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5년 1월 18일,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Francisco Pizarro, 1478 ~ 1541)가 페루 리마 건설
패루의 수도 리마는 1535년 1월 18일에 잉카를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세워졌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스: Francisco Pizarro, 1478년 3월 16일 ~ 1541년 6월 26일)는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Conquistador, 스페인어 ‘정복자’란 뜻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스페인인들을 의미)이다.
잉카 제국을 정복하였으며,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의 건설자이다.
공교롭게도 또 다른 유명한 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 아즈텍 정복)와는 7촌 친척 사이다.
신대륙 정복 활동에 참여,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그의 동료 디에고 데알마그로를 처형한 탓에 알마그로의 아들과 그 일파들에게 암살당한다.
리마 (스: Lima)는 페루의 수도이자 리마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태평양에 면해 있다.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쿠스코 대신 수도로 건설되었으며 식민지 시대에는 페루 부왕령의 수도였다.
리마는 1535년 1월 18일에 잉카를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 ,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세워졌다. 리마의 이름의 유래는 시내를 흐르는 리마크 강 (río Rímac)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이름은 “La Ciudad de los Reyes”(왕의 도시)였다.

– 리마 역사
잉카 제국의 지배가 미치기 전인 선 콜럼버스 시대에 이미 현재 리마의 위치에 일부 아메리칸 인디언 그룹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대지의 신 파체카마크를 믿는 이치마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3세기부터 8세기 무렵에 걸쳐 루린 계곡의 파체카마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이 지역은 몇 가지 독특한 유적이 남아있다. 잉카 시대에 들어서면서 거대한 태양 신전과 달의 관이 건설되고, 종교적인 중심지 역할도 하게 되었다.
1535년 1월 18일, 잉카 제국을 정복했던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 등 콘키스타도르 일행은 리마크 강의 우측 연안 리마의 수장, 타우리체스코의 관에서 스페인식 의식에 따라 “부왕들 도시”(La Ciudad de los Reyes)를 건설하였다. 위치 선정을 계획하며 처음에는 안데스 산맥 중턱의 하우하가 후보에 올랐지만, 고도와 해상 교통의 불편 등으로 보류되었으며, 태평양에 접한 리마크 강 기슭의 리마가 부지가 선정됐다. 1542년에 리마는 페루 부왕령의 수도로 지정된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멕시코시티와 함께, 그때까지 이용하던 히스파니올라섬의 산토도밍고 대신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 지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부터 17세기를 통해서, 리마는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 지배의 거점으로 알토 페루의 포토 시 은광의 은을 유럽에 수출했기 때문에 중계지로 번창했다. 1551년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산 마르코스 대학이 설립되었다. 1614년 인구는 25,000명이 되었고, 리마의 발달과 함께 도시 문화가 번성하여, 산 프란시스코 교회 및 토레태그레 저택 등의 화려한 건축물이 지어졌다. 1687년과 1746년에 발생한 큰 지진으로 많은 건축물이 파괴되었지만, 리마의 영화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1761년 부임한 부왕 아마토는 대규모 도시 계획과 연극을 진흥하여 지식인 문화를 번성하게 했다. 한편 리마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와, 도시에 유입된 원주민계의 주민, 메스티소 등이 같이 살아가고 있었고, 백인 상류층의 문화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크리올 문화가 형성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 호세 1세로 즉위 시키자 그에 반발한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스페인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히스파노아메리카의 크리올로들은 호세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 리마의 크리올로는 특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독립에 소극적 이었지만, 1821년 아르헨티나에서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리마를 해방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후 리마는 독립 세력의 혼란 속에서 다시 스페인 왕당파군에 탈환되었지만, 결국 시몬 볼리바르와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가 아야쿠쵸 전투에서 호세 드 라 셀나가 이끄는 왕당파와 군대를 괴멸시켜 페루의 독립을 확정했다.
독립 이후 페루의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고, 각지에서 카우딜로가 발호했지만, 라몬 카스티야가 안정을 시키는데 성공하여, 페루는 구아노를 수출해서 근대화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가스등이나 철도가 건설되었고 1872년에는 도시 계획을 위해 리마의 성벽이 파괴되었다.
또한 19세기 중반부터 유럽과 청나라(중국)에서 이민자가 들어왔고, 19세기 말에는 일본인 이민도 시작되었다. 이런 이민자들은 코스타의 대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후, 많은 리마로 유입되어 작은 상점을 운영하였다.
1879년 발발한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가 열세에 빠지자, 1881년 칠레군은 리마를 점령했다. 칠레의 지배는 2년간 이어졌고, 안콘 조약이 체결되어서야 칠레군은 철수하였다.
1940년 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슬램의 건설이 활발해졌다. 또한 같은 해 만주사변 이후 고조된 반일 감정을 배경으로 반일 폭동이 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페루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왔고, 이것으로 마을이 급속히 확대되어 도시로 발전하였다. 인구는 1940년 35만명에서 40년 후인 1980년에는 무려 11배나 증가했다.
1968년 군사 혁명으로 벨라스코 장군이 정권을 잡고, 페루 혁명이 시작되면서 리마 주변의 빈민가는 “젊은 도시”(푸에블로 호 벤)라는 빈민가의 자치 운동이 추진되었다.

