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안티크리스트 : 크리스트교에 대한 저주
F.니체 / 이너북 / 2008.2
‘안티크리스트’는 세계의 지성 니체,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도 혹독한 말로 크리스트교를 고발하고 있는 책이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재탄생됐다고 할 정도로 이 책은 당시 시대상에 녹아내린 니체의 혁명적인 사상들의 총 집합체이자 시대적 센세이션이었다. 니체는“신은 죽었다”고 말했으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신의 본래 모습을 왜곡한 크리스트교의‘신’을 비판했을 뿐이다. 19세기 니체가 존재했던 시기는 모든 가치를 무가치로, 모든 진리에서 거짓을, 모든 정직함에서 비겁한 마음을 만들어내는 크리스트교가 주변의 모든 것을 썩게 했다고 판단했다.
신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트교의 종교적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왜 크리스트교가 비판당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리적인 이론 체계를 이용해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 목차
머리글
제1장 ‘신’이란 그런 것이었나?
‘악’이란 무엇인가
‘진보주의’는 잘못된 생각
‘원죄’에 속아 넘어간 철학자들
크리스트교는 ‘동정’의 종교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사람들
오류투성이인 칸트의 철학
진리란 믿음에 불과하다
진짜 신과 가짜 신
신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제2장 크리스트교가 세계를 타락시켰다
불교의 위대함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크리스트교
진리와‘진리일 것이라는 믿음’
크리스트교와 유대 민족의 관계
‘기분이 좋은’ 이유는 양심의 가책 때문?
『성경』이 바꾼 이스라엘의 역사
예수는 단순한 아나키스트
크리스트교는‘은둔형 외톨이’
제3장 크리스트교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다
‘보이는 대로’보지 않는다?
예수를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이유
예수와 크리스트교는 무관하다
크리스트교의‘어리석음’
교회의‘자학사관’에 대한 비웃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기
제자가 왜곡한 예수상
예수의 죽음을 이용한 바울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교만
제4장 전쟁을 낳은『신약성경』
교회는‘도덕’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오컬트 본『신약성경』폭언집
『성경』에 등장하는‘제대로 된 인간’
과학은 크리스트교의 최대의 적
크리스트교가 전쟁을 초래한 이유
과학이란‘원인과 결과’
진리는‘인간이 쟁취할 것’
민주주의는 필요 없다
거짓말만으로 버틴 2000년
제5장 적은 크리스트교이다
신앙이란 자기 상실
‘거짓’의 구조
크리스트교는 여자를 무시한다
법률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다
평등주의는‘악마의 사상’
크리스트교가 파괴한 로마제국
이슬람교에 무시당해도 싸다
십자군은 해적
르네상스는 반(反)크리스트 운동
맺음말: 피고 크리스트교에 대한 최종 판결문
○ 책 속으로
그러므로‘신’이라는 단어에는 두 종류의 신이 있다.
하나는‘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는 신, 즉 민족 신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권력에 무기력’한 신이다. 그런 신은 필연적으로 선해진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트교이다.
크리스천은 다른 문화를 인정하기는커녕 자신들과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리고 철저히 박해한다. 참으로 음침하고 불건전하며 위험한 자들이다. 크리스천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경증 환자다. 그들에게는 신경과민이 바람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풍요로운 대지와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육체’를 가진 자에게 반발하고 자신들은 영혼만을 믿는다. 그러니 맞서 싸우자고 하는 것이다. 크리스트교 사고방식의 기본은 훌륭한 마음 자세, 기력과 자유, 편안한 마음, 상쾌한 기분, 기쁨에 대한 증오이다.
오늘날의 정치가는 특권이나 지배권을 주장할 용기,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동료를 경외할 마음이 전혀 없다. 우리 시대의 정치는 완전히 기력을 상실하여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예전의 귀족주의는‘영혼의 평등’이라는 거짓말 때문에 힘을 상실했다.
만약‘다수의 특권’을 믿는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크리스트교나 크리스트교의 개념 때문이다. 크리스트교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용졸한 인간을 위한 교의는 인간을 용졸하게 만든다.
