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번째 잡기장 (71) _ 10월 7일자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호주는 봄을 맞았지만 한국은 가을이다.

성재림 작가가 엮은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성재림 저, 루이앤휴잇 출판, 2017년 11월 17일)에는 단풍잎 고운 가을날 마주하는 그리운 사람, 사물에 관한 아름다운 기억들을 노래한 이들의 글을 오롯이 담았다. 이효석, 이태준, 김기림, 김유정, 이상 등 우리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열일곱 명이 쓴 가을에 관한 글들을 모은 산문집이다. 이 책 여기저기에 그들이 전하는 가을의 낭만과 서정이 잘 그린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며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래전 가을날 마주했던 그들의 ‘낭만’과 ‘고독’ 역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책을 읽다 보면 때로는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치와 발랄함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진한 여운이 남지 않는 것이 없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적지 않은 감동에 빠지게 된다.
삶의 속내를 드러내는 잠언 같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라는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그들의 글 속에는 평생을 글쟁이로 살아왔던 그들의 지난했던 삶과 철학이 잔잔하게 녹아 흐르고 있다 하겠다.
이 책 속에는 이런 글들이 있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중에서
“지내놓고 보면 결국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였고 객물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마음의 설렘을 비웃는 듯이 모든 것은 그대로다. 수목도 그대로요, 교실도 그대로요, 수업도 여전히 계속된다. 마음에 비길 때, 객물은 항상 침착하고 냉정하고 더디다. 문밖에서 아무리 설레든 간에 가을 교실에는 가을의 수업이 있을 뿐이다.” – 이효석의 「미른의 아침」 중에서
“코스모스! 그 가여운 소녀 같은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서 높아가는 가을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아, 벌써 가을이 온 것입니다. 바람 맑고, 기운 맑고, 하늘 맑고, 물 맑고, 사람 머리까지 맑아지는 때가 왔습니다.” – 방정환의 「코스모스의 가을」 중에서
“애연한 봄 마음에 흐르는 슬픔과 청징한 가을 마음에 흐르는 슬픔은 맛이 퍽 다르다. … (중략) … 가을의 슬픔은 봄의 슬픔과 같이 사람을 마취케 하는 슬픔이 아니라 여름 더위의 끈끈한 땀에 기운 잃은 세포를 올올이 씻어 주고 더위에 잠겼던 마음을 씻어 주는 쾌락을 일으킨다.” – 회서해의 「가을을 맞으며」 중에서
“국화를 위해서는 가을밤도 길지 못하다. 꽃이 이울기를 못 기다려 물이 언다. 윗목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으면 방안은 더욱 향기롭고 품지는 못하되 꽃과 더불어 누울 수 있는 것, 가을밤의 호사다. 나와 국화뿐이려니 하면 귀뚜리란 놈이 화분에 묻어 들어왔다가 울어대는 것도 싫지 않다.” – 이태준의 「가을꽃」 중에서
“가을이 오면 밝은 낮보다 캄캄한 명상의 밤이 귀엽다. 귀뚜라미 노래를 들을 때 창밖의 낙엽은 은은히 지고, 그 밤은 나에게 극히 엄숙한 그리고 극히 고적한 순간을 가져온다.” – 이유정의 「나와 귀뚜라미」 중에서
“램프 불을 낮추고 어렴풋이 눈을 감아본다. 그러다가 허공에 둥실 떠올라 중심을 잃고 몸이 삐끗하였을 때, 그만 아찔하여 눈을 떠보니, 석 점이 되려면 아직 5분이 남았다. 넓은 뜰에서 허황히 뒹구는 바람에 법당 안 풍경이 은은히 울려온다. 아아, 가을밤은 왜 이리도 깊을까. 더디게 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 김유정의 「밤이 조금만 짧았다면」 중에서
“고독이 찰지게 두고 스며들 때는 여행이라도 하여 보면, 시원할 듯이 문득 생각되면서도 차마 그것을 실행하여 그 찰지게 파고드는 고독을 아주 잊고 싶지는 않다. 고독이란 그 무슨 진리를 담은 껍데기 같게도 생각되면서 나를 버리지 않고 따르는 그것이 차라리 반갑게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 계용묵의 「고독」 중에서