○ 리마 건설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 초기 생애
피사로는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의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도시 빈민층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며,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6촌이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략 1470년대 정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피사로는 죽을 때까지 문맹으로 살게 되었다.
피사로는 1509년 11월에 신대륙, 즉 아메리카 대륙의 현재 콜롬비아가 있는 지역으로 항해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려 하였으나, 기후와 질병 등으로 인해 결국 식민지 사업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후, 한동안 거리를 전전하다 1513년에 또다시 항해단에 입단하여 바다로 나아가게 된다.

– 정복자
1509년 11월에 피사로는 알론소 데 오제다가 이끄는 선단에 합류하여 현재에 콜롬비아로 항해했고, 1513년에는 바스코 발보아의 선단에 합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바라본 유럽인들 중 한 명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모험을 통하여 식민지의 총독과 가까운 사이가 되게 되었고, 같은 해에 그는 원주민들과 가축들을 관리하는 직을 맡게 되었다. 나중에 총독이 발보아를 점차 싫어하게 되고, 마침내 제거해야겠다는 계획을 짠 후, 그는 피사로에게 발보아를 직접 체포하여 데려오라고 명한다. 피사로는 그를 그대로 체포하여 끌어왔고, 발보아는 1519년 1월에 사형당한다. 한편 피사로는 총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당시 막 지어지고 있던 파나마시티의 시장직과 행정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된다.
한편,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피사로에게 큰 관심을 갖게 했고, 그는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원정대를 꾸리게 된다. 그는 1524년과 1526년에 각각 한 번씩 원정대를 만들어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했는데, 고질적인 기후 문제와 향토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파나마의 총독은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지만, 피사로는 이를 거부했고 모험을 계속해나갔다. 그는 끊임없이 남하했고, 1528년 4월에 북부 페루 지방까지 진출하여 그 곳의 원주민들과 황금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그에게 세 번째 원정을 나서겠다는 열망을 심어주었고, 이후 피사로는 곧바로 파나마로 돌아가 총독에게 지원과 함께 새로운 원정단 조직을 요청한다. 하지만 총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향해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직접 설득하려 나선다. 그의 계획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는 지원부대 뿐만 아니라 그가 점령하는 땅에 대한 지배권까지도 일부 손에 넣게 된다. 그는 이후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모두 불러모은 후 1530년에 파나마를 떠난다.
해안가에는 워낙 호전적이거나 이방인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피사로와 그 일행은 내륙을 통해 점차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그는 결국 잉카 제국이 다스리던 영토까지 들어가게 되고, 당시 잉카 제국의 황제였던 아타우알파는 피사로가 그의 영토에 감히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1532년 11월에 피사로 일행에 의해 포로로 잡히게 되며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방에 가득 들어찰 만큼의 황금을 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살려줄 것을 빌었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하였으나 1533년에 피사로에 의해 사형당하고 만다.
1535년 1월에 그는 현재 페루의 수도 리마를 세웠으며 이를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했다. 한편, 피사로는 그와 함께 잉카 정복에 나섰던 일행 중 하나인 디에고 알마그로와 내분이 일어나게 되면서 결국 전투까지 치르게 되고, 여기서 패배한 디에고 알마그로는 포로로 잡혀 사형당했다. 이후 이에 앙심을 품은 알마그로의 아들이 1541년 6월에 피사로를 리마에서 살해함으로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도 끝나게 된다. 그의 유해는 리마 대성당에 묻혔다.

– 피사로의 죽음, 망코 잉카의 죽음
피사로는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것을 이루었다. 후작이라는 높은 지위, 막대한 재산, 그리고 페루의 지배자라는 신분. 나름대로 소박한 생활을 하며 리마 건설에 몰두한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반대세력은 없을 줄 알았지만, 살아남은 알마그로 일파가 여전히 존재했다.
알마그로 일파는 칠레 개척도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지도자까지 잃었으며 잉카 원정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재산도 챙기지 못했던 상황들, 이 모든게 다 피사로 때문이라며 불만을 드러냈고, 결국 알마그로 일파는 피사로가 살아있는 이상 꿈도 희망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라스 살리나스의 전투가 끝난 지 3년이 지난 1541년 6월 26일 일요일. 당시 피사로는 알마그로 일파에 대한 정보를 몇 차례 전해 듣지만, 곧이듣지 않는다. 그러나 조심하며 일요일 미사에 불참하고 집에서 머물며 손님들과 점심 만찬을 벌이던 중 방심한 상태를 노리고 알마그로 일파의 암살자들 20명에게 습격당한다. 이 20명 중에는 알마그로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사로와 그의 손님 중 일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무장도 제대로 못 갖춘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살해당한다.
피사로는 격투 끝에 숱한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표시한 뒤 힘겹게 “고백…”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목숨이 끊기기 전 하나님께 죄를 사해달라는 의미였다는 견해도 있고, 암살자들에게 간단한 고해성사를 볼 시간을 달라는 의미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때 암살자 중 한 사람이 꽃병으로 머리를 가격해 피사로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이 소식에 놀란 카를로스 1세는 국왕의 대리인을 보내 이들을 제압하고, 주모자들 대부분을 체포한 뒤 처형한다. 알마그로의 아들도 이 때 처형당한다.
그런데 암살자들 중 예닐곱가량이 탈출에 성공한다. 이들은 빌카밤바의 망코 잉카에게 달아났고, 피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망코 잉카는 이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들은 망코 잉카를 죽여 그 댓가로 스페인 측에 용서받아 무마하려는 계획을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피사로 암살 3년 뒤인 1544년, 망코 잉카마저 암살된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계획과는 달리 도주에 실패하고 잉카인들에게 붙들려 전원 살해당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