (1594년) 이순신은 전윤으로부터 “수군을 거창으로 잡아왔는데 원수 권율이 방해한다”는 전언을 들었다. 그는 이를 일기에 적고, “예전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랬으니 한탄해 뭐하겠는가”라고 권율을 비판했다. 6월에는 광양현감이 두치에서 수군을 옮겨 복병시켰는데, 도원수 권율의 서출 처남인 조대항이 권율에게 무고하는 말만 믿고 광양현감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문책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해 “사사로이 행한 것이 이리 심하니 통탄을 비길 데 없다”고 평했다 (나중에 권율은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후회). 을미년 일기에서도 이순신은 남해현령 기효근 등을 공초한 권율의 초안을 보고 “근거도 없이 망령되게 고한 말이 몹시 많으니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라며, 원수의 임무를 맡아 행하는 게 괴이하다고 평한다.
.김응서
경상우병사로 있던 김응서는 선조 28년 (1595년) 5월 1일, 조정의 명도 없이 사사로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교섭하면서 고니시를 향해 ‘대인 (大人)’이라고 칭하는 등의 일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있었다. 김응서에게 비변사낭청 김용이 찾아와 구두로 선조의 유지를 전한 날 일기에 이순신은 “김응서라는 자는 어떤 자인데 스스로 개선하고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쓸개가 있는 자라면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진주성의 폐허를 함께 둘러보기도 한다. 훗날 고니시 유키나가의 첩자 요시라로부터 전해들은 가토 기요마사의 조선 도해에 대한 거짓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조정으로부터 출병해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이 정보의 신빙성이 약하다고 출동 명령을 거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내놓게 된다.
.류몽인 (柳夢寅)
류몽인의 유명한 이야기집 ‘어우야담’에는 이순신에 관한 일화가 몇 편 등장한다. 류몽인은 선조 28년에 암행어사로 남도에 파견되었는데, 암행어사로써 그는 임실현감 이몽상과 무장현감 이충길, 영암군수 김성헌, 낙안군수 신호를 파면해 내치고, 순천부사를 탐관오리의 으뜸이라고 평하고 담양군수 이경로나 나주목사 이순용, 장성현감 이귀, 창평현감 백유항 등의 악행을 덮어주고 조정에 포상을 요청했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해 “나라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도 않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는 변명만 믿고 있다”며, 중국 송의 간신이었던 진회가 무목 (武穆)한테 하던 짓이나 다름없다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류성룡 (柳成龍)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에 도체찰사를 겸해 군무와 정무를 두루 수습하였던 류성룡은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임진년 3월 5일에 이순신은 류성룡 (당시 좌의정)으로부터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받았음을 적고, 그 책에 대해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다”며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라고 평가하였다. 이후 갑오일기 2월 12일자에 이순신은 한양에서 온 선전관으로부터 영의정 (류성룡)의 편지를 전해받고, 다음날 류성룡에게 답신을 썼다. 이때 이순신은 일기에서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맙고 그립기가 끝이 없다”고 소회를 적고 있다. 7월 12일자에 이순신은 “류 정승 (柳相)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이일)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는 자신이 들은 소식을 적고 (실제 류성룡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9년 뒤인 1607년에 사망) “이는 류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서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을 이길 수 없다.”고 자신의 감상을 적고 있다. 류성룡은 훗날 징비록에서 특별히 이순신의 생애와 전과 등을 비중있게 언급하였다.
.원균 (元均)
원균은 이순신의 일기 속에 120회 언급되어 있다. 연도별로 따지면 계사년 (49회)과 갑오년 (46회)에 집중되어 언급되는데 대부분 원균의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진도의 지휘선이 왜적에게 포위된 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못본 척 하는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경상수사 (원균)를 원망하고 있으며 죽은 왜적의 수급을 거두려고 적이 가득한 섬 사이를 들락거리는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을 잡아 보냈더니 이순신에게 화를 내더라는 기록과, 장계를 거짓으로 꾸며 올리면서 군중을 괜히 동요시키는가 하면 탈영한 격군들을 데리고 자신의 주둔지로 숨은 휘하 포작 (어민)들을 숨겨주느라 그들을 잡아 오라고 금모포 만호가 보낸 관리들을 거꾸로 포박하기도 하고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이 경상우병사 최경회에게 보낸 1,530대의 불화살을 혼자서 다 쓰려고 계책을 꾸미기도 하고 이순신에게 날 밝는 대로 나가 왜적과 싸우자고 공문을 보내놓고 다음 날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는 문제에 대해 공문을 써서 보내자 취기에 정신없다고 핑계를 대며 대답하지 않기도 한다. 이순신에게는 복병을 동시에 보내자고 해놓고 자신이 먼저 보내기도 했다. 이밖에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더라는 등의 비난도 있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서는 거의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의논에서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번 모순이다. 참 가소롭다라고, 원수 권율의 질책 앞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원균의 모습을 두고 우습다고 비웃기도 하는 등, 매도에 가까운 비난을 숨기지 않는다. 어머니의 상을 당한 이순신에게 문상을 보냈을 때조차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한다만 이는 원수의 명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에 대한 감정의 골은 깊었다.