“나의 산보로 … 낡은 성벽을 좇아서 청태가 끼고, 늙은 소나무들이 척척 늘어진 외로운 산길을 걷고 있노라면 어쩐지 마음이 유쾌하다. 자금색 황혼이 금붕어 꼬리같이 나무 사이에 어른거리고, 잿빛 비둘기는 소나무 위에서 울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간 세상의 모든 구속에서 해방된 듯하다.” – 노자영의 「고독한 산책」 중에서
“생활이라는 중압은 늘 훤조하며 인간의 부드러운 정서를 억누르려 드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라는 데 깃들이는 사람들은 이 중압을 한층 더 확실히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를 보아도 교착된 강철과 거암과 같은 콘크리트 벽이 숨찬 억압 가운데 자칫하면 거칠기 쉬운 심정을 조용히 쉴 수 있도록, 그렇게 알맞은 한 개의 의자와 한 개의 테이블이 있다면 어찌 촌가를 에어내어 발길이 그리로 옮겨지지 않을 것인가. 가(加)하기를 한 잔의 따뜻한 차와 가연의 훤조한 잡음에 바뀌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 심령들의 위안됨이 더한층 족하다고 하지 않으리오.” – 이상의 「추등잡필」 중에서
○ 홍길복 목사의 세번째 잡기장 (71) 중에서 _ 10월 7일자

– ‘아이들과 어른들’
아이들은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아이들은 참을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늘 자기들이 먼저 하려고 합니다.
먼저 먹으려 하고, 앞장 가려고 하고, 먼저 잡으려하고, 먼저 말하려고 하고, 먼저 나서고, 자기가 일등이 되려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무엇이든 천천히 하려고 합니다. 서두루지 않고 기다릴줄 압니다. 어른들은 나중에 먹겠다고하고, 나중에 하겠다고 하고, 마지막에 고르겠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말하는 것도 남들이 하는 이야길 다 들어본 다음에 하려고 합니다. 남들 뒤에 서고, 꼴등하는 것도 좋다고 하는 게 어른입니다.
어른들은 손주들과 시합을 하거나 경쟁을 해도 늘 져주려고 합니다. 지는 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간 꼭 실수한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는 길과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른의 자세라는 걸 아는 겁니다.
선생님이 먼저 고르세요. 전 나중에 가질께요.
선생님이 먼저 말씀하세요. 전 선생님 말씀 듣고 난 후 천천히 생각해 볼께요.
선생님이 먼저 앉으세요. 전 아직 서있어도 괜찮습니다.
나이가 더해지고 어른이 되어가면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냥 알아지는 것들입니다.
인문학, 인문학 하는데, 인문학이 뭐 별건가요?
하루 하루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지요. ‘사람이 사람 처럼 되는 것’이 인문학이랄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영원한 목표, 우리가 쉬임없이 가야할 길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저는 아침이나 저녁 시간엔 늘 짧은 기도나 묵상 이후에 일기를 씁니다. 아주 오래된 습관입니다. 저를 돌아보는 훈련이지요. 어제 했던 일과 던졌던 말들을 되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단 하루도 부끄럽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어떤 땐 어른이 되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철없는 아이가 되어가는 저 자신을 보면서 ‘멀었구나! 정말 멀었구나!’ 한숨을 쉽니다.
요즘 한국의 신인 트롯트 가수로 크게 유명해진 임영웅이란 분이 얼마 전 자신의 선배 가수인 이미자씨와 나훈아씨의 공연을 보고 난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정말 전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갈길이 멀고도 멀군요!’ 요즘은 이렇게 공개되는 글에선 누구, 누구 하면서 이름을 말하는 게 참 어려워서 누구 누구라고 거명을 하진 못하겠지만, 저 역시 저 앞서 인생을 살아오신 선배들을 생각해 보면 ‘저야말로 언제 사람이 되고 어느 세월에야 어른이 될 수 있으려나? 멀었다, 정말 멀었구나’ 싶습니다.
이 아침도 부끄러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