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호 목사의 컬쳐 스테이지(Culture Stage)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 영화 <동주> 를 기대하며 –
학창 시절, 다른 과목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나름 국어 시간은 재미가 있었습니다. 매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새로운 국어책을 받으면, 수학책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집합’과 같이, 국어책에도 등장하는 첫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 입니다. 나름 감성이 풍부한 사춘기 시절에 ‘시’의 매력이 국어라는 과목에 관심을 갖게 했던 것 같습니다.‘시’에 관한 문학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시는 문학의 한 장르이며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 라고 합니다. 자연과 인생을 담은 많은 시들이 있지만 학창시절에 배웠던 시 가운데 그래도 아직도 외우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바로, ‘윤동주’의 <서시> 입니다.
지금 한국에선 영화 <동주> 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정직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TV나 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던 이준익 감독의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시가 어떤 시대와 사람들을 거쳐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온전히 스크린에 담고 싶었던 이준익 감독의 바람은 영화 <프랑스 영화처럼>, <조류인간>, <배우는 배우다> 등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이 각본을 맡으면서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가장 움직인 것은 죽어서야 시인이 될 수 있었던 윤동주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신연식 감독은 “윤동주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시인이 되지 못한 청춘이었다. 동시대에 인정 받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시가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며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수의 시인 중 유독 윤동주의 삶에 이끌렸던 이유를 전했습니다. 이후 무언가 이루고 싶었지만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던 젊은이, 청년 윤동주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었던 두 사람은 그의 삶을 따라 가며 청년 ‘동주’의 작품들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지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들었던 고향을 떠날 때와 창씨 개명을 선택해야만 했던 ‘연희전문학교’ 시절 등 ‘동주’의 생애 가장 중요한 사건들과 맞물리는 시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며 그의 작품이 더욱 가슴 깊이 남을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왕의 남자>로 대한민국 최초 사극 천만 영화의 신화를 써낸 것은 물론 <황산벌>, <라디오스타>, <님은 먼 곳에>, <소원>, <사도>에 이르기까지 사극과 현대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충무로의 거장 이준익 감독은 어떤 시대의 영화를 그리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과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세심한 연출력을 보여줍니다.
사극으로 이미 충무로에서 정평이 나 있는 이준익 감독에게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한 오랜 벗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이 어떻게 시대를 이겨 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는 이준익 감독은 “28세에 삶을 마감한 신념 가득했던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가 나이 많은 이들에게는 식지 않는 청춘으로 가슴에 남아 있길 바라고, 그보다 어린 이들에게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갔는지 느끼면서 자신의 삶에 큰 가치를 얻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스크린에 옮겨오는 작업에 있어 그의 시를 온전하게 담아내는 것 또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이준익 감독은 시와 영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들려주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강하늘의 담백한 목소리가 덧입혀진 윤동주 시인의 작품들은 영화 속 ‘동주’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과 맞물리게 흘러갑니다.
‘동주’가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길]은 그들의 앞날을 예견케 합니다. ‘동주’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여진’과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때는 [별 헤는 밤]으로 두 사람 사이의 풋풋한 감성을 더하기도 합니다.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 개명을 한 후 읊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는 [참회록]의 구절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던 청년 ‘동주’의 고뇌와 시대적인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어 후쿠오카의 형무소에서 점점 피폐해지는 ‘동주’의 모습과 강하늘의 담담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서시]는 그의 비극을 더욱 극대화하며 아픔을 전하게 됩니다.
그저 시가 쓰고 싶었던 ‘동주’는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와 갈등하고 친구인 ‘몽규’가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열등감을 삭히게 됩니다. 문예지를 함께 만들던 동갑내기 여학생 ‘여진’에게 설렘을 느끼고,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시를 계속 쓰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고민하는 ‘동주’의 모습과 일본 경찰의 철통 같은 감시로 뼈저린 좌절을 맛보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몽규’의 모습은 현재 우리네 평범한 청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나 청춘은 있었고, 청춘은 언제나 시대 때문에 아파왔다. 지금의 세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는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시대가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각자가 처한 현실 앞에서 저항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뜨겁게 청춘을 보냈던 두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주>는 흑백의 영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동주>가 열한 번째 작품인 이준익 감독에게도 흑백 영화는 첫 도전이기에 더욱 특별했습니다. 그는 “흑백 사진으로만 봐오던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독립 운동가의 모습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흑백 화면을 선택했다. 청춘의 시절을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낸 이분들의 영혼을 흑백의 화면에 정중히 모시고 싶었다”며 흑백 영화를 고집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흑백 촬영은 각 색상이 지닌 밝기가 같거나 비슷할 경우 피사체의 구분이 또렷하게 되지 않기 때문에 빛의 강약, 공간의 배치, 인물의 움직임 등 꼼꼼하게 확인하는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또한,흑백은 컬러에 비해 배우에게만 오롯이 집중해 캐릭터의 심리나 상황을 더욱 주목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어, 시대에 아파하는 청춘 ‘동주’와 ‘몽규’의 감정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카메라에 과도한 움직임을 주지 않고 촛불이나 호롱불 같은 빛만으로 공간의 흔들림을 일으켜 생각할 수 있는 정서적인 여백까지 고려하는 등 두 청년의 감정이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도 와 닿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 제작진의 노력 덕분에 <동주>의 흑백 영상이 더욱 깊이 있게 완성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시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며 이해는 또 다른 사랑이다. 모든 인간에게서 시로 본다.” 는 정승호 시인의 말처럼 71년전에 살았던 청춘들의 시를 통하여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청춘들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한국 영화들을 호주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흐름이 빠르고 크게 웃는 영화들도 좋지만 시와 같은 깊은 감동이 있는 <동주> 같은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시편 119: 116)
임기호 목사는 다음세대와 문화사역을 위하여 ‘메시지 커뮤니티 교회’와 ‘메시지 스쿨’을 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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