크리스트교의 성직자는 늘 전쟁을 필요로 했다. 전쟁은 과학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하는 힘은 매우 강했다. 전쟁이 되풀이되었지만 인간은 지혜를 가지고 신과 성직자에게서 해방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은 이렇게 결심하기에 이른다. ‘인간은 과학적이 돼버렸다. 이젠 감당할 수 없다. 인간을 익사시켜 죽이자’라고.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과학의 원리는‘원인과 결과’이다. 원인이 있기에 그것이 결과로 이어지며, 이는 당연한 이치다. —본문 중에서
에피쿠로스는 이미 이런 종류의 선행 형식과 싸운 적이 있었다. 에피쿠로스가 무엇과 싸웠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루크레티우스를 읽어보라. 그는 이교도와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교’에 맞서 싸웠다. 말하자면 죄 개념에 의한, 벌과 불멸 개념에 의한 영혼의 타락에 맞서 싸웠다.ㅡ 그는 지하적 제의들, 잠복하고 있던 그리스도교 전체와 맞서 싸웠다ㅡ 불멸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진정한 구원이었다.ㅡ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이겼을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의 존경할 만한 사람은 전부 에피쿠로스주의자였기에.
그때 바울이 등장한 것이다. 바울, 로마의 ‘세상’에 대한 찬달라적 증오의 육화이자 찬달라적 증오의 천재인 바울, 유대인이며 영원한 유대인의 전형인 바울…… 그가 알아차렸던 것, 그것은 어떻게 유대교 변두리의 작고도 종파적인 그리스도교-운동을 이용하여 ‘세계적인 불길’을 일으킬 수 있을지, 어떻게 ‘십자가의 신’이라는 상징을 가지고서 하부에 있는 모든 것, 은밀히-반항하는 모든 것,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아나키적 책동의 유산 전체를 거대한 힘에 이르게 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진리에 가차없는 폭압을 가하면서 그 찬달라적 종교들의 매혹 수단이었던 표상들을 자신의 고안물인 ‘구세주’의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단 입안에만 넣은 것이 아니다ㅡ그는 구세주를 미트라의 사제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때가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던 때였다. 그는 ‘세상’의 가치를 빼앗아버리기 위해서는 불멸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파악해냈다. 그는 ‘지옥’ 개념이라면 로마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ㅡ’피안’이 삶을 죽여버린다는 사실을 파악해냈다. ― <안티크리스트>
1. 신의 탄생
스스로를 믿고 있는 민족은 자기네의 고유한 신 또한 갖는다. 신 안에서 그 민족은 그들을 정상에 위치시키는 조건들, 즉 그들의 덕을 숭배한다. 자신에 대한 기쁨을,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존재에 투사한다. 풍요로운 자는 베풀기를 원한다. 긍지에 찬 민족은 희생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전제들 안에서 종교는 감사하는 형식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한다. 이를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2. 선하며 악한 신
그런 신은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어야 하며, 친구일 수도 적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는 선한 점으로나 악한 점으로 인해 반드시 경탄받는다. 신에게는 반자연적인 거세를 가해 한갓 선한 신으로 만드는 것은 여기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악한 신을 선한 신만큼이나 필요로 한다. 그들 고유의 존재는 관용과 박애 덕분만은 아니니까. 복수와 분노와 질투와 조소와 간계와 폭력을 알지 못하는 신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승리와 파괴의 황홀한 열정조차 알지 못할 그런 신, 누구도 그런 신은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 왜 그런 신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3. 거세, 선한 신과 악마
한 민족이 몰락할 때, 미래에 대한 믿음, 자유에 대한 그들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느낄 때, 복종이 가장 이로우며, 복종한 자의 덕목이 보존 조건이라고 그들이 의식할 때, 그들의 신 또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신은이제 음헌한 위선자가 되고 겁도 많아지고 겸손해져서 ‘영혼의 평화’를, 더 이상-증오하지-않기를, 관용을, 친구와 적마저도 ‘사랑’하기를 권할 것이다. 신은 계속해서 도덕화하고, 모든 개인적인 덕의 동굴로 기어 들어가, 모든 이를 위한 신이 되고, 사인(私人)이 되며, 세계인(cosmopolitan,코스모폴리탄)이 된다. 신은 예전에는 한 민족, 한 민족의 강력한 힘, 한 민족의 영혼에서 나오는 공격적인 모든 것과 모든 힘에의 갈망을 표현했었다. 이제 신은 한갓 선한 신일 뿐이다.
가장 남성적인 덕목과 충동들을 제거당한 데카당스의 신은 이제 필연적으로 생리적으로 퇴행한 자들, 약자들의 신이 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약자라고 부르지 않고, ‘선한 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힌트도 필요없이 역사의 어느 순간에 선한 신과 악한 신이라는 이분법적 허구가 비로소 가능해졌는지를 이해하고 있다. 자기네(피정복자)의 신을 ‘선 그 자체’로 끌어내리는 피정복자들의 본능이 정복자들의 신의 선한 속성을 삭제해버린다. 이들은 자신의 지배자들에게 그들의 신을 악마로 만들며 복수하는 것이다. 선한 신 그리고 악마, 양자 모두 데카당스의 소산이다.
