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1-2)
서론(I) 왜 신앙과 신학은 인문학적 이해가 필요한가?
신앙, 신학 그리고 인문학
교회안에서 자란 목회자들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 마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다. 상식이란 모든 사람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인정하는 보편성을 기준으로 한다. 즉 인간이라면 대다수가 인정하는 지식이나 윤리, 사회규범 등 보편적인 판단력이나 사리분별이다. 그런데 유독 이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 바로 종교인, 그 중에서도 목회자그룹이라고 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속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보편적인 지식이나 교양, 가치 체계와 소통할 수 없다는 뜻이며, 나아가서는 사회에 배타적이고 대립하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신 중심’ ‘신본주의’를 외치는 자들일수록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보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자기 독단과 편협함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안수, 안찰이 라는 신앙행위를 통해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경우까지 매스컴 보도를 통해 접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는 안타깝게도 교회안에 미신이 판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인터넷에 떠도는 설교를 보면 버젓이 김XX 목사는 “십일조를 안하면 암 걸린다”라고까지 설교한다. “일본과 네팔이 지진이 난 것은 우상을 많이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들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극단적인 신앙주의에 빠지면 맹목적이 되어 상식이 마비되고, 인간의 합리성과 비판적 이성은 신앙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맹목적인 신앙에 빠진 자일수록 소통이 어렵고 편협한 자기 경험의 주관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는, 이처럼 신앙을 갖는 데에 인간의 이성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질문은 신앙을 오히려 병들게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필자가 짐작하기로는 신앙은 “의심없이 믿어야 하는 것”인데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은 신앙을 병들게 할 수 있다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신앙의 근거는 지식(Knowledge)이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소위 겸손한 태도를 가진 무지를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요 17:3)이지,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그들 교회가 ‘맹신’이란 것으로 어떤 미로를 만들어 냈는가를 우리는 안다. 무엇이든지 -가장 무서운 오류까지도- “교회”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 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든다. 이런 경솔한 맹신이 파멸 일보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신앙이다”라는 조건만 붙으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암흑을 광명인 것처럼 무지를 바른 지식인 것처럼 착각한다.(칼빈, ‘기독교강요-중’, 19)
칼빈은 중세교회의 ‘미신적 맹신’은 바른 신앙이 아니고 바른 신앙은 성서의 내용에 기초한 바른 지식, 즉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신뢰하고 그의 인격과 삶을 바로 깨닫고 따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오히려 잘못된 맹신과 무지한 경건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장과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볼 때 인문학은 바른 신앙과 신학에 접근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다준다.
인문학과 기독교와의 만남
신앙과 신학하기 등의 행위가 ‘신 중심’ ‘교회중심’이라는 단일한 사고에 빠지거나, ‘신령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마치 세상과 사회와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있다. 사실 초대교회 때는 임박한 종말의식으로 인해 세상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승천하신 예수가 곧이라도 다시 올 것이라는 종말의식은 세상에 대해 초연하게 했다. 그들은 곧 다가올 하나님 나라가 오면 이 세상나라는 다 무너져 버릴 것이기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고 순교를 할 수 있었고, 불타 없어질 세상과 현재의 통치 질서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의한 사회구조와 사회악에 대해서도 개혁의지를 가지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초대교회는 ‘세상’을 멸망할 것으로 보고 또 자신의 낙관주의를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지상의 세계를 패배주의적 시각으로 보았다. 이러한 소망이 약해기지 시작하고, 교회가 정치적, 경제적 생활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오자 기독교적 이상이란 이름아래 기존의 사회관습과 관계들에 대해 도전하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114-15).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내려오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소극적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후 100년이 지나도록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12) 약속한 임박한 종말론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초대교회의 이러한 신앙양태와 문화는 지금까지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가르는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세상에 대한 성도들의 육체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은 ‘불신앙’의 표출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욕망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다 버려야 할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필자도 초보신앙을 가졌을 때 가졌던 생각은, 모름지기 신앙이 깊은 사람은 세속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인간의 모든 욕구를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묵상하는 수도자가 가장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한국교회의 이원론적 신앙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신앙주의’ ‘신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돈과 물질’ 등 세상의 욕심에 더 집착하는 것은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기독교 신앙을 신과 인간의 대립, 교회와 사회의 분리라는 틀로 바라보는 ‘신앙 제일주의’는 바른 신앙일 수 없다. 인문학은 신과 인간이 함께 가고, 교회와 사회는 소통해야 하며, 바른 신앙은 상식이 통하고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중세의 안셀무스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특별히 더욱 성서를 해석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수함에 있어서 인문학적 소양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서는 보통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읽는다고 모든 내용이 쉽게 이해되거나 해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통찰력 및 건전한 인간 이성이 필요하다. 오히려 신학적 기반도 없는 사람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성서해석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많은 경우에 있어 이단 사이비들의 가르침이 여기에 해당된 다고 할 수 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기독교신앙을 가진 자들은 성서를 해석하고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인문학적 소양의 확대를 통해 다양한 지평을 경험할 수 있다. 사실 성서 자체도 인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성서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보다 인간자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통해 인간을 발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고 성서의 핵심 메세지인 예수가 전한 하나님나라와 인간구원이 무엇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창조시 기대했던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인문학적 접근과 독서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지게 하고, 성서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실제 경제학과 사회학에 관한 독서는 경제와 신학이 얼마나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경제문제와 사회문제가 신학과 신앙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 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실제 사회, 경제학 책읽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뒷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탐욕의 정체에 대해서 깊이 있는 깨달음을 갖게 해 주었다. 사실 인간의 탐욕의 문제는 신학적 주제인 인간의 욕심과 죄라는 신학적 주제와 맞물려 있고 최근 한국사회에서 이슈되고 있는 ’정치문제’가 결국 탐욕과 경제문제가 신앙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해주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시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무신론이나 타종교에 대한 이슈보다도 우상숭배에 대한 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한국교회는 ‘돈’이라는 ‘우상’에 잠식되어 있다.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면서 ‘돈’이라는 ‘우상’을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교회들이 부지기수다. 이러한 것들을 인문학과 경제학 공부를 통하여 현대 기독교가 어떻게 돈에 잠식되어 왔는지 깨달을 수 있다. 사실 성서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유리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이었다.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울부짖던 백성들의 피울음을 들으시고 수탈과 착취의 구조로부터 평등의 삶으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기본적인 성서읽기를 무시하고 출애굽을 ‘영적’인 것으로만 치환해서 해석하는 무지는 인문학적으로 성서를 읽는 눈이 없어서이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성서가 전하는 해방과 평등, 그리고 자유의 메세지에는 눈을 감고 ‘가나안’을 단지 신자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만 대치해서(아이러니하지만, 사실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 전하기에 급급하다. 또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질병을 고치거나 개인의 성공과 부의 획득이 주어진다는 세속적 욕망의 도구로 희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백화점 왕(존 워너메이커)’이 되고, ‘석유 왕(록펠러)’이 되고, ‘철강 왕(앤드류 카네기)’이 된다고 오히려 잘못된 신자유주의 경제의 구조악을 신앙의 성공인양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행위는 단지 세속적인 부를 획득하거나,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고상하고 숭고한 목적이 있다. 거기에는 단지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 보험을 드는 행위로서의 신앙도 거부한다. 이처럼 인문학적 사고가 없는 신앙과 신학은 단지 머리만을 변화시키거나, 가슴만을 뜨겁게 하는 데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탐구하고 알아가는 학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들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다시 말해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 이해가 없는 신앙과 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깊이 있고 균형잡힌 이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에 눈을 뜨고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야 말로 인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대학 Director)
ks.joo@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