.이원익 (李元翼)
이원익은 체찰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던 중이던 1595년 8월에 이순신과 만났다. 8월 22일에 진주에 들어온 이원익은 다음날 이순신과 대면했는데, 이순신은 이원익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을 둔 것 같다.”고 일기에 적었다. 28일까지 체찰사 이원익은 체찰부사 김륵, 종사관을 데리고 이순신과 함께 남해를 돌며 진을 합칠 곳, 왜적과 싸울 만한 곳을 둘러보며 군중을 폐단을 의논하고 헤어졌다. 12월 18일에도 체찰사 이원익은 통제사 이순신과 사천의 보에서 만나 새벽 두 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심문받을 때 이원익은 정탁과 함께 이순신의 구명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정경달 (丁景達)
정경달은 임진왜란 당시 선산군수로써 의병을 모아 김성일, 조대곤 등과 함께 금오산에서 왜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1594년부터 이순신 막하에서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는데, 둔전 경영과 관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임진일기 마지막 장에 실려 있는 이순신 본인이 쓴 서간의 초안에서 전 관찰사로부터 도주 (道主, 관찰사) 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으니 일체 검사하지 말라는 공문에 대해, 종사관 정경달은 이제껏 둔전 감독에 심력을 다하였음을 호소하고 추수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대로 맡겨둘 수는 없겠느냐고 적은 것이 확인된다. 정경달 또한 전쟁 중에 쓴 일기가 문집 ‘반곡집’ (盤谷集, 1800년 간행)에 실려 전하며, ‘반곡집’에 실린 정경달의 일기 또한 ‘난중일기’라는 편명으로 실려 있다.정탁 (鄭琢)갑오일기 2월 4일자에는 찬성 (贊成) 정탁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탁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 이원익과 함께 그의 목숨을 구명해 줄 것을 청하는 차자를 올린 사람이었다. 정유년 4월 1일에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났을 때 정탁은 류성룡 등 다른 조신들처럼 사람을 보내 이순신을 위로하였다. 한편 이순신을 구명해 줄 것을 요청한 정탁의 차자는 ‘신구이순신차초’ (伸救李舜臣箚草)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전장에서의 독서

‘난중일기’ 속에는 이순신이 전쟁 가운데, 혹은 전쟁 전에 읽었던 책에 대한 언급도 있다. ‘정유일기’ 말미에 이순신은 중국의 역사책 ‘송사’ (宋史)를 읽고 느낀 소감을 적어두었고, 역사 속의 인물의 행적을 되새기며 구국에 대한 충정을 다시금 상기한다. 이순신의 오랜 지우인 류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 (增損戦守方略)에 대해 “수전과 육전, 화공법에 대한 전술을 일일이 설명한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이라며 칭찬하고, 한국의 옛 역사를 읽고 개탄스럽게 느낀 자신의 생각을 일기에 적기도 했다.
또한 ‘갑오일기’ 말미에서는 ‘난도 (難逃)’,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가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인재가 없으니 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 增蓋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와 같은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확인되어, 이순신이 일찍 ‘삼국지연의’를 접하고 읽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정유일기’에는 백의종군 도중 한산도의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마침 남쪽으로 내려온 박천군수 (博川郡守) 류해 (柳海)로부터, 과천의 좌수 (座首) 안홍제 (安弘濟)라는 인물이 죄도 없이 억울하게 관에 잡혀가 여러 차례 형장을 맞아 거의 죽을 지경이 다 되었는데 말과 스무 살 된 계집종을 뇌물로 바치고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 안팎에서 뇌물의 많고 적음을 갖고 죄의 경중을 정한다고 기가 막혀 하며 “이런 게 백 전의 돈이 죽은 혼도 살린다” (一陌金錢便返魂)는 것인가 하고 한탄하였는데, 이 구절은 명 (明)의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 (剪燈新話)에 실린 ‘영호생명몽록’ 중 내용의 부분이다. 류해는 이순신을 만난 다음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배설 및 가리포첨사에게 보내는 이순신의 문안 편지를 갖고 승평 (순천)을 거쳐 한산으로 갔고, 두 달 뒤인 7월 16일 새벽,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거제 앞바다의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 난중일기의 사본 및 간본
‘난중일기’의 대표적 사본과 간본은 이순신 본인이 초서로 쓴 친필 원본과, 친필본을 토대로 조선 정조대에 초서를 정서하는 작업을 통해 정리한 전서본이 있다. 1932년 원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친 형태의 간본이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빠졌던 부분과 누락된 부분이 계속해 이후 발견되면서 내용에 대한 추가 연구와 번역이 이루어졌다.
– 친필본
전서본 일기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친필본은 5월 1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전문 7권 8책으로 군중에서의 일과를 비롯해 조정에 바치는 장계와 등본, 별책, 부록 등이 초서로 적혀 있다.
임진년에서 계사년, 정유년 일기는 일기의 양이 일정하지 않고, 갑오년에서 병신년의 일기는 비교적 일정하다.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적은 것으로 삭제에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쓴 초서 글씨들은 전서본 등 후대 활자본에서도 해당 부분의 오독 내지 탈자가 확인되기도 한다. ‘난중일기’를 연구한 노승석은 필기 상태가 유난히 심하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에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파직에 투옥, 백의종군에 이어 모친상까지 당하는 악순환 속에 있었던 이순신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만큼 이순신의 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고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일기로써의 성격을 제대로 간직한 간본이라 할 수 있다.
– 전서본
조선 정조는 재위 12년 (1788년), “우리 나라를 재건하게 한 큰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이순신의 사적을 모아 내각에 내려 전서를 편찬하고 활자로 인쇄되는 대로 한 본을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이 있던 통영의 충렬사에 간직해두고 제사지낼 것을 명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보고서, 진중에서 남긴 7년간의 일기와 시문 등 이순신의 행적과 관련 기록에 정조 본인이 이순신을 추모해 쓴 글이 더해졌다. 간행은 윤행임과 유득공 등이 맡았으며, 초서로 쓰여 있던 친필본 일기의 내용을 정자체로 바꾸고 판각하는 탈초 작업이 이때 처음 이루어졌으며, 흔히 알려진 난중일기라는 제목도 이때 처음 붙여졌다.
‘이충무공전서’는 초간본을 비롯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총 6차례 간행되었고, 내용은 간본 모두 동일하다. ‘이충무공전서’ 권5에서 권8에 해당하는, 이른바 전서본 ‘난중일기’의 내용은 날짜면에서 친필본보다 많으며, 총 7년 2,539일의 분량 가운데 1,593일의 기록이 실려 있고 946일은 누락되어 있다. 친필본에 실려있던 내용 상당수가 생략된 한편으로 친필본에 없는 을미년 일기 전문과 임진년 정월 초하루에서 4월 22일, 무술년 10월 8일부터 12일, 11월 8일부터 17일까지의 일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난중일기’의 정본을 제작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난중일기초
1935년 12월 20일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판독한 판본을 일본인이 경영하던 지카자와 인쇄부 (近澤印刷部)에서 간행된 간본이다. ‘조선사료총간’ 제6에 ‘난중일기초 임진장초’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는데, 그 이전인 1928년 5월에 이순신에 관한 유물 일체의 촬영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모두 마친 상태였으며 1934년 연차계획안 속의 사료총간목록 속에서 난중일기 초본과 임진장초 (활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친필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치되, 친필본의 형태와 체재를 그대로 살려 날짜별로 나열, 친필본에서 마멸,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미상기호로 처리하였다. 수정된 내용은 오른편에 빠짐없이 표시하고, 관련 내용은 위에, 인명과 지명은 옆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 난중일기초를 가장 대표적 전범으로 삼았으며, 비교적 완벽에 가깝게 편집된 간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전인 1916년, 조선연구회 (朝鮮研究会)의 주간을 맡고 있던 아오야나기 난메이 (靑柳南冥)가 전서본 ‘난중일기’를 토대로 일본어 해석과 함께 ‘원문화역대조 이순신전집’ (原文和譯對照 李舜臣全集)에 수록한 간본이 존재하나, 이는 임진년 정월 초하루부터 을미년 5월 29일까지의 일부 내용만을 실은 발췌본이었다(이듬해 난중일기에 현토를 단 ‘난중일기장’이 ‘이순신전집’에 실려 간행됨).