4. 선한 신의 여행
신 개념이 지친 자들을 위한 지팡이라는 상징으로, 물에 빠진 모든 자를 위한 구조대라는 상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침몰해간다면, 신 개념이 가난한 자들의 신, 죄인의 신, 병자의 신의 전형이 된되면, 그리고 구세주, 구원자라는 술어가 말하자면 신에 대한 술어로 남게 된다면.. 이런 변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적인 것의 이러한 환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물론ㅡ신의 왕국은 그렇게 해서 좀더 커졌다. 예전에 신은 단지 그의 민족, 그의 선택된 민족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민족과 같이 외국으로 나가 사방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어디서든 가만히 눌러 있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마침내 온갖 곳에 본거지를 틀고 위대한 세계인(cosmopolitan)이 되기에 이르도록. 그가 ‘대다수’를 그리고 지구의 반쪽을 자기편으로 얻기에 이르도록 말이다.
5. 신의 붕괴 (철학자를 만난 신)
창백한 자들 중에서 가장 창백한 자인 형이상학자 제씨들, 이 개념의 백색증 환자들마저 그 신을 지배하게 되었다. 신이 그들이 짓거리에 최면이 걸려 한 마리 거미가, 형이상학자가 되어버릴 때까지 그들은 신의 주변에 오랫동안 그물을 쳤다. 이제 신은 세계를 다시 자기 자신에게서 짜냈으며ㅡ스피노자적으로ㅡ 이제 스스로를 점점 더 얇게 점점 더 창백하게 변모시켜, 그는 ‘이상’이 되었고, ‘순수정신’이 되었으며, ‘절대자’가 되었고, ‘물자체’가 되었다. 신의 붕괴 : 신이 ‘물자체’가 되었다. ― <안티크리스트>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이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 전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확신은 감옥이다. 확신은 충분히 넓게 보지 않고, 발 아래를 보지 않는다. 위대한 것을 원하고, 그것을 위한 수단을 원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자다. 온갖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강한 힘에 속한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들을 묶고 고정시키는 외부의 규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강압이나 좀더 고차적인 의미에서의 노예제가 어떻게 해서 의지박약의 인간을 번성시키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조건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확신이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확신하는 인간에게 확신은 그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많은 것을 보지 않고, 그 어느 것에도 공평하지 않고, 철저히 편파적이며, 모든 가치를 고정적이고 자기에게 필요한 시각으로 보는 것 ㅡ 이것만이 확신하는 인간 종류를 존재하게 해주는 유일한 조건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그는 진실한 인간의 반대이자 적대자이고ㅡ진리의 반대이자 적대자이다.
믿는 자는 ‘참’과 ‘거짓’이라는 문제에 대한 양심을 자기 마음대로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이때 정직하면, 그는 즉시 몰락해버릴 것이다. 확신하는 자의 시각의 병적 제약성은 그를 광신자로 만든다ㅡ사보나롤라, 루터, 루소, 로베스피에르,생시몽처럼ㅡ강하고 자유롭게 된 정신의 반대 유형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런 병든 정신들, 이런 개념의 간질병자의 거창한 태도는 많은 대중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광신자들은 그림처럼 아릅답게 보인다. 인간은 근거를 듣느니보다 제스처 보기를 더 좋아한다. ― <안티크리스트>
과거에 대해서는 나는 다른 모든 인식자들처럼 아주 관용적으로 대한다. 말하자면 도량 있는 자제력을 가지고서 : 전 세기에 걸친 정신병원-세계를, 즉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적 신앙’, ‘그리스도교적 교회’를 나는 암울한 신중함을 가지고 통과해간다.ㅡ나는 인류에게 그들의 정신병에 대한 책임을 지우지 않도록 조심한다.
