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호 목사의 컬쳐 스테이지(Culture Stage)
열정과 희생의 삶으로 <소명 – The Call> 을 실천한 ‘고토 켄지’를 추모하며…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저널 – Journal> 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하길 원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것을 찾는 것이다.”
2월의 첫 날을 주일로 맞으며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개학은 지난 주에 있었지만 새 학년을 맞이하는 주일학교 친구들을 생각하며 이들을 축복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게 시작하려던 주일 아침에 IS(이슬람국가)가 억류하고 있던 일본인 고토 켄지(後藤健二) 씨가 참수를 당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억류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교회적으로 기도하며 이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잘 해결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고토씨는 1967년 미야기 현 센다이에서 출생했습니다. 1991년 호세이 대학의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언론인의 꿈을 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도 공부를 하였습니다. 졸업 후, 일본으로 돌아와 1996년 다큐멘터리 등의 TV 프로그램 제작자로 활동하다 독립 영상통신회사인 <인디펜던트 프레스>를 세웠습니다. 그는 홀로 시에라리온‧르완다‧시리아‧아프가니스탄 등 아프리카와 중동의 분쟁 지역을 누비며 아이들 이야기를 주로 보도했으며 찍은 영상과 사진들을 NHK‧아사히TV 등 주요 방송사에 제공했습니다.
고토는 2014년 10월 이슬람 국가(IS)에 붙잡힌 ‘유카와 하루나’의 소식을 접한 후, IS 치하 주민들의 생활상을 취재하기 위하여 시리아로 입국하였지만 소식이 끊겨 행방불명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다, 2015년 1월 20일 IS는 고토가 유카와 하루나와 함께 인질로 잡힌 영상을 공개하였으며 일본 정부에게 몸값으로 2억 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곤, 1월 24일 IS는 살해당한 유카와의 사진을 들고 있는 고토의 영상이 공개하였으며 유카와를 살해하였다는 영문 음성 메시지와 함께 고토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2005년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발생한 폭탄테러 사건으로 수감된 ‘사지다 알 리샤위’의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1월 31일 IS는 고토 겐지의 참수 장면을 담은 영상을 공개하였고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주일 아침 새 학기를 시작하는 아이들을 축복하고푼 마음이 가득했는데 고토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고토씨의 눈길은 언제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전 세계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달려갔다고 합니다. 4년 전부터 내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리아를 오가면서, 아이들의 눈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힘써 왔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고토씨는 영상뿐만 아니라 틈틈이 책도 집필했습니다. 서아프리카의 오랜 내전 국가인 ‘시에라리온’에서 소년병으로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이아몬드보다 평화를 원한다 ― 어린 병사 무리아의 고백> 은 2006년 제 53회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소녀들의 이야기인 <혹시 학교에 갈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책도 출간하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땐 모르는 일이었지만 고토씨는 기독교인이지만 이슬람 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다다고 합니다. 그는 SNS에 “눈을 감고, 가만히 참는다. 화가 난다고 성을 낸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것은 기도에 가깝다. 증오는 사람의 일이 아니고, 심판은 신의 영역이다. ― 그렇게 가르쳐 준 것은 아랍의 형제들이었다”는 글을 남기며 이슬람 지역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쿄 신문>은 고토씨가 현장에서 취재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이 머물 때는 평화와 아동 인권의 중요성을 강연하러 다녔다고 보도했으며 그는 분쟁 지역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어린이‧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을 전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2005년부터 매년 5월이 되면, 그는 ‘도쿄 도 세타가야 구’의 기독교 학교인 <타마가와성학원>에서 중학교 3학년에게 평화를 주제로 수업을 했었습니다. 고토가 IS에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이 학교의 학생 700명은 매일 아침 그를 위해 기도했고 참수 소식이 전해진 후 학교는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기며 그를 추모했습니다.
“고토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비참한 현실에 있다 해도 분노와 증오를 부풀릴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로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평화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의미를 되묻고 싶습니다.”
그가 참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2월 1일, 고토씨의 아내 ‘린코’는 프리랜서 언론인 지원 단체인 <로리펙트러스트 – Rory Peck Trust>에 “가족들의 슬픔이 크다. 우리는, 두 딸의 아버지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부모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분쟁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전하기 위해 힘쓴 남편의 삶이 자랑스럽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 ‘이시도 준코’도 기자회견을 통해 “아들 켄지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꿨고 분쟁과 가난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일했다.”고 했으며 “슬픔이 증오의 사슬을 만들지 않길 바란다”고 남겼습니다.
고토씨를 위해 기도하던 ‘카나자와교회(日本基督教団金沢教会)’의 교인들은 주일예배 중에 슬픈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노카와(井ノ川) 목사’는 “IS는 고토를 통제하려 했지만 그의 영혼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으며 앞서 <주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IS는 종교 근본주의에 의거한 테러 단체며, 인간의 주장을 하나님 위에 두려는 그들의 생각은 본래 이슬람교의 가치와 맞지 않다.”고 했답니다. 인터넷상에서도, 고토의 삶을 추모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국 한 언론인은 자신의 SNS 계정에 고토가 살아생전 시리아 북부 알레포의 아이들과 웃으면서 대화하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그는 IS가 올린 고토 켄지의 참수 영상 대신에 그가 활동하던 사진을 공유하자고 제안했으며 약 1만 5,000명이 고토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고토씨의 이러한 죽음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동지역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요르단에 살았던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하기도 하고, 찍기 어려운 영상일수록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는 프리랜서 언론인의 계산 때문이라고 냉소하기도 합니다. <다이아몬드보다 평화>라는 그의 책이 뒤늦게 베스트셀러가 되는 상황을 보면서 계산적인 일이었다고 비아냥되기도 한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평상시 고토씨의 삶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그의 죽음은 단지 개인의 이익을 따라서 결정한 결과는 아닌 것 같습니다.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며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소명’은 살인자로 쫏겨 도망자로 살았던 모세를 이집트로 다시 돌아오도록 만든 ‘열정’ 이었고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희생’이기도 합니다. 저는 고토 켄지씨의 죽음은 ‘열정’과 ‘희생’을 실천했던 한 사람이 만든 ‘소명’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저서 <소명 – The Call> 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 합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채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