– ‘충무공유사’ 본 일기초
이순신의 집안인 덕수 이씨 집안에는 ‘충무공유사’ (忠武公遺事)라는 이름의 문헌이 전해져 왔다. 저자도 확실하지 않은 이 문헌은 이순신 집안과 관계있는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재조번방지’ (再造藩邦志)에서 초록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제목이 재조번방지초 (再造藩邦志抄)라 알려지기도 했다. 성립 시기는 ‘재조번방지’가 완성된 숙종 42년 (1716년) 이후로 보인다. 친필본 ‘난중일기’를 옮겨 적은 유일한 판본이자 325일치의 분량 가운데 친필본과 전서본에 누락된 32일치 (을미년 30일, 병신년 1일, 무술년 1일치 분량)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 (후술) 이듬해 3월, 한국의 문화재관리국은 ‘난중일기’와 함께 ‘충무공유사’를 영인 발행하였다. 2000년 ‘정신문화연구’ 봄호 제23권 1호에 실린 박혜일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외 3인의 ‘이순신의 일기 일기초의 내용 평가와 친필초본 결손부분에 대한 복원’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충무공유사’의 원문 일기초 내용의 일부가 발표되었으며, ‘난중일기’의 훼손된 부분을 복원할 수 있는 판본으로 평가되었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친필본의 마모되고 확인불능 글자, 빠진 부분이 정확히 적혀 있으며, 전서본 제작 과정에서 누락된, 상관과 동료에 대한 이순신 본인의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008년 6월 현충사에서는 ‘충무공유사’의 번역문과 영인문의 합본을 간행하였다.
○ 난중일기 도난 사건
1967년 12월 30일에 아산 현충사 전시관에서 1.5mm 두께의 전시관 철문을 송곳으로 뚫어 너비 7cm, 길이 23cm로 도려내고 다이얼을 맞추어 문을 열고는 내부에 소장하고 있던 임진일기 전권과 임진장초, 서간첩을 훔쳐 달아난 것이 다음날인 12월 31일 아침 숙직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온양경찰서는 현충사에 임시수사본부를 마련하고 수사에 착수했고, 덕수 이씨 충무공파 직계와 방계간의 다툼에 초점을 맞추어 사건 발생 3일 전 온양에 왔고 사건 전후로 현충사를 자주 드나들었으며 평소 종친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다가 12월 중순에 불쑥 나타나 “난중일기 한 장만 떼어 팔아도 10만 원” 운운한 적이 있는 서울 거주 이재용 (당시 33세, 무직)을 연행하고 일본인으로 사건발생 얼마 전까지 온양을 자주 드나들었던 이와오 기요시 (岩尾淸, 당시 27세)의 수배를 내렸지만 도박판에 자주 드나들고 문중 안에서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 외에 이재용에게서 어떠한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자택에서 발견된 4만 원짜리 보증수표도 ‘난중일기’ 도난 사건과 연결지을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와오 기요시도 사건 발생 이틀 전 오전 11시에 출국한 사실이 확인).
사건 발생 당시 진해에 있었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보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에 이후락 당시 비서실장을 통해 “전 수사력을 동원해 범인을 잡으라”는 지시를 전달하고, 1월 8일에는 대통령 본인이 나서서 도난범에 대해 자수를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청와대 당국에서도 ‘난중일기’의 행방을 제보하는 자에 대한 포상과 함께, 범인에게는 “오는 1월 17일까지 자수할 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다”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1월 8일 오후 현충사를 방문한 문홍주 당시 문교부장관과 하갑청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은 경찰의 브리핑을 듣고 “전국에 산재한 개인 소장 국보가 난중일기와 같은 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국가에서 이를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금년내로 제정토록” 할 것을 발표했고, 같은 날 박보영 당시 치안국 수사2계장이 현충사를 방문한 데 이어, 다음날인 9일에는 치안국장 채원식이 현충사로 내려와, 초동수사의 미스가 원인이라는 분석에 따라 원점에서 다시 수사할 것을 결정했다. 전시관 철문을 부순 방법이 너무 우악스럽고, 아무렇게나 철문을 찢고 일기를 훔쳐서는 기왓장을 떨어뜨려가며 담을 넘어 도망친 범인의 행적을 두고 종친회 내부 인물보다는 단순한 초범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1월 9일 오전 11시에 부산시경 (당시 국장 정석모)에 ‘난중일기’가 부산 온천동에 있다는 제보가 접수되었다. 제보자는 부산 주민인 박정웅 (당시 30세)과 황규하 (당시 29세) 두 사람으로, 동래 온천장의 모 다방에서 우연히 국보 운운하는 사람들 (제보자 본인과 서로 안면은 있었음)의 이야기를 듣게 된 박정웅은 “요즘 자주 드나드는 수상한 사람들”이라며 아버지가 가리켜 말한 사람들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미행, 온천동 시장에서 “이렇게 하면 잡히기 쉽다”고 하는 데서 확신을 얻고, 당시 아버지가 드나들던 복덕방과 같은 사무실을 쓰던 온천표구사 사환 김영선 (당시 17세)을 중국집에 데려가 식사를 사주며 표구사 안에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에 난중일기 절취와 이동의 사실을 알아내고 부산시경에 신고했다. 부산시경 수사 3계 (당시 계장 박유수)는 정오에 표구상 주인 강찬순을 자택에서 검거해 자백을 얻어내고, 이어 4시 20분경 온천동 급행버스정류장에서 범행 주모자인 류근필 (당시 37세, 골동품상)을 검거하는데 성공하고, 밤 11시경 인쇄업자 이일환 (당시 35세)의 사촌형 이영환의 집 연탄창고에서 ‘난중일기’를 회수하는데 성공한다.