하지만 내가 현 시대로, 우리의 시대로 들어서자마자 곧 내 감정은 뒤바뀌고 폭발해버린다.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신학자와 사제와 교황이 하는 모든 말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짓이라는 사실이다ㅡ 그들이 ‘순진’해서나, ‘무지’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이가 알고 있듯이 사제 또한 ‘신’, ‘죄인’, ‘구세주’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피안’, ‘최후의 심판’, ‘영혼의 불멸’, ‘영혼’ 자체라는 개념들이 말이다 : 이것들은 사제들을 지배자로 만들었고 지배자로 남게 했던 고문 기구들이자, 잔인함의 체계들이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안티크리스트>
’기쁜 소식(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된 삶이, 영원한 삶이 발견되었다는 것ㅡ이런 삶은 약속되지 않는다. 이런 삶은 거기,너희 안에 이미 있다: 사랑하며 사는 삶으로서. 누구든지 다 신의 자식이다ㅡ예수는 결코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ㅡ신의 자식으로 누구든 다 서로 동등하다.
‘복음’이란 바로 아무런 대립자도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 하늘나라는 아이들의 것이다 ;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싸워서 획득한 신앙이 아니다. ㅡ 이 신앙은 거기, 시작부터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신적인 것으로 아이 같은 천진함이 되돌아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기적에 의해서든 보상이나 약속에 의해서든 입증하지 않는다. ‘성서’에 의해서는 더욱 아니다 : 신앙 그 자체가 매 순간마다 신앙의 기적이고, 신앙에 대한 보상이나 증거이며 ‘신의 나라’인 것이다. 이런 신앙은 자신을 공식화하지도 않는다.
첫 사도들은 온통 상징과 불가해성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 존재에 관하여 어떤 것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그네들의 조잡성으로 예수를 번역해버렸다. ㅡ 그들 머리속에서 예수라는 유형은 좀더 잘 알려져있는 형식으로 변형된 후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선지자, 구세주, 미래의 판관, 도덕의 설교자, 기적을 행하는 자, 세례자 요한ㅡ 예수라는 유형을 오해할 계기는 이처럼 많았다.
그것은 살아 있고, 공식들에는 저항한다…… 인도인 사이에서라면 샹캬 개념을, 중국인 사이에서라면 노자의 개념을 이용했을 것이다ㅡ그러면서 아무런 차이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표현을 자유롭게 해보자면 예수를 ‘자유정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ㅡ 그에게는 고정된 것은 죄다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 말은 죽이는 것이고, 고정된 것은 모두 죽이는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개념인 ‘삶’의 경험은 그에게서는 온갖 종류의 말, 공식,법칙, 신앙,교의와 대립한다. 그는 단지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아왔고, 그가 가르쳤던 대로 죽었다ㅡ ‘인간을 구원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겨놓은 것은 바로 실천이었다: 재판관과 호위병과 고발자와 온갖 종류의 비방과 조소앞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ㅡ 십자가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였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 않는다. 그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태를 도발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그들안에서 간구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도적에게 그가 한 말은 복음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신적인 사람이었구나. ‘신의 자식’이었구나”라고 그 도적은 말했다. “네가 그것을 느끼면ㅡ구세주가 답하기를ㅡ 그러면 너는 낙원에 있는 것이다. 너 역시 신의 자식인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책임 지우지 말라. 또한 악한자에게도 저항하지 말고ㅡ 그를 사랑하라… ― <안티크리스트>
정신적인 문제에 냉혹할 정도로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와 민족 이기주의의 천박한 시대적 헛소리를
자기의 발 아래의 것으로 내려다보는 법을 익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가 그에게 이득을 줄지 손해를 줄지 물어서도 안 된다.
오늘날 어느 누구도 물어볼 용기가 없는 문제들을 선호하는 강건함
금지된 것에 대한 용기
미궁으로 향하는 예정된 운명
일곱 가지 고독에 의한 한 가지 경험
새로운 음악을 위한 새로운 귀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위한 새로운 눈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진리들에 대한 새로운 양심
그리고 위대한 양식의 경제성을 추구하려는 의지
그 힘과 열광을 흩어지지 않게 한데 모으려는 의지
자신에 대한 존경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 자유을 가져야 한다.
이런 자들만이 나의 독자이고, 나의 정당한 독자이며, 예정된 독자이다. ― <안티크리스트>
○ 출판사 서평
.니체의 정신 속에 살아난 크리스트교의 낡은 정치를 파헤치다!