경찰 조사 결과 범행을 주동한 류근필은 이미 1966년에 통도사에서 동은사마법병을 훔쳐내 재벌 이 모씨에게 팔아넘긴 혐의로 9개월 징역형을 살고 나온 적이 있는 전과자였고, 출소 후 온천동의 모 다방에서 사기전과자 이남출 (당시 30세), 정선찬 (당시 35세)과 함께 “일본에 ‘난중일기’를 가지고 가면 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며 범행을 제의했으며, 이남출과 정선찬 두 사람은 범행 6일 전인 12월 24일에 현충사에 방문해 현지답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운 사실도 확인되었다. 1월 11일에 피의자들을 동반해 현장검증이 이루어졌는데, 범행 시간은 40분도 걸리지 않았으며 훔쳐낸 난중일기는 온천동의 류근필 자택에서 강찬순의 표구상으로, 부전동의 박훈태 (당시 33세, 인쇄업자) 자택에 맡겼다가 다시 부민동 3가 57번지의 이일환의 집에 맡겨두었는데 그 사이 이즈하라를 오가는 외항선원들을 매수하느라 많은 돈을 뿌린 사실도 확인되었다.
‘난중일기’ 도난 사건의 죄를 물어, 특수절도 및 문화재보호법 등 위반 등의 죄목으로 주모자 류근필을 포함, 이남출, 강찬순, 허세조 (당시 46세, 골동품상), 박훈태, 이일환 등 여섯 명이 검거되었고, 무직에 주거지가 정해져 있지 않아 도주한 뒤 수배령이 내려진 정선찬은 1월 13일 아침 7시경, 금정산 금강공원 중턱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극약을 탄 사이다를 통한 음독자살로 부검 결과 밝혀졌고, 사체가 발견되기 전날 금정산의 복수암으로 친형을 찾아가 “자수하던지 아니면 자살하겠다”며 2백 원을 받아간 것을 확인하였다. 범행 구상 단계에서 현충사까지 사전 조사를 왔다가 포기하고 물러나, 1월 9일에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에 범인의 신상을 제보한 김세명 (당시 32세)은 특별히 사면되었다. 박정웅과 황규하, 김세명 등 제보자 세 사람에게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금일봉 포상이 주어졌고, 부산시경 수사과 3계 김문오 경사 (당시 43세)와 문종황 (당시 42세), 이장길 (당시 30세), 동래서 송중학, 박재평 (당시 33세) 순경에 대해서도 1계급 특진과 함께 표창장이 주어졌다. 박정웅에게 범인들의 행적을 알린 표구사 사환 김영선에게도 1월 12일에 대통령의 금일봉이 전달되었고, 동래경찰서의 사환으로 특채되었다.
‘난중일기’ 도난과 수사, 범인 검거까지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경찰의 수사 태도가 언론에 의해 질타를 받았다. 1968년 1월 5일의 경찰의 1차 현장검증에서 사건 당일 현충사 숙직원이 순찰을 제대로 돌지 않았고, 범인이 현충사 뒤쪽 철망을 절단하고 도주한 사실을 확인했지만, 범행추정시간인 30일 오후 4시 30분에서 31일 오전 7시 사이의 시간과 신고된 시간 사이에 틈이 너무 길었던 탓에 초동수사가 미흡했다는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1월 8일의 2차 현장검증에서 경찰은 범행도구로 쓰인 뒤 버려졌을 도구들을 찾아 현충사 주변에서 탐색을 벌였지만 찾지 못했다. 또한 수사 초기 경찰이 유력 용의자로 보아 체포했던 이재용은 연행 이틀만인 1968년 1월 6일에 알리바이가 확인되어 방면되었지만, 이틀 뒤 경찰은 다시 이재용을 사기 및 도박 등의 혐의로 구속시키고, 성역 (현충사) 경내의 고사목 벌채 문제로 현충사 관리사무소와 감정이 좋지 않았던 동생 이재천 (당시 30세)도 산림법 위반으로 연행하여 무리하게 자백을 강요했다.
애초에 경찰은 덕수 이씨 충무공파 문중 내부의 감정대립이 사건의 원인이라 단정한 채 종친 관계에 집중해 수사를 행했지만,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며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또한 범인이 검거된 뒤 풀려난 이재용은 “누명을 벗어 기쁘기는 하지만, 하마터면 경찰의 육감수사에 희생될 뻔 했다”고, 확실한 증거 없이 심증만으로 수사를 강행한 당시 경찰의 터무니없는 수사 태도를 질책하기도 했다. ‘난중일기’가 발견된 곳이 이영환의 집이고 이영환이 범행 가담자 이일환과 사촌간이자 당시 부산지검 밀양지청 입회서기였다는 점에서 고위 관료가 이 사건의 배후에 연루되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으나 조사 결과 배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류근필 등 피의자 6인은 1월 16일 대전지검 천안지청으로 이송, 구속송치되었고, 21일 오전에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열린 재판 (당시 판사 최영도)에서 주모자 류근필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이남출은 징역 3년, 강찬순은 2년의 징역이 선고되었고, 박훈태는 1년 6개월에 3년 집행유예, 이일환은 10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는데 류근필 등 3인은 항소했고 이는 한 번 기각되었지만, 8월 31일에 열린 항소심에서 대전법원 형사항소부 (당시 재판장 최병규)는 주모자 류근필에게 원심 판결을 깨고 형량을 대폭 감한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한편 주모자 류근필이 골동품중개상이자 역사학도로써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동국대측이 나서서 “해당 인물은 본교 졸업은커녕 입학조차 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회수된 직후 ‘난중일기’는 부산대학교에 보관 중이던 영인본과 비교 대조 중에 서간첩 6장 세 통이 빠진 것이 확인되었고, 2월 3일에 강찬순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강찬순이 범행 과정에서 빼돌린 것을 강찬순이 검거된 뒤, 강찬순의 부인이 후환이 두려워 태워버리려 했으나 소각 직전에 모두 간신히 수습되었다.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옮길 것에 대해 덕수 이씨 충무공파 문중의 임원 30명은 결사반대하며 되찾은 ‘난중일기’를 아예 창고에 넣고 봉해버리기도 했다. 국보가 국외로 유출될 뻔한 사태를 겪고 난 뒤, 대통령 지시로 5백 부가 영인되어 전국 공공도서관 및 박물관으로 보내졌으며 원본 열람 자체가 금지되었다.
○ 난중일기의 번역

‘난중일기’의 가장 오래된 국역본은 1960년 4월에 이은상이 친필본의 원문교열을 마치고 문교부에서 간행한 ‘이충무공난중일기’라는 제목의 국역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보다 앞서 1953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 설의식이 수도문화사에서 간행한 ‘이순신 수록 (手錄) 난중일기’의 존재가 알려졌다. 2년 뒤인 1955년 11월 30일에 북한에서 월북문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리순신장군전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평양 소재 국립출판사 주필을 맡고 있던 이상호가 5천 부를 간행하였다.
홍기문의 번역은 신문관본과 통영본, 두 개의 ‘이충무공전서’ 판본을 기초로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를 토대로 하여 번역한 것으로, ‘이충무공전서’의 내용 가운데 충무공의 저작이 아닌 것을 삭제하고 번역하였다. 홍기문은 이 번역본에서 “친필본보다 전서본이 간략하게 된 것은 윤행임이 삭제하고 이두문을 임의로 수정한 것이다.”라며, 난중일기의 판본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홍기문의 번역은 친필본과 전서본의 최초의 합본 번역이라는 의의가 있지만, 북한에서 발행한 덕분에 북한 사투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친필본 ‘난중일기’를 확인하지 않은채 활자본만을 토대로 번역해 친필본의 미상, 오독 부분을 밝혀내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있었다 (이후 중간본이 간행).
이은상은 1960년 난중일기 간행본에서 “공의 초고와 전서 중의 채택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10월 7일까지만 남아 있던 무술일기의 빠진 부분을 장예초본 별책 (‘충무공유사’ 일기초)에서 10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친필 일기초 2면을 찾아내 수록했고, “공의 친필초고를 완전 채록했다”고 자부하였다 (다만 이은상은 장예초본 별책이 ‘충무공유사’ 일기초와 동일한 것임은 몰랐다). 이은상이 ‘난중일기’를 번역한 1960년 부산대학교에서 총장 윤인구에 의해 충무공연구실이 설치되어, 당시 친필 난중일기 초고 7책 215장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당시 경무대 (청와대)와 부산대 도서관, 현충사에 각각 한 부씩 비치했었다.
1968년에 이은상이 번역한, 친필본과 전서본이 합본된 ‘난중일기’가 현암사에서 크라운판 (版)으로 간행되었다. 공교롭게도 지문각에서 이석호가 역주한 ‘난중일기’도 이은상 번역본과 같은 날 (1968년 4월 2일)에 발행되었는데, 이석호 역주본은 갑오년 7월 13일과 병신년 8월 2일, 정유년 7월 2일 등 전체 분량 가운데 126일치가 빠졌고 이순신이 지은 한시가 부록되었고, 가격도 현암사판 (8백 원)보다 저렴한 390원이었다. 한편 이은상 번역본 ‘난중일기’는 원문과 함께 ‘난중일기’ 속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대조해 표로 정리한 것을 부기하였다.
한편 2004년부터 문화재에 대한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난중일기 원문과 원본사진이 국가기록유산에 게재되고, 친필본 탈초와 원문 해독을 맡았던 노승석이 10여 곳의 오류를 발견하였다. 노승석은 자신이 발견한 오류의 수정을 반영하여 2005년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동아일보사)을 출간하였고, ‘충무공유사’ 해독 과정에서 찾아낸 32일치를 첨가한 표정교감본 임진일기를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를 통해 2007년 3월에 간행하였다. 5월에 박해일 교수 외 3인이 친필본을 활자로 옮긴 ‘이순신의 일기초’를 간행하였는데, 원문에 구두를 넣지 않았고 본서 속에 수록된 장계와 서간문의 출처를 밝히고 내용과 형식을 친필본 형태로 상세편집하였다.
○ 문학으로써의 난중일기
5만 명의 조선 군민이 왜병과의 분전 끝에 몰살당한 제 2차 진주성 싸움 (1593년)이 있었던 해에 쓴 ‘계사일기’ 7월 2일자에서 이순신은 진주성 (晋州城)이 왜병에 포위되어 위태롭다는 소식을 김득룡으로부터 전해 듣고 놀라고 걱정스럽다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부정하는 투로 적었지만, 7월 6일에 광양으로부터의 보고를 통해 진주성 함락의 소식을 전해듣고, 9일에는 광양과 순천이 왜병에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이어지고 난 뒤에 “이 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색을 이루었고,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었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고 썼다. 소설 ‘칼의 노래’ (2001년 발행)를 발표한 한국의 소설가 김훈은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다”는 이 ‘난중일기’ 문장을 두고 “이것은 죽이는 문장입니다. 슬프고 비통하고 곡을 하고 땅을 치고 울고불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었다는 그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죠. 거기에 무슨 형용사와 수사학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연 수사학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죠. 내가 사랑하는 주어와 동사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에 입각해 있습니다.”라 평했다.
이순신은 또 일기에다, “오늘 어떤 녀석이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고 썼습니다. 기막히지요.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게 목을 베었다는 거지요. 그것이 그가 글을 쓰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완강한 사실에 입각하는 것이죠.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 머리를 베어서 장대에 끼워서 성 앞에 걸었다. 그래놓고 그 다음 문장을 계속 써요.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해군들은 바람 부는 게 가장 큰 문제죠. 배들을 바닷가에 나란히 자동차 세우듯이 대놓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배들이 서로 흔들려서 배들끼리 부닥칩니다. 바람이 불면 해군은 배를 끌어서 뭍 위로 올려놔야 배가 부숴지지 않죠.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자는 병사들을 깨워서 물가로 내려 보내서 배를 끌어올리라고 지시했다”고 씁니다. 이 부하 놈 하나를 죽였다는 것 그게 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써버립니다. 수사, 형용사, 부사가 하나도 안 나오고 밋밋하고 재미가 없지만, 부하를 죽였다는 문장과 바람이 불었다는 문장 사이에서 그의 문장은 삼엄한 긴장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아주 전압이 높은 문장입니다. 볼트가 높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문장입니다. 만지면 전기가 올 것처럼 찌르찌르하는 문장이죠.
○ 한국어 번역

현암사 《난중일기》 이은상 역, 1968년
1984년과 1993년에 현암신서 제34권으로써 다시 간행(역자는 동일)
지문각 《난중일기》 이석호 역, 1968년
금자각 《국보 76호 난중일기》 이찬도 역, 1969년
삼중당 《삼중당문고78 난중일기》 1975년
1986년 다시 베스트북스 제119권으로써 간행 (역자는 동일)
동서문화사 《동서문고25 난중일기》 1977년
고정일이 역해한 《난중일기》가 같은 출판사에서 2014년 간행
경문출판사 《한국고전 난중일기》 이웅렬 역, 1977년
대학서림 《난중일기》 1977년
범우사 《난중일기》(범우에세이선88) 이민수 역, 1979년
2007년에 범우문고239 수필부문에 포함 재간행(역자 동일).