.니힐리즘 사상이 만들어낸 니체의 반론적인 크리스트교 다시 읽기!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우리의 삶 속엔 종교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나 기독교인들이 많은 우리나라는 한 블록 넘어 교회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 니체가 살아 있던 그 시기 또한 크리스트교가 많이 전파되어 사람들의 가슴속에 신앙이라는 이름이 살아 숨쉬던 시기였다. 니체하면 우리는 당대의 철학자이자 고대문헌학자라고 알고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그의 삶 속에 투영된 크리스트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 책을 읽고 개중엔 크리스트교를 어떻게 비판할 수 있냐면서 야단법석을 떨 수도 있다. 하지만 니체는 예수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속에 녹아내린 낡은 크리스트교를 비판했다. 또한 이 책을 읽다보면 왜 니체가 크리스트교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신의 본래 모습을 왜곡한 크리스트교의‘신’을 비판했을 뿐이다. 19세기 니체가 존재했던 시기는 모든 가치를 무가치로, 모든 진리에서 거짓을, 모든 정직함에서 비겁한 마음을 만들어내는 크리스트교가 주변의 모든 것을 썩게 했다고 판단했다.
니체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크리스트교의 정신을 비판했다. 이 책은 니체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재미있으면서 가장 위험한 부분이다. 지적인 스릴과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흥분을 독자들이 맛보기를 바란다고 할 만큼 어떤 이에게는 이 책이 스릴과 흥분을 느끼게 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도리어 반박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을 만큼 심한 대목이 있기도 하다. 가령『신약성경』을 읽을 때 나는 항상 장갑을 낀다. 추잡스러워 만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크리스천에게서는 썩은 냄새가 난다’라는 글귀는 충격적인 메시지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니체는 단순히 크리스트교를 비판하기에 앞서 플라톤과 파스칼과 같은 당대 철학자를 내세워 왜 크리스트교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지 분별성을 가지고 얘기한다.
-일례로 예전에 파스칼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는 크리스트교의‘원죄설’을 믿고 말았다. 크리스트교의 설명을 빌리자면 ‘원죄’란‘인간이 태어나면서 지은 죄’라고 한다. 파스칼은 이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이성이 타락한 이유가 ‘원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그런 말은 믿지 말았어야 하는데 말이다. 파스칼의 이성은‘원죄’가 아니라 크리스트교에 의해 부패했다. 또한 결국 칸트의 실패 원인은 역사를 제대로 보지 않은 데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도덕에 의한‘인간의 선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럼 그‘경향’인지 뭔지를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칸트의 본질은 데카당스에 지나지 않았다.-
니체는 이런 식으로 크리스트교의 부패를 낱낱이 파헤쳤으며‘데카당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사태를 개탄했다. 그는 크리스트교는 한마디로 사람을‘동정’하는 종교라고 지칭했으며,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사람들이 왜 크리스트교의 잘못된 교리를 이용하면서 삶을 방탕하게 살아야 하는지 알렸다. 즉, 인간을 동정하지 않아야 하는데 크리스트교는 인간을 동정하고 있다고 했다. -성경 구절에도“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은 6장 33절)라는 구절을 인용해 인간을 옹졸하게 만들며 도태되게 만드는 동시에 동정을 구하는 종교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쩌면 단순히 크리스트교만을 니체가 비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크리스트교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고대 인도의’마누법전’, 이슬람교의 마호메트와 플라톤의 개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처럼 크리스트교만이 짜 맞추기식 논리의 종교가 아니라 성스러운 거짓말이 다른 성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 책에서는 니체가 특정한 이상 세계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은 받지 않았다. 예수 또한‘죄’와‘벌’로 물든 신앙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실천하는 위대한 인물로 묘사했다. 즉,‘고귀한 삶의 방식’을 하나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라 단지 개념에 의한 사고를 지나치게 부풀려 현실 세계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규탄했을 뿐이다. 현실 세계와 니체의 사상이 빚어낸 종교의식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처한 세계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니체는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극도로 치닫게 된 현시대 속에서 크리스트교를 비판했다. 그는“신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신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에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또한 니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크리스트교의 낡은 정신 세계에 초점을 두고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니체! 그는 형이상학적인 탈출구 속에서 시대가 만들어낸 도덕적인 삶의 방향의 좌표를 스스로 작성한 시대의 혁명론자이다.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독일 라이프치히 근교의 뢰켄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루터 교회의 목사였다.
슐포르타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바그너의 음악과 독일 낭만주의 작가들의 글에 심취했다. 그러나 뒷날엔 바그너의 음악을 비롯해 낭만주의를 맹비난한다. 본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녔으며, 24세에 바젤 대학 교수가 되었다.
1872년에 최초의 저서 『비극의 탄생』 출간했다.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선과 악을 넘어서』(1886), 『적그리스도』(1888) 등을 발표했다.
1889년에 신경쇠약을 겪은 뒤로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