《이충무공 진중일기》 임기봉 역주해, 2007년
천자문출판사 《난중일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웅렬 역, 1980년
큰손 《난중일기》 한창수 역, 1982년
문공사 《자이언트문고21 난중일기》 1983년
마당 《마당문고79 난중일기》 1984년
일신서적공사 《난중일기》 신동호 역주, 1987년
1995년에 《한국남북문학100선》제55권으로써 재간행(역자는 동일).
학원사 《난중일기》(한권의책150) 장홍재 역, 1989년
1994년에 한권의책72로 재간행(제목 및 역자 동일).
집문당 《이충무공의 난중일기》 이석호 역, 1993년
학민사 《새번역 난중일기》 최두환 옮김, 1996년
한양출판 《한양고전산책11 난중일기》 허경진 역, 1997년
혜원출판사 《hae wan world best 48 난중일기》(김중일, 윤광원 역주) 1999년
소담출판사 《베스트셀러고전문학선7 난중일기》 설중환 편집, 2003년
서해문집 《난중일기 – 임진년 아침이 밝아 오다》(오래된책방07), 송찬섭 엮어 옮김, 2004년
행복한책읽기 《평역 난중일기》 김경수 역, 2004년
동아일보사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역, 2005년
중앙북스 《난중일기 – 인간 이순신을 만나다》 허경진 역, 2008년
2014년에 다시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 간행(역자는 동일)
하서출판사 《난중일기》(하서명작선43) 박광순 역해, 2010년
민음사 《교감완역 난중일기》 노승석 역, 2010년
돋을새김 《평역 난중일기》(푸른책장시리즈19) 김경수 편저, 2011년
지식공작소 커뮤니케이션북스 《난중일기》 2014년
올재 《난중일기》(올재클래식스46) 2014년
도서출판 여해 《교감 완역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2019년 11월 25일
번역·지명 오류를 해결한 것으로, 《교감 완역 난중일기》(도서출판 여해, 2016년 12월 26일)의 개정판이다.
유적지 사진을 실은 《난중일기 유적편》(도서출판 여해 2019년 10월 15일)도 출간했다.
도서출판 여해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2021년 3월 22일, 원문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더클래식 《난중일기》(동양고전컬렉션13) 김문정 옮김, 2015년
* 저자소개 : 조선의 무관, 충무공 (忠武公) 이순신 (李舜臣, 1545 ~ 1598)
이순신 (李舜臣,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었다. 본관은 덕수 (德水), 자는 여해 (汝諧), 시호는 충무 (忠武)였으며, 한성 출신이었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 (선조 9년) 무과 (武科)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함경도 동구비보권관 (董仇非堡權管), 1581년 발포 수군만호 (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가 전라좌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절한 일로 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후 1583년 남병사의 군관과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 1586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 (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로 부임했다. 조산만호 겸 녹둔도사의 재직 중 1587년 (선조 20년) 9월의 여진족의 사전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패하여, 북병사 이일의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 (白衣從軍)하는 위치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두번째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승전, 복직하였다. 그 뒤 전라관찰사 이광 (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을 역임했다. 1589년 정읍현감 재직 중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 (高沙里僉使)가 되고, 절충장군 (折衝將軍), 만포진첨사 (滿浦鎭僉使), 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 (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 (加贈)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 (中郎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 (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 (李邊)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 (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 (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 이순신 (李舜臣)
.출생: 1545년 4월 2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
.사망: 1598년 12월 16일 (53세), 조선 경상우도 노량해협
.국적: 조선
.본관: 덕수
.자: 여해 (汝諧)
.호(號): 기계 (器溪), 덕암 (德巖)
.시호: 충무공 (忠武公)
.부모: 부) 이정 (李貞), 모) 변수림의 딸 초계 변씨 (草溪卞氏)
.배우자: 방진 (方震)의 딸 상주 방씨, 첩) 해주 오씨 (海州 吳氏), 첩) 부안댁자녀정실 부인 상주 방씨 소생
자녀: 장남) 이회 (李薈), 차남) 이열, 삼남) 이면 (李葂), 장녀, 첩 해주 오씨 (海州 吳氏) 소생 – 서자) 이훈 (李薰), 서자) 이신 (李藎), 서녀들
* 군복무
.소속: 조선군
.복무 기간: 1576 ~ 1598년
.주요 참전: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사건 / 임진왜란 – 옥포 해전,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 한산도 대첩, 안골포 해전, 장림포 해전, 화준구미 해전, 다대포 해전, 서평포 해전, 절영도 해전, 초량목 해전, 부산포 해전, 웅포 해전, 제2차 당항포 해전, 장문포 해전 / 정유재란 – 어란포 해전, 벽파진 해전, 명량 해전, 절이도 해전, 왜교성 전투, 노량 해전 (전사)
.서훈 내역: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덕풍부원군, 증 (贈) 좌의정, 가증 (加贈) 영의정
.사당: 현충사
이순신 (1545 ~ 1598)은 1643년 (인조21년) 3월 ‘충무 (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요한 해전을 치루며 왜선 320척을 격파했다. 49세 때 그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3세 때 원균 일파의 모함과 상소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출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척의 왜선과 맞서 싸웠고 (명량대첩), 54세 때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하였다. 6년 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됨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 (忠武)’란 시호가 내려져 역사에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 생애
– 어린 시절
1545년 4월 28일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 (李貞)과 초계 변씨 (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정은 자신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주었고, 셋째 아들이었던 그에게는 순신 (舜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증조부 이거는 정언, 이조좌랑, 통덕랑 수 (守)사헌부장령, 1494년 연산군이 세자시절 세자시강원보덕 등을 지내고, 연산군 즉위 초에는 통훈대부 (정3품 당하관)로 승진, 장악원정, 한학교수를 지냈으며, 연산군 초에 춘추관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순천도호부사, 행호군을 거쳐 최종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조부 이백록은 중종 때 평시서봉사를 지냈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광조와 가깝게 지내던 중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이후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 이정은 관직에 나가지 않아 그의 집은 넉넉하지 못했다. 뒤늦게 무관이 된 아버지 이정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1573년 (선조 6) 병절교위를 거쳐 1576년 (선조 9) 종5품 창신교위를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초계변씨는 생원 변함의 딸이었다.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벗이기도 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류성룡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 (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 무과 급제
1565년 이순신은 방씨 (方氏)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 (武科)를 준비하였다. 28살이던 1572년 (선조 5년) 훈련원 별과 (訓錬院 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낙마하여 기절하고 깨어나 보니 시험이 끝나있어서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고 집으로 갔다.
4년 뒤인 1576년 (선조 9년) 그의 나이 32살에 식년시 (式年試) 무과에 병과 (丙科)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 (權知訓練院奉事, 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님)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훈련원 봉사 재직 중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추천하는 병조정랑 서익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뒤 36세가 되던 1580년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 (水軍萬戶)로 전근되었다. 발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이다.
발포수군만호 재직 중 전라좌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다가 전라좌수사 성박 (成博)의 미움을 받았다. 성박은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게 했지만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 하여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성박은 후임자에게 이순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남겼고, 후임 전라좌수사 이용은 이순신을 밉게 보았다. 이용은 좌수영 관하의 다섯 포구인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진을 점검하였다. 이때 다른 4개의 포구 이탈자는 보고하지 않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3명만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하자, 이용은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다. 이용은 그의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는데, 전라도도사 (都事)로 재직 중이던 조헌 (趙憲)은 고과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며 항의하여 수정하게 했다. 나중에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본 이용은 생각을 바꾸어, 함경남도 남병사로 전근한 뒤 1583년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하기도 했고,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하였다.
1582년 1월 발포만호로 재직 중일 때 서익이 군기경차관으로 고흥군에 왔다. 이때 서익은 발포진을 찾아가 군기보수 불량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켰다. 그러나 곧 복직하였다. 1583년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추천을 받아 남병사의 군관이 되었다가, 1583년 8월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되어 나갔다.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 (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 (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 (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한편 그를 유심히 지켜본 병조판서 김귀영은 1579년 자신의 서녀를 그에게 첩으로 주려 하여 불렀다. 그러나 어찌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느냐며 그 제의를 거절했다.
– 녹둔도 전투, 첫 번째 백의종군
1587년 (선조 20년) 조산보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그해 9월 1일 이순신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사전에 화살과 병기류를 숨겨놓고 있다가, 기습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녹둔도 전투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서 싸웠고 그 결과 승리했으며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당시 조산만호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및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 (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를 북병사 이일 (李鎰)은 녹둔도 함몰이라고 비판하였다. 처음부터 군사 10명이 피살되고 10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말 15필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가 많았다 하여 이 녹둔도 사건으로 인해서 함경도 북병사 이일 (李鎰)의 비판으로 문책받고 그해 10월 해임, 결국 투옥되었다. 북병사 이일은 이경록과 이순신을 투옥한 뒤, 1587년 10월 10일 “적호 (賊胡)가 녹둔도의 목책 (木柵)을 포위했을 때 군기를 그르쳤다”고 장계를 올려 이를 보고하였다.
이일은 장계를 올려 사건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경록과 이순신을 군율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경록 등을 변호한 이는 이억기 등 소수였다. 10월 16일 선조는 한번의 실수로 사형은 과하다며, 북병사에게 장형 (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 (白衣從軍)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조정에서는 백의종군하게 하여 입공자속 (立功自贖)할 기회를 주라고 권고하였다.
명백히 이순신은 싸워 이긴 것이며 모든 잘못이 이일 혼자에게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일이 신립과 친분이 깊다는 점 때문에 신립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일에게 처벌하지 않고 이순신에게 처벌했다.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1588년의 2차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 (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 무관 생활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 (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助防將) · 선전관 (宣傳官) 등이 되었다. 1589년 (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 (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 (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 (柳成龍)이 천거하여 이순신은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조정에서는 그를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 · 이억기 · 양응지 · 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선조는 신하들의 반발과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을 써서 1591년 2월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 (珍島郡守)로 승진시켰고, 그가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 (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전임하게 하였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과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순신을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혔다. 그는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붙였다.
1591년 이순신은 47세에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 (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 (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와 같은 선조의 결정을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부임지에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고자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였으며,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고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 이순신은 왜는 섬이니 왜군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대하여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감독아래에 있던 전라좌수영은 20여 척 (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 임진왜란
1592년 (선조) 5월 1일 (음력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왜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 (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5월 26일 (음력 4월 16일) 밤 10시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 (黄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6월 8일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의 함선은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9일 (음력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선조는 1593년 (선조 26) 9월 21일에 한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몇번을 주저하다가 1593년 10월 1일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옥포 해전
옥포해전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이다. 6월 16일 (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왜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 (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 (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 (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반도의 대부분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었다.
.사천 해전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7월 8일 (음력 5월 29일)에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노량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왜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바로 사천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두번째 출동하여 벌어진 첫 번째 전투였고, 또한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전투다.
이순신 함대는 7월 10일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는데, 왜군이 보유하던 화포에 비하여 성능이 우수한 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7월 12일 (음력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13일 (음력 6월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 크기의 배 0척 작은 크기의 배 100척을 공격하였다. 16일 (음력 6월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 대첩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 (선조 25) 8월 14일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왜나라의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이순신 함대는 8월 10일 (음력 7월 4일)에 출발하여 12일 (음력 7월 6일)에 노량이르렀고, 이곳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 때 적선이 출몰하였다는 첩보를 얻어 14일 (음력 7월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의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 다음, 모든 군선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을 발포하여 적함선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으로 적함을 깨뜨린 뒤 적함의 갑판에서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8월 15일 (음력 7월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6일(음력 7월 10일) 학익진을 펼친채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일본군은 조선의 용맹한 군인들에게 꼴이 상한채 돌아갔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 (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 (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부산 해전
음력 8월 말 이순신의 함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여 그날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왜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이렇듯, 네 차례의 큰 싸움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하여 보급로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네번의 전투를 거치는 중,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원균과의 불화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이원익 (李元翼)이 체찰사로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반듯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러한 두 인물에 대한 입장차이가 심하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 (휴먼 앤 북스 펴냄) 에서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산채로 매장한 최악의 제독으로 평가한다.
.웅포 해전
이순신 함대는 1593년 2월 10일 (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왜의 수군은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다. 조선수군은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싸움은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며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음으로써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전라도 수군은 정병 상하번 외에 보인까지 총동원, 4만여 명 (충무공 장계)을 웅포 해전과 전라도 해안선 방어에 투입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 (鎭海), 가덕도 (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다. 한편, 왜의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든든한 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은 함락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 두 번째 백의종군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4월 11일 (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4월 19일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 (鄭琢)의 상소로 5월 16일 (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 (舊 여천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5월 26일 (음력 4월 11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소식은 4월 13일에서야 종 순화를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슬픔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졌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경림군 (慶林君) 김명원 (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 (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10월 9일 (음력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 임진왜란 종전과 전사
.명량 대첩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 밖에 되지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 (右水營) 앞바다인 임하도 (林下島)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나 피해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을 통해서 조선 수군은 중.후반부터 화전 (火戰)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제사가 적의 선봉대중 30여척을 격파하였지만 명량대첩비에는 50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격파된 왜선은 30여척보다 많을것으로 파악된다.
“破賊船五百艘 斬其將馬多時” “적군의 배를 쳐부순것이 오백척이며 그 장수 마다시를 베었다” (명량대첩비)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豐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 전사
1598년 음력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 6천명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 (陳璘)과 함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세. 낙안군수 방덕룡 (方德龍), 가리포첨사 이영남 (李英男)과 명의 장수 등자룡 (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왜란은 끝났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 사후 관직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宣武)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 (德豐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 (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 (碑)를 세웠다. 1688년 (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 가계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 (楓巖公)은 중종 17년 (1522년)에 생원 2등에 합격하였고 참봉을 거쳐 평시서봉사를 역임하였다. 조광조 (趙光祖)가 기묘사화 (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당한 뒤 벼슬을 내놓고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은거를 하다가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 (즉 이순신의 아버지) 정 (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에 가까운 충청도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다. 훗날 상주 방씨 (온양 방씨)와 혼인한 이순신이 정착한 곳이기도 한 현충사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고 덕수 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내는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 (卞氏)의 문기 (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인 요신 (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8명을 증여 받았으며, 충청도 은진 (恩津,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지방에 있는 가옥과 토지도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2년에 아내 상주 방씨 (온양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현충사 경내에 있는 고택 역시 이순신이 자신의 할아버지 백록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알려졌다.

증조부 : 이거 (李琚)
조부 : 이백록 (李百祿)
부 : 증 덕연부원군 (德淵府院君) 이정 (李貞, 1511년 ~ 1583년)
모 : 증 정경부인 초계 변씨 (草溪卞氏, 1515년 ~ 1597년) – 변수림 (卞守琳)의 딸
형 : 이희신 (李羲臣)
조카 : 이뇌 (李蕾)
조카 : 이분 (李芬)
조카 : 이번 (李蕃)
조카 : 이완 (李莞)
형 : 이요신 (李堯臣)
조카 : 이봉 (李菶)
조카 : 이해 (李荄)
동생 : 이우신 (李禹臣)
장인 : 증 통훈대부 (通訓大夫) 방진 (方震) – 온양 방씨 22세손
부인 : 정경부인 상주 방씨 (尙州 方氏; 온양 방씨)
장남 : 이회 (李薈)
차남 : 이열
삼남 : 이면 (李葂)
장녀 사위 : 홍비 (洪棐) – 청난공신 홍가신 (洪可臣)의 아들
첩 : 해주 오씨 (海州 吳氏)
서자 : 이훈 (李薰)
서자 : 이신 (李藎)
서녀 사위 : 임진 (任振)
서녀 사위 : 윤효전 (尹孝全)
첩 : 부안댁 (이름 없음)
○ 인물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벗이기도 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그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 (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은 완벽주의자로 뭐든지 철저함을 추구했다. 한산도 대첩 하루 전 군무이탈을 감행한 부하 수졸 황옥현을 붙잡자마자 바로 참수하여 효수해 군기를 보존한 반면 부하들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 하지만 도망치려 하면 죽는다는 必死則生必生則死을 강조하여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부하들이 잘하면 포상에 아낌이 없었다. 또한 자신의 군공보다는 아군의 승리에 더 관심이 깊었으며 이 때문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권율에게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의 일부를 제공했으며 권율은 이순신에게 제공받은 이 무기들로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용모에 대해서는 이순신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없고 그의 얼굴을 묘사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제독의 복식이나 이순신 제독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 평가
사후부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걸쳐 이순신은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이다.
– 국내 이순신의 평가
.선조
‘졸서후사제문’ (卒逝後賜祭文)에서도 똑같이 그 잘못을 사죄하는 듯한 말을 남기며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라고 추켜세웠다.
.류성룡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평하였다.
.오윤겸
제문에서 그는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올 수 없음을 생각하고 백 명을 대신 바치고도 몰려올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고 평하였다.
.홍석주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관음포의 이충무공전몰유허 (李忠武公戰歿遺墟)에서 홍석주는 이순신을 중국의 제갈량에 빗대어 칭송하고, 제갈량이 병사한 뒤에는 촉한이 위태롭게 된 것과는 달리 이순신은 오히려 그가 남긴 공적 덕분에 지금 (홍석주가 살아 있었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직 (社稷)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며 이순신의 공적을 치켜세우고 있다.
.근현대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천관우) 등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았다.
– 국외 이순신의 평가
다음은 이순신에 대한 국외의 인물들이 내린 평가다.
참고로 일본어 위키백과 이순신 문서에 의하면 도고 헤이하치로의 발언은 일본에 직접적인 사료가 남아있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실업가 이영개가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퍼트린 얘기라고 기술되어 있다.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 (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 (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 (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 (George Alexander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 도고 헤이하치로 (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제독은 나의 스승입니다. 실로 존경할 만한 인물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 (藤居信雄) 著 ‘이순신각서’ (李舜臣覚書)》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회고록에서
명나라 만력제는 이순신의 공을 높이 사서 이순신 생전에 명나라 정1품 대명수군도독 (大明水軍都督)을 제수한다. 동아시아에서 육군을 수군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명나라 품계에서 수군에 도독 (정1품)이 없고 제독 (종1품)만 있는데, 굳이 “정1품” “수군도독”이라는 명예직을 제수하였다.
○ 주요 저서

이순신은 일기와 시조, 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들을 남겼다.
충무공이순신전서 (忠武公李舜臣全書)
난중일기 (亂中日記)
임진장초 (壬辰狀草)
○ 관련 문화재
대한민국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문화재와 사적이 8개가 있다.
이순신 유물 일괄 (보물 제326호)
아산 이충무공묘 (사적 제112호)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113호)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114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232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사적 제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안에는 현충사가 있다.
남해 충렬사 (사적 제233호)
통영 충렬사 (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 (사적 제381호)
여수 석천사
정읍 충렬사
순천 충무사
○ 유적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옛집은 이순신 제독이 혼인 후 살고 그 후 종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덕수 이씨 충무공파의 